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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노믹스 탐구] “늘 ‘나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라 말해”

파괴적 혁신 ‘김종인노믹스’ 탐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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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06-2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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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인이 소개한 책 ‘The Narrow Corridor’

    • 金 “인간 본성인 탐욕이 커지면 사회가 깨진다”

    • 金 “그놈의 낙수효과는 옛날 얘기다”

    • “김종인 철저히 보수, 자본주의 지키려 복지해야 한단 것”

    • “나라 정상화하려 해…결코 체제의 판 흔들지 않아”

    • “확장 재정? 퍼주기식 재정 지출 외려 반대”

    • “색채 다른 경제혁신위? 김종인은 윤희숙 괜찮다고 해”

    3월 14일 서울 종로구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종인 당시 대한발전전략연 이사장. 그의 오른쪽에 놓여 있는 책이 ‘The Narrow Corridor: States, Societies, and the Fate of Liberty’이다. [조영철 기자]

    3월 14일 서울 종로구 대한발전전략연구원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종인 당시 대한발전전략연 이사장. 그의 오른쪽에 놓여 있는 책이 ‘The Narrow Corridor: States, Societies, and the Fate of Liberty’이다. [조영철 기자]

    3월 14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김종인 이사장(당시 직함·이하 존칭 생략)은 홀로 있었다. 그와는 한 달여 사이에 두 번째 만남. 바깥세상은 그가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느냐 마느냐로 시끄러웠다. 자연히 각종 정치 현안이 대화 테이블에 올랐다. 말머리를 경제로 돌리자 김종인은 “최근 나온 책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 한 권을 가져왔다. 기자를 만나기 직전까지 읽고 있던 것으로 보였다. 제목은 ‘The Narrow Corridor: States, Societies, and the Fate of Liberty’. 번역하자면 ‘좁은 통로: 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 쯤 된다. 김종인이 책을 손에 쥔 채 말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국민 통합을 이루려면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한다는 거다. 사회는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탐욕이 커지면 사회가 깨진다. 시장경제 효율을 최대한 존중하되, 시장이 해결 못하는 최소한의 간섭은 정부가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놈의 낙수효과는 옛날 얘기지, 지금은 별로 없다”고도 했다.

    “김종인의 머릿속에는 다 있다”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A. 로빈슨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쓴 ‘The Narrow Corridor’(‘좁은 통로’).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A. 로빈슨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쓴 ‘The Narrow Corridor’(‘좁은 통로’).

    김종인과 오랫동안 교유해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김종인의 머릿속에는 다 있다.” 통합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김종인은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때도 어떤 주제에 관해 누가 이야기를 하면 쭉 듣는다. 그러다 마지막에 특정 정책을 말하면서 ‘이런 거 한번 해보는 건 어때?’라고 툭 던진다. 이미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다는 뜻”이라고 했다. 

    제1야당 혁신의 키를 쥔 그의 머릿속을 탐구하기 위해 많은 언론이 그가 읽고 있는 책에 주목했다. 김종인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저서 ‘혁명’을 읽는다는 사실이 보도된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좁은 통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진 적이 없다. 



    ‘좁은 통로’는 대런 애스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와 제임스 A. 로빈슨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가 쓴 책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 경제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지난해 ‘올해의 경제서 10권’ 중 하나로 이 책을 꼽았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책에는 ‘The shackled Leviathan(견제된 리바이어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토머스 홉스는 1651년 ‘리바이어던’을 쓰고 만인의 투쟁이 난무하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은 국가에 자연권의 일부를 위탁해야 한다고 했다. 대신 국가는 성서에 나오는 바다괴물 리바이어던처럼 강력한 힘을 갖고 국민을 지킨다. 그것이 사회계약이다. 리바이어던의 힘이 너무 커지면 개인은 쪼그라든다. 리바이어던이 사라지면 사회는 극심한 무질서에 빠질 수 있다. 둘 다 디스토피아다. 자유와 번영을 이룬 국가는 국가와 사회 간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좁은 통로를 찾아냈다는 게 책의 골자다. 

    김종인은 왜 이 책을 읽었을까. ‘좁은 통로’를 면밀히 읽은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에게 자문(諮問)했다. 

    “저자들은 ‘좁은 통로’와 대비해 폰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언급한다. 하이에크는 리바이어던을 극단적으로 경계했다. 사회복지제도가 구축돼 행정국가가 커지면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지리라 우려했다. 하지만 서구 역사를 보면 복지제도를 도입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는 더 확장해 갔다. 즉 ‘견제된 리바이어던’은 하이에크가 경계한 것과 달리 ‘노예의 길’로 빠지지 않고 국가와 시민사회가 균형을 이루는 ‘좁은 통로’로 진화하는 사회다.” 

    경제정책만을 놓고 거칠게 단순화하면, 진보는 국가의 확장에 기대고 보수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에 의지한다. 하이에크는 후자에 무게중심을 실었다. 김종인은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를 경계한다. 그렇다고 전자에 오롯이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런 그가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강조한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의 논지에 공감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민주당 비대위 대표로 있을 때도 여러 정치인에게 저자들의 전작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어볼 것을 권하곤 했다.

    “복지는 자본주의 지키기 위한 것”

    이선화 연구위원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논지를 고려하면, 나는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을 매개하는 역할은 정치제도에 있다고 해석했다”면서 “지금의 한국 사회는 경제 발전을 넘어 포용적 경제제도를 만들 수 있는 정치 제도를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포용적 성장은 김종인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는 민주당 비대위 시절인 2016년 6월 21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포용적 성장은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했다. 즉 김종인은 정치를 통해 국가가 전제주의로 흐를 위험과 시민사회가 무질서 상태로 질주할 우려를 동시에 차단하려 한다. 

    자, 김종인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혹은 필요에 따라 변신하는 카멜레온인가. 누군가의 말마따나 통합당을 ‘유사 정의당’으로 만들려는 사람인가. 대외에 알려지지 않은 김종인의 최측근 A씨는 “김종인은 철저히 보수”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김종인과 정치·경제 등 여러 현안에 대해 자주 대화하는 사이다. A씨의 말이다. 

    “김종인은 복지보다 사회안전망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사회의료보험과 연금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자본가들이 반대했다. 비스마르크가 ‘지금 협조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기업가들을 보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했다. 김종인이 자주 인용하는 사례다. 즉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선제 대응하는 형태로 복지를 해야 한다는 거다. 김종인은 항상 ‘나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를 굳건히 지키려고 이걸 하는 거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다. 그게 김종인이 가진 복지에 대한 시각이다.” 

    통합당 핵심 관계자는 “이번에야말로 나라를 정상화해야겠다는 게 김종인의 생각”이라면서 “김종인은 결코 체제의 판을 흔들지 않는다. 분명한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이력에서 주목할 만한 게 있다. 김종인은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1970년 후반 자신이 박정희 정부에 근로자 사회의료보험과 근로자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 도입을 제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재형저축은 근로자 저축에 정부가 이자를 더 얹고 세금 혜택도 주는 제도다. 근로자의 자산 형성 의욕을 고취해 중산층을 늘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김종인의 최측근 A씨가 설명했다. 

    “김종인이 재형저축을 만들 때 가진 마인드는 근로자를 일종의 자본가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산이 있어야 중산층에 편입되고, 그럼으로써 사회가 안정적으로 굴러간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좌파적 관점과는 다르다.” 

    ‘체제를 지키기 위해’ 비대위원장 김종인은 연일 주목도가 높은 경제·복지 이슈를 쏟아냈다. 기본소득, 전일제 보육, 데이터청 설립이 만 80세 노정객의 입에서 나왔다. 하태경 통합당 의원은 6월 9일 페이스북에 “김종인 위원장은 우리 당에서 생물학적 나이가 가장 많지만 그 생각은 가장 젊다”고 했다. 

    김종인에게 ‘젊은 생각’은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정책을 구상하고, 이를 자신의 메시지로 구현해 내는 것이다. 세간에는 김종인이 청년정치를 주창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는 기자에게 “청년을 무조건 선호하는 것도 잘못”이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코로나가 방만 재정 손볼 기회”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 네 번째)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6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데이터청 전문가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 네 번째)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6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데이터청 전문가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회 가서 보니까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똑같더라. 청년 세대가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게 우리 정치에 최선의 길인 건 맞다. 그런데 새로운 걸 창조할 생각은 안 하고, 큰 당에 들어가서 국회의원 한번 해볼까 하는 사람밖에 없다. 육신이 아니라 사고방식이 젊어야 한다.” 

    김종인의 파격적 이슈몰이를 두고 제기되는 흔한 논쟁거리는 재정이다. 그가 돈 쓸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거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은 6월 8일 페이스북에 “기본소득제가 실시되려면 세금이 파격적으로 인상되는 것을 국민이 수용해야 되고 지금의 복지체계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고 썼다. 

    김종인의 최측근 A씨는 “김종인은 퍼주기식으로 재정 쓰는 걸 외려 반대하는데, 사람들이 흔히 확장 재정주의자로 오해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김종인은 우리나라가 재정을 굉장히 방만하고 누더기식으로 운영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사태가 방만한 재정 운용을 손볼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는 인식을 갖고 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국가채무 비율이 낮은 게 아니고, 또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재정 확장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김종인은 기자에게 “복지정책은 그간 정부마다 추진한 게 있다. 지금은 어떻게 효율적으로 개편할 수 있느냐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재정 운용의 효율성을 가장 중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6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원장·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도 “막대한 정부 예산이 코로나19를 계기로 투입되고 있는데 금융에 의존하는 경제정책은 한계가 있다”면서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50% 선이면 국제사회 신인도가 추락하고 국가신용등급 하락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과 색채가 다른 학자 위주로 경제혁신위원회를 꾸린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6월 11일 출범한 통합당 비대위 산하 경제혁신위는 KDI(한국개발연구원) 재정복지정책연구부장 출신인 윤희숙 의원(서울 서초갑)이 위원장을 맡았다. 윤창현 의원(비례대표),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 미국식 주류 경제학 색채가 짙은 인물들이 대거 혁신위에 입성했다. 

    통합당 핵심 관계자는 “혁신위는 윤희숙 의원이 총괄해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김종인은 비대위 출범 전에도 윤 의원이 괜찮다고 말했다. 위원장을 믿으면 그 사람을 통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실용주의다. 또 그간 당의 주류로 자리매김해 온 경제철학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인은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생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김종인은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 서문에 비스마르크의 말을 빌려 이렇게 썼다. 

    “인생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신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적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그는 박근혜·문재인 정권의 산파역을 맡고도 권부의 핵심에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러다 전례 없이 쪼그라든 제1야당의 선장으로 돌아왔다. 경세가(經世家) 김종인의 인생에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6월 2일 “우리 정치가 파괴적 혁신을 이루지 않으면 나라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혁신의 골자는 결국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일 테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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