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호

많은 시네필이 최고의 로맨스 영화로 '러브레터' 꼽는 까닭

[김채희의 시네마 오디세이 – 마지막 회]

  • 김채희 영화평론가 lumiere@pusan.ac.kr

    입력2025-02-0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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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가수 이동원의 대표곡 ‘가을편지’ 가사의 일부다. 아마도 작곡가와 작사가는 편지가 고독한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릴 듯해 제목을 그렇게 붙였을 것이다. 편지는 펜을 움직여 만든 무의미한 선(線)들이 어느 순간 마음의 실체가 되는 마술이다. 하지만 1월 1일 재개봉한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나면 겨울이 가을보다 편지에 더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1월 1일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IMDB]

    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1월 1일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IMDB]

    신영복은 육필 수기 ‘엽서’에서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지만 수형인(受刑人)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덧붙이길 여름 교도소에서 살을 맞댈 때 인간은 타인을 37도의 열 덩어리로 느낀 나머지 존재 자체를 미움의 원인으로 여기지만, 겨울에는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원시적 우정이 꽃핀다고 했다.

    겨울의 환(幻), 원시적 열정이 꽃피는 계절

    우정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은 사실 차가울 수가 없다. 미움이나 분노 역시 온기에서 시작해 감당할 수 없는 열로 인해 발생한다. 사랑은 오죽할까. 온기가 그리워지는 겨울에 타인에 대한 그리움의 종착지인 원시적 열정이 눈꽃처럼 활짝 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수은주가 곤두박질칠수록 온기를 찾아 우리 몸은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그리워하고, 음주가 취미인 사람은 따끈한 정종 한 잔이 간절해진다. 이 겨울에 홀로 된 이는 새로운 사랑이 사무칠 것이며 누군가를 곁에 둔 이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고 읊조리게 된다.

    이육사 시인은 대표작 ‘절정’의 마지막 구절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노래했다. 수수께끼 같은 이 시구를 해석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앞다퉈 의견을 개진했다. 필자는 다만 시인의 노래를 부박하게 활용해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강철 같은 겨울의 위용에 대항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빨주노초파남보라는 형형색색으로 만들어진 무지개 같은 환상 아닐까. 시인은 겨울로 은유된 엄혹한 시절,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에 서서 쉽게 부스러지는 몽상이 아닌, 절대 깨지지 않는 강철로 된 무지개를 염원했다. 그래서 마음이 시린 때일수록, 추운 계절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사랑 영화를 찾는다.

    글로 쓰지 않은 ‘러브레터’

    영화 ‘러브레터’(1995)에서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는 후지이 이츠키와 약혼한 사이였지만 그는 조난 사고로 2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이츠키와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다. 히로코는 주기적으로 이츠키의 집을 방문해 망자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그와의 추억을 환기한다.

    그러던 어느 날 히로코는 이츠키의 졸업 앨범에서 그가 고베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오타루의 집 주소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편지를 보낸다. 도시계획으로 이미 옛집이 허물어져 도로가 됐다는데 묘하게도 답장이 온다. 편지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존재를 궁금하게 여긴다. 이 미스터리에는 간단한 비밀이 있다. 후지이 이츠키(藤井樹)라는 이름을 가진, 성별이 다른 학생이 같은 반에 속해 있었던 것. 히로코는 죽은 애인의 집 주소가 아닌 동명이인, 후지이 이츠키(여)의 집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 히로코와 이츠키(여)는 서로를 오해한다.

    유리공예가인 히로코의 현재 애인 아키바는 그녀가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유령 놀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급기야 히로코에게 오타루에 가보자고 제안한다. 한편 오타루에 사는 도서관 사서, 이츠키(여)는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며칠째 지독한 감기에 시달리던 중 정체불명의 편지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워한다.

    영화는 히로코가 사는 고베와 이츠키(남)의 고향이자 또 다른 이츠키(여)가 거주하는 오타루를 무대로 평행편집과 교차편집을 혼용하면서 진행된다. 편지가 오가면서 히로코는 이츠키가 동명이인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아키바의 제안을 받아들여 드디어 오타루로 향한다.

    영화 ‘러브레터’를 연출한 이와이 슌지 감독. [Gettyimage]

    영화 ‘러브레터’를 연출한 이와이 슌지 감독. [Gettyimage]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작동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자 관객이 초반에 서사를 제대로 따라가기 힘든 이유는 동명이인이라는 설정 그리고 히로코와 이츠키(여)의 외형적 비슷함 때문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이츠키(남)는 이 두 여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영화를 추동하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히로코는 숫기도 없던 이츠키가 자신에게 선뜻 용기를 내 고백한 이유가 고향에 사는 첫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이와 달리 오타루의 이츠키(여)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의 풋풋한 그 감정이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는다. 결국 한 여인은 편지 교환으로 인해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게 되고, 또 다른 여인은 현재에서 과거로 침투해 봉인된 추억을 현재 앞으로 끌고 온다.

    영화 ‘러브레터’는 중학교 시절 같은 이름을 가진 남학생과 여학생의 서사로 관객을 안내한다. [네이버 영화]

    영화 ‘러브레터’는 중학교 시절 같은 이름을 가진 남학생과 여학생의 서사로 관객을 안내한다. [네이버 영화]

    남학생 이츠키가 짝사랑한 여학생 이츠키의 모습. [IMDB]

    남학생 이츠키가 짝사랑한 여학생 이츠키의 모습. [IMDB]

    ‌이 영화의 제목은 ‘러브레터’지만 실제로 영화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도 글로 쓰인 러브레터를 보내거나 받진 않는다. 두 여인 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과거 속에 흩어져 있던 사랑의 몸짓이 사실은 온전한 ‘러브레터’였음을 증명한다. 조용하고 숫기 없는 두 이츠키는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과거의 그들은 이 감정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말과 글이 아닌 몸짓, 행동, 표정으로 어슴푸레한 감정을 표현한다. 소녀는 이츠키가 전학을 가자 반 친구들이 장난 삼아 그의 책상에 조화를 꽂은 꽃병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깨뜨리는 것으로 서운함을 표출한다. 그런가 하면 뒤바뀐 시험지를 교환하기 위해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기도 한다. 소년 이츠키는 조금 더 내밀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는 도서 대출 카드에 자신의 이름이자 사랑하는 소녀의 이름을 기입한다.

    이 비밀스러운 의식의 진의를 소녀가 알아채지 못하자 그는 마지막 모험을 시도한다. 이츠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출하면서 독서 카드 뒷면에 소녀의 모습을 정성스레 스케치한다. 하지만 늦된 소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고향의 소녀에 대한 연정은 고베로 이사한 후, 소녀와 꼭 닮은 히로코를 보며 다시 꽃핀다. 하지만 히로코는 이 사실도 모른 채 이츠키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미 ‘러브레터’를 본 관객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손꼽으라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히로코가 죽은 듯이 누워 있다가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리면서 새하얀 설원을 내려가는 오프닝이나 애인이 조난을 당한 먼 산을 향해 히로코가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라고 일본어로 소리치던 종반부 장면을 떠올린다. 이 두 장면은 거의 수미상관처럼 기능하면서 영화의 감동을 더하지만, 서사적으로는 히로코와 이츠키(여)의 스치듯 조우하는 장면이 훨씬 더 의미를 지닌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강렬한 여운을 남긴 장면.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약혼자 이츠키가 조난당한 설원을 향해 일본어로 “잘 지내시나요?”라고 울부짖듯 외치고 있다. [IMDB]

    영화 ‘러브레터’에서 강렬한 여운을 남긴 장면. 여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가 약혼자 이츠키가 조난당한 설원을 향해 일본어로 “잘 지내시나요?”라고 울부짖듯 외치고 있다. [IMDB]

    ‌히로코는 아키바와 함께 편지의 주소를 어렵사리 찾아가지만 이츠키는 부재중이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던 중 기사는 방금 내린 여자 손님과 히로코가 너무 닮았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이 말은 복선이 된다. 두 사람은 오타루에 사는 아키바의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시내로 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히로코와 이츠키(여)는 운명처럼 우연히 조우한다. 자전거를 탄 채 스치듯 지나가는 도플갱어처럼 닮은 이츠키를 보면서 히로코는 그녀가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이츠키는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이 환상 같은 장면은 히로코와 이츠키(여) 사이에 인연의 붉은 실이 단단히 연결돼 있음을 표현하며 동시에 죽은 이츠키(남)에게 두 여인은 분리(dividual)될 수 없는 존재(individual)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두 이츠키 그리고 이츠키(여)와 히로코라는 ‘분리될 수 없는 개별적 존재들(individuals)’의 식별 불가능성을 드라마로 구현한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들은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으며, 둘은 둘이면서 또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계관에서 존재를 구현하는 존재자들(이츠키(여), 히로코) 사이에 위계는 없다.

    푸른 산호초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로 유명한 니가타와 더불어 이전에는 삿포로가 눈의 고장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러브레터’가 개봉한 이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위에 거론한 두 도시 외에도 오타루를 눈의 명소로 떠올린다. 그런데 영화의 주요 무대인 오타루와 히로코가 사는 고베는 무려 1500km 가까이 떨어져 있다. 이 거리감은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거리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푸른 산호초’(1980년 일본 가수 마쓰다 세이코가 발표한 노래)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산장 주인과 아키바는 부지불식간에 ‘푸른 산호초’를 흥얼거리고 이를 지켜보던 히로코는 그 이유를 묻는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은 조난을 당해 절벽 아래에 홀로 남겨진 상태에서도 이츠키가 ‘푸른 산호초’를 불렀다고 답한다.

    ‘러브레터’는 이츠키(남)의 사고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산행에 동반했던 동료들이 망자에게 상당한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조난당한 이츠키에게 그들이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데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의 기일에 나타날 자격이 없다고 여겨 아무도 없는 야밤을 틈타 묘지를 방문하려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무의식적으로 ‘푸른 산호초’를 흥얼거린다. 그러므로 ‘푸른 산호초’는 이츠키를 위한 레퀴엠인 셈이다.

    그런데 ‘푸른 산호초’의 가사는 이츠키(남)의 입장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동료들은 평상시에 이츠키가 ‘푸른 산호초’를 부른 가수 마쓰다 세이코를 싫어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싫어했다던 가수의 노래를 마지막 순간에 불렀을까. 해답은 ‘푸른 산호초’의 가사에 있다. 히로코는 이츠키(여)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갖게 된 심증과 노래 가사를 토대로 어떤 확신에 다다른다.

    “아아, 내 사랑은 남쪽의 바람을 타고 달려가네…아아, 푸른 바람을 가르며 그 섬으로”

    오타루를 떠나 고베로 이사 온 이후에도 이츠키(남)는 고향에 있는 동명이인 이츠키(여)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남쪽(고베)에서 부는 푸른 바람을 타고 그 섬(오타루)으로”라고 해석될 수 있는 노래 가사를 죽음의 순간에 부른 것이다.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시간은 우리 기억에 이미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수의근(不隨意筋)처럼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소환할 수 없지만,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물건이나 사건이 계기가 돼 잃었던 기억을 되살리면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불수의근을 작동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엇이 필요하다. 독서 대출 카드, 연필 초상화, 학교 교정, 예전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츠키(여)가 과거 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문지방(threshold) 역할을 한다. 잃어버린 시간 혹은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베르그송이 재인(再認·reconnaissance)이라 한 이 능력은 생의 필수 조건이며 한편으로는 지평선 밖으로 사라져 버린 또 다른 시간을 소환하는 토대가 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과거와 현재의 동시적 공존으로 불리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표현대로 시간 이미지 자체인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걱정 말아요, 그대!

    ‘러브레터’는 보는 행위와 동시에 스토리를 재구성하기 꽤 까다로운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대할 때면 전문가 집단 역시 디제시스(diegesis)라고 하는 예술적 시·공간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 그리고 디제시스에서 빠져나올 때쯤 분석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모든 내공을 동원해 미적 요소를 분석한다. 나는 영화를 본격적 업으로 삼으면서 ‘러브레터’를 좋아하는 수많은 시네필을 만났고, 그들은 대부분 ‘러브레터’를 최고의 로맨스 영화라고 추켜세웠다.

    그런데 정작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토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을 분초 단위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파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잠복 중이며 그들끼리 내밀한 작업을 펼친다. 우리가 잊고 있던 장면이나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미지를 모아 영화는 형식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각한 영화 속 스토리는 작품의 하부 구조로 변형되기에 굳이 이를 소환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영화 속에서 이츠키(여)의 사서 동료는 고베에서 온 이상한 편지 한 구절, “여기에는 벌써 벚꽃이 피려고 한답니다”라는 문장에 주목하면서 송신자를 살인마나 변태라고 추측한다. 사서 동료와 이츠키(여)는 벚꽃과 히로코를 연관 지으면서 가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의 ‘벚꽃나무 아래엔(櫻の樹の下には)’과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라는 작품을 동시에 떠올린다. 이 두 소설은 일본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유미주의 작품이다. ‘활짝 핀 벚꽃나무 숲 아래’를 집필한 작가 사카구치 안고는 형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작품 속에서 말한 바 있다.


    “개별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는 불완전하고도 불가사의한 단편들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형식을 완성시킨다. 그런데 그 형식을 분해하면 미는 무의미한 단편으로 돌아간다.”

    죽음(살인과 시체)과 벚꽃의 대비되는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표출한 선배 유미주의자의 길을 따라 이와이 슌지 역시 죽음, 추억, 환상, 도플갱어를 뒤섞는다. 그리고 여기에 한번 들으면 도저히 잊히지 않는 레미디오스의 음악과 등장인물들이 흥얼거리던 ‘푸른 산호초’를 덧칠해 강철 무지개와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것들을 분해하면 지극히 평범한 클리셰가 된다. ‘러브레터’는 이 하찮고 쓸데없는 것들을 한데 묶어 특별한 디제시스에 가둔다. 분해됐다고 생각된 것들은 우리 무의식에 침잠하고 있다. 특별한 순간을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러브레터’와 같은 예술 작품을 통해 언제 어느 때라도 과거를 소환할 수 있다. 그러니 ‘러브레터’를 인생 영화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두 장면밖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지어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나는 한두 장면 안에 송두리째 숨겨져 있다. 벚꽃나무 아래에 시체가 숨겨져 있듯이….

    ‘러브레터’에서 1인 2역을 연기한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그녀는 2024년 12월 6일 사망해 많은 영화 팬을 안타깝게 했다. [뉴시스]

    ‘러브레터’에서 1인 2역을 연기한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그녀는 2024년 12월 6일 사망해 많은 영화 팬을 안타깝게 했다. [뉴시스]

    추신: 글을 쓰는 중에 ‘러브레터’에서 히로코와 이츠키(여) 일인이역을 맡은 배우 나카야마 미호의 사망 소식이 운명처럼 들려왔다. 수없이 패러디되던 그녀의 유명한 대사, “오겡키데스카, 와타시와겡키데스(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그녀는) 정말 잘 지내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진 위대한 힘이 아닐까?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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