월호

“정화의 대상은 인간… 지구는 회복 가능” [+영상]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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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23-07-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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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S·G 관통하는 하나의 개념 ‘다양성’

    • 기후위기, 과학자 죄가 커… ‘자연 회복력’ 연구할 때

    • “교수님 싫다”며 박대하던 기업들 변해

    • 삶의 원동력? ‘양심’에 따라 살았을 뿐

    • 과학 대중화 사명으로 유튜브 운영

    • 고령화는 재앙 아닌 기막힌 ‘혁신 상품’

    [+영상] 기후 우울증 느끼는 지금, ‘자연 회복력’ 연구해야



    인류는 끊임없는 위협에 맞서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인류는 약자였고 자연은 극복 대상이었다. 그 틀 안에서 몇 세기를 거듭해온 인류는 지금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인류와 자연은 생명 공동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행동에 나서고 있지만 희망은 요원하다.

    200여 년간 앞서나간 선진국들이 먼저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부터라도 덜 발전하고, 더 보존하는 쪽으로 나아가자며 룰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모든 기업이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제로 상태로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움직임인 ‘넷 제로(Net Zero)’가 그 일환이다. 유럽에선 넷 제로를 따르지 않는 기업에 제재를 가하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룰을 따르지 않는 자는 망할 것’이란 경고장이나 다름없다. 경고장을 받아 든 기업들은 사색이 돼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한국 기업들도 최근 몇 년 사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열을 올리며 평가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명함에는 이화여대 교수, 통섭아카데미 대표,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국회기후변화포럼 공동대표 등 4개의 직함이 새겨져 있다. 칸이 적어 채 적지 못한 직함도 여럿일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생물학자다. [박해윤 기자]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의 명함에는 이화여대 교수, 통섭아카데미 대표,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국회기후변화포럼 공동대표 등 4개의 직함이 새겨져 있다. 칸이 적어 채 적지 못한 직함도 여럿일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생물학자다. [박해윤 기자]

    사외이사가 된 생물학자

    시류에 따라 최재천(69)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를 찾는 기업이 급격히 늘었다. 최 교수는 40여 년간 동물행동을 연구해 오며 제1대 국립생태원 원장(2013~2016)을 지낸 생물학자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호소해 동강댐 건설 백지화를 이끌어내는가 하면(1999), 불법 포획돼 동물원에서 쇼를 하던 돌고래를 풀어주는 데 일조한(2013) 행동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부계혈통주의가 생물학적으로 모순임을 주장해 호주제 폐지에 기여하고, 남성 최초로 올해의 여성운동상(2004)을 받은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각종 방송 출연과 강연, 기고를 통해 자연과학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 최 교수의 삶의 궤적에는 자연과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다. 그에게서 답을 찾으려는 기업이 늘어난 이유다.

    올해 3월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가 최 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엔씨소프트는 “최재천 교수의 상징적 키워드인 ‘다양성’을 바탕으로 ESG 경영을 보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업의 의도는 짐작 가는 바였다. 반면 대기업 사외이사와 올곧은 생물학자 사이의 간극은 넓어 보였다. 불현듯 게임회사의 사외이사 자리를 받아 든 최 교수의 의중도 궁금했다.



    답을 듣고자 5월 말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로 찾아갔다. 하루 동안 내린 비로 물기를 한껏 머금은 교정에는 생의 절정을 누리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신촌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 자연과학동 건물에 그의 연구실이 있었다. 최 교수는 세상의 모든 과학책을 꽂아놓은 듯한 책장 사이에서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게임회사의 사외이사로 선임됐습니다. 이력을 돌아보면 의외의 선택인데.

    “교수가 사외이사를 하면 고운 눈으로 안 봤거든요. 거수기 노릇한다는 비판이 많았으니까…. 이전에 사외이사 제안이 들어오면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하고 거절했는데 이번엔 저도 저 자신한테 의아해요. 이유를 찾자면 그분들한테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제조회사들은 ESG를 심각하게 생각하는데, 게임회사나 IT회사들은 공장을 돌리진 않으니까 마음을 놓는 편이죠. 그들도 전력 소모가 심해서 비난에서 자유로울 순 없어요. 그분들은 저를 찾아와 굉장히 진지하게 ‘이걸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들’에는 엔씨소프트의 직원 이외 김택진 대표와 윤송이 사장이 포함돼 있다. 10여 년 전 최 교수가 엔씨소프트에 강연을 갔을 때 두 사람도 자리했다. 강의 끝에 김 대표 부부는 최 교수를 따로 보길 청했다. 사석에서 최 교수는 자신이 강연을 앞두고 리니지 게임을 처음 해본 경험, 그 과정에서 ‘던바의 수’(개인이 사회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 통용되는 값은 150)를 기준으로 분산되는 움직임을 발견한 것, 연구비를 준다면 리니지 안에서 벌어지는 개체 사회화를 연구해 볼까 싶었다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셋이서 한 시간 정도 대화한 기억이 나요. 그런 얘기들이 재미있었나 봐요. 아마 그분들이 10여 년 저를 지켜보다가 우리 사회에 ESG 논의가 심각해지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저한테 부탁한 거겠죠. 앞서 다른 제안들을 거절한 데는 거수기 논란도 있지만, 제가 ESG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지난해 공부를 좀 하다가 뭘 깨달았어요. 기업들의 웹사이트를 보니 E·S·G를 따로 분류해 놨더라고요. 가만 보니 그 셋을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개념이 ‘다양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 다양성을 훼손하지 말고 환경 개선에 힘쓰고(Environment), 사회 다양성을 존중해 환원에 힘쓰며(Society), 경영할 때는 다양한 이의 목소리를 들어라(Governance)’는 거잖아요. 다양성은 내 전공이니 그렇다면 나도 기여할 바가 있겠다 싶어 수락하게 됐습니다.”

    “노력하는 기업들, 참 기특해”

    최근 한국 기업들이 ESG 경영에 열성적인데, 평가지표에서 높은 등급을 받는 데만 급급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걸 탓할 순 없죠. 제가 국립생태원장으로 있을 때 평가를 정말 못 받았어요. ‘일터를 놀이터로!’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내가 다 책임질 테니 그저 신나게 일하라’고 주문했어요. 환경부에서 관람객을 30만 명 유치하라고 했는데 저희가 결국 100만 명을 유치했습니다. 그런데 기관평가에서 D등급을 받았어요. 알아보니 우리의 조직문화가 평가 기준에는 부합하질 않는 거였어요. 평가 점수가 모든 걸 설명해 주는 건 아니지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기업도 ESG 평가를 잘 받기 위해 무슨 노력이든 하고 있어요. 물론 일부 그린워싱(친환경 위장술)하는 기업도 있죠. 놀라운 건 거의 모든 기업이 상당히 진지하다는 겁니다. ‘아, 이게 눈가림해서 점수만 잘 받고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유의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대한민국 대부분의 기업이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최근 상당수 기업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경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환경을 파괴하고 노동을 착취하면서 발전해 온 과거의 방식으로는 장기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기 때문이다. 특히 ESG의 첫 과제인 E는 사회와 개인보다 기업이 적극 나서야 해결되는 사안이 적지 않다.

    기업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할까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제조업으로 성장해 온 나라에 앞으로 환경을 파괴하지 말고 개선하는 노력을 보이라고 하니 다들 당황해서 정신이 없는 겁니다. 기업도 잘하고 싶겠지만 이윤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길이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러면 어차피 힘든 거 조금 근원적으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어 그는 교수 시절 내내 연구비를 받고자 기관과 기업에 문을 두드린 경험을 한참 동안 들려줬다. 명성이 드높지만 그 역시 여느 교수들처럼 연구비가 부족해 내내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잊지 못할 만큼 얼굴이 화끈거리는 창피한 경험도 털어놨다.

    “10여 년 전에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기관과 기업이 돈이 될 법한 프로젝트에만 연구비를 지원해 줬죠. 교수가 자기 입으로 ‘이건 돈이 되는 연구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긴팔원숭이를 연구하면 국민소득이 올라갑니다!’라고 사기 칠 수 없겠더라고요. ‘이건 순수과학입니다. 이걸 연구한다고 국민소득이 두 배가 될 리는 없겠죠’라고 했더니 다 떨어졌어요. 한번은 한 기업인이 제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저는 교수님 같은 분이 제일 싫습니다. 기업은 열심히 일해서 나라에 세금 잘 내면 되는 겁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프리드먼주의잖아요. 그때는 모두가 그게 정답이라고 믿고 살았어요. 지금 ESG가 무너뜨리고 있는 핵심 가치가 바로 프리드먼주의입니다. 이제는 기업들이 당장의 이윤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환경문제를 함께 책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일 때예요. 그 일환으로 요즘 자연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기업이 많이 늘었어요.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망 없다는 말, 상당히 맥 빠져”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기후위기로 넘어갔다. 기후위기는 매년 심각해지고 있다. 올해 4월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가량 당겨졌고, 5월에 이미 낮 기온은 섭씨 30도를 넘겼다. 6월부터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기습 폭우도 빈번했다. 동남아와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7~8월에는 60일간 비가 내릴 것이란 근거 없는 예보도 나돈다.

    “2020년 여름철에 54일간 비가 내려 역대 최장 장마를 기록했어요. 그걸 넘을지도 모른다니 정말 걱정이네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기후가 너무 자주 벌어지고 있어요. 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 사막에 홍수가 났다는 기사를 봤어요. 제가 연구차 데스밸리를 방문했을 때 얼룩말이 됐어요. 양말을 발목까지 올라오는 걸 신고 갔다가 더워서 한 단씩 접어 내리면서 이동했거든요. 저녁에 보니 양말을 접은 한 단씩 자국이 남았더라고요. 그만큼 해가 따갑기로 유명한 곳인데 물난리가 난 걸 보니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이제는 이상기후가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인류가 손 놓고 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인류는 2016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을 맺고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환경운동을 벌여왔다. 한국만 해도 정부와 개인, 기관과 기업이 앞다퉈 친환경 캠페인을 벌이고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위기의 가속도는 줄어들지 않는 모양새다.

    “노력하는 것 같지만 전 세계가 공통으로 잘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주범은 미국인데 트럼프 같은 양반은 파리협정이 일자리를 줄인다며 2017년 탈퇴를 선언했어요. 미국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일이죠.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음식물 쓰레기를 신문지 위에 펼쳐놓은 뒤 말려서 버립니다. 그 정도로 세심하게 환경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분이 우리나라에는 많죠. 그런데 미국은 심한 말로 개판입니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 가보면 쓰레기통에 노트북부터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있습니다. 그걸 큰 트럭이 와서 분리하지 않은 채로 수거해 갑니다. 땅이 넓으니 아직은 걱정하지 않는 거죠.”

    한편으로는 노력한다고 바뀔 일인가 싶습니다. 인간이 노력해도 기후위기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으니 지구가 임계점에 도달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대대적인 어떤 정화가 있으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그 말대로라면 정화의 대상은 우리 인간이 되겠죠. 우리만 사라져주면 지구는 참 평안해질 테니까요. 간혹 제게 ‘교수님, 지구의 미래가 걱정됩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는데 속으로 ‘별말씀을요. 지구의 미래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인간의 미래가 걱정스럽죠’라고 답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이 모든 문명의 이기(利器)를 포기해도 기후위기는 수십 년간 관성에 의해 계속될 거라고 합니다. ‘가망이 없다’는 말인데 상당히 맥 빠지죠. 그게 젊은 세대에게 무기력감을 줍니다. ‘기후 우울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가 많아요.”

    그는 “세상이 이렇게 된 데는 과학자의 죄가 크다”고 말했다. 그간 과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큰일 난다’는 경고만 지속해 왔다는 것. 그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과학자들은 암울한 미래를 우려했고, 경고할 수밖에 없었어요. 겁을 주는 전략으로라도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했으니까요. 다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방법에 대한 얘기는 없었으니 무책임한 일이죠.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코로나19를 겪는 와중에 CNN에서 인도 뉴델리를 찾아가 인터뷰한 영상을 봤어요. 길거리에 바이러스에 걸려 죽은 사람들을 그대로 화장하는 장면에서 한 남자가 뜬금없이 ‘내가 뉴델리에 40년 넘게 살았는데 난생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을 봤다’며 그쪽을 가리킵니다. 공기가 맑아져서 실루엣이 명확하게 보이더라고요. 도로를 봉쇄하고 공장을 멈추니 하늘이 맑아진 거죠.”

    그러면서 그는 “이제는 자연 회복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라고 힘줘 말했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막강한 회복력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과학자들이 자연의 회복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면 인류는 희망을 논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동물들이 거리로 나왔어요. 한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던 오염 지역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더라는 뉴스도 나왔죠. 그런데 우리가 그 중간 과정은 몰라요. 코로나19 시기 3년 동안 자연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조사를 안 했어요. 과학자들이 네이처 리질리언스(Nature Resilience)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은 없는 거죠. 이걸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희망을 얘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에 관심이 많을 뿐 아니라 생각도 많은, 천생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해 간 질문의 절반도 하지 못했는데 한 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갔다. 질문 하나에 쏟아져 나오는 답변이 폭포수 같았다. 말이 길면 지루할 법한데 재치가 넘치니 모든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이야기의 끝을 궁금하게 만드는 흡인력도 상당해 한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그의 개인적 이야기가 궁금했다.

    태생적으로 오지랖이 넓었을 뿐

    최재천 교수의 연구실에는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소품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사진은 최 교수가 조류 모형의 장식품을 보며 제자에게 선물받은 사연을 들려주는 모습. [박해윤 기자]

    최재천 교수의 연구실에는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소품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사진은 최 교수가 조류 모형의 장식품을 보며 제자에게 선물받은 사연을 들려주는 모습. [박해윤 기자]

    이력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사회적으로 20년 넘게 상당히 다양한 일을 해왔는데 보통의 교수와는 다른 길입니다.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태생적으로 오지랖이 넓어요. 어려서부터 한 가지 일만 못 했죠. 그때는 결정적 약점이어서 아버지한테 매일 혼났습니다. 지금 태어났으면 보나마나 ADHD 약을 먹었을 거예요. 사형제의 맏이인데 아버지께서 산보 갈 때 동생들만 따로 데리고 갈 정도였습니다. 시장에 가면 진열된 물건을 다 섞어놓고 유리창을 손으로 더럽히니 감당이 안 됐던 거죠.”

    최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편지 형식의 글을 써 동강댐 건설을 막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4대강 사업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유림에 맞서 호주제가 생물학적으로 근거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서울대공원에 붙들려 있던 제돌이를 제주 앞바다에서 놓아준 일을 가만히 회고했다.

    “원동력이 뭘까요. 따지고 보면 ‘양심’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원래 전 용감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 아내가 절더러 비겁하다고 합니다. 고부 사이의 갈등에 나서질 않거든요. 근데 왜 이런 일에는 자꾸 나섰을까 생각하니 양심이란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속이 너무 불편했어요. 가능하면 나서지 않고 싶고, 책임지지 않고 싶어서 도망가는 사람인데 깔끔하게 도망가지는 못하고, 어느 순간 기어 나가서 한마디씩 한 거죠. 돌아보면 사람들이 다 내 뒤에 서 있어요. 그러니 어쩌나요. 끝까지 가는 수밖에.”

    그의 직함은 여러 개다. 명함에는 이화여대 교수, 통섭아카데미 대표,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국회기후변화포럼 공동대표 등 4개의 직함이 새겨져 있다. 최근 여기에 ‘파워 유튜버’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2020년 9월 오픈한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은 구독자 53만 명이 넘는 채널이다. 최 교수는 자연과 인간 생태계와 관련된 이슈를 매주 1편씩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애 낳으면 바보죠’(314만 회), ‘백두산이 폭발하면 우리나라는?’(310만 회), ‘서울대, 하버드 둘 다 졸업한 경험자가 말씀드립니다’(206만 회) 등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해 세대를 뛰어넘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과연 여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맡은 일이 많은데, 유튜브까지 운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지금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입니다. 10년 전에 제인 구달 박사의 후광을 믿고 재단을 만들었죠. 구달 박사가 있으면 만사형통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운영이 잘 안됐습니다. 기업 후원을 요청했더니 다들 각자 재단을 운영하더라고요. 재단 식구들 월급을 줘야 하는데 여력이 없었습니다. 고민하고 있으니 어떤 양반이 유튜브를 해서 재단을 운영하라더군요. 어떤 꼬마는 장난감 박스를 여는 걸 찍어 올려서 빌딩을 샀다더라고요. 급한데 못 할 게 뭐 있겠어요. 제가 일찍이 과학 대중화를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잖아요. 방송에도 나가고 강연도 하고 글도 썼는데 유튜브도 하나의 매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다.”

    1년이 넘도록 구독자가 1만 명도 모이지 않았다. 어릴 때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해 어른들에게 혼나던 그였지만 커서는 하나를 시작하면 끝을 보는 사람이 됐다. 최 교수는 “개미 연구 40년, 까치 연구 25년, 긴팔원숭이 연구 15년, 돌고래 연구는 10년째 하고 있다. 유튜브는 3년 됐는데 그냥 꾸준히 밀고 나가다 보니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성공적인 번식후기의 삶

    그를 만나기 전 자료를 찾던 중 2019년 그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것을 읽게 됐다. 당시 그는 “생물은 기본적으로 번식하러 태어난다. 번식이 끝나면 죽는 게 보통이다. 번식후기를 연장하는 영장류는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 수명이 늘어나면서 번식후기가 번식기보다 길어졌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번식후기 인생을 위해 개인 및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칠순을 앞둔 최 교수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번식후기의 삶을 사는 것 아닌가 싶었다. 이런 얘기를 들려주자 그는 “갑자기 파워 유튜버가 되는 바람에 번식후기를 아주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 됐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년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아마도 한국에서 은퇴 이후가 가장 기대되는 학자일 듯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조언한다면.

    “우리 사회가 고령화를 자꾸 재앙으로 평가하는데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기가 막힌 ‘혁신 상품’입니다. 고령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된 거죠. 딸이 낳은 아이를 할머니가 돌보기 시작하면서 딸과 사위가 집 밖으로 나가 문명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꼭 고령화를 재앙의 관점에서 보지 말자는 얘기예요. 제가 내년에 칠순인데 10년째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으로 1만5000보를 매일같이 걷습니다. 허벅지 굵기가 역대 최대예요(웃음).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졌으니 걸어야죠.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미리 준비하라’는 겁니다. 은퇴하고 사진 찍는 친구가 많은데, 50대부터 준비했다면 지금쯤 사진 개인전을 열었을지도 모르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말이죠.”



    정혜연 차장

    정혜연 차장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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