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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⑯] 유럽통합의 상징,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구텐베르크와 괴테, ‘마지막 수업’의 도시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유럽역사기행⑯] 유럽통합의 상징,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 ●로마시대부터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알자스 대운하로 상공업 번영, 자유를 향한 갈망
    ●루터의 독일어 성경 인쇄한 구텐베르크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기구한 운명
    ●유럽의회, 유럽인권재판소…새 역사 출발지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 구시가지. [GettyImage]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스트라스부르 구시가지. [GettyImage]

국립행정학교(ENA)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정치가가 이 학교 출신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명문 학교가 위치한 곳이 바로 스트라스부르다. 

일반인에게 더욱 잘 알려진 이 도시의 명소들도 있다. 스트라스부르는 브뤼셀과 더불어 유럽연합의 중심지여서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와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등이 눈길을 끈다. 이 기관들은 유럽통합의 상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지향하는 현대 유럽의 소망을 상징하는 도시가 바로 스트라스부르이다.


국제적인 교통 요충지

처음부터 이 도시는 국제적인 교통의 요지였다. 인구는 고작 27만6170명(2014)이지만 이곳을 독일어로는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라고 한다. 로마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스트라스(stras)’는 큰길이란 뜻이요, ‘부르(bourg)’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리킨다. 즉 큰길에 위치한 성곽도시였다. 

일찍부터 수상 교통도 발달해 알자스 대운하가 뚫렸다. 대운하는 이 도시를 라인강뿐 아니라 론강 및 마른강과도 이어줬다. 그리하여 중세에는 상업과 수공업이 크게 번영을 누렸다. 스트라스부르는 부유한 도시였다. 

수년 전 대운하 근처 어느 식당에서 나는 옛 친구 피에르를 만났다. 우리는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케이크의 일종인 팡 데피스를 맛보았다. 밀가루와 꿀은 기본이요, 각종 향신료를 풍부하게 첨가해 만든 것이다. 특히 육계나무 껍질에서 얻은 시나몬향과 육두구향을 첨가한 것이 내게는 최상이었다. 



피에르는 먼 옛날 내가 독일에 살 때 사귄 친구다. 그와 나는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가며 알자스를 지배한 과거 속으로 빠져들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과 프랑스가 처음 충돌한 것은 842년이었다. 그때 ‘스트라스부르 서약’이란 문서가 작성됐다. 역사상 프랑스어로 쓴 최초의 공식 문서였다. 이 문서는 라틴어에서 프랑스어가 갈라진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서 언어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문서 주인공은 양국의 왕이었다. 루드비히왕은 라인강 동쪽을 다스리던 독일 왕이요, 프랑스의 군주는 샤를이었다. 문서를 통해 두 왕은 평화 공존을 약속했다. 이후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로 확인됐다(855). 

그러나 스트라스부르 사람들은 자유를 원했다. 1201년 그들은 자유도시로 인정받아 왕과 영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그 후 이 도시에서 문화가 꽃피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딕 양식으로 지은 노트르담대성당이다.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과 같은 이름이다. 대성당은 13∼16세기에 축조됐는데,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돼 있다. 특히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첨탑도 무려 142m 높이를 자랑한다.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 건물을 가리켜,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경이”라며 경탄했다. 

중세 말부터는 이곳에서 미술도 발전했다. 이름난 화가가 여럿 배출됐는데 마르틴 숀가우어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판화 작가이자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독일 최고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도 청년 시절에 이 유명한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했다(1492). 하지만 그때 숀가우어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됐다. 

스트라스부르는 중세부터 문학의 중심지로도 호평받았고, 출판업의 전통도 깊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금속활자로 이름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도 이곳으로 이주했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인쇄했다. 

문화도시 스트라스부르, 그 활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근대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젊은 시절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로앙 가문과 추기경의 저택

로앙 가문은 프랑스 국왕을 대리해 스트라스부르를 통치했다. ‘로앙 추기경의 저택’.

로앙 가문은 프랑스 국왕을 대리해 스트라스부르를 통치했다. ‘로앙 추기경의 저택’.

17세기 후반 프랑스는 전성기를 맞았다. 마침 독일에서 30년전쟁(1618∼1648년 독일에서 벌어진 신교와 구교 간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가 개입해 전승국이 됐다. 결국 알자스와 로렌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때 알자스의 중심도시 스트라스부르도 프랑스 영토가 됐다. 1681년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서의 일이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수백km 떨어진 이 변방 도시를 프랑스 국왕이 시시콜콜 간섭하기는 어려웠다. 왕을 대리해 이곳을 통치할 가문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은 것이 로앙 가문이었다. 스트라스부르에는 이 가문의 위세와 영광을 증명하는 ‘추기경의 저택(Palais de Rohan)’이 아직 남아 있다. 

18세기 스트라스부르의 주교 자리는 로앙 가문 차지였다. 그 집안이 배출한 최초의 주교는 아르망 가스통 막시밀리앙 드 로앙이었다. 그가 저택 건축에 착수했다. 설계자는 로베르 드 코트라는 건축가였다. 

이 집안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루이 르네 에두아르 드 로앙 추기경이었다. 1779년 그는 주교에 임명됐는데, 생애 대부분을 베르사유의 왕궁에서 보냈다. 루이 16세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불운이 찾아왔다. 1786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연관된 스캔들에 휩쓸린 것이다. 왕의 총애를 잃은 그는 쓸쓸히 고향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왔다. 

피에르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추기경의 저택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유럽식 김치인 슈크루트를 시켰다. 알자스 향토음식이다.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킨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소시지와 햄, 베이컨 및 감자를 곁들여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식사 후 우리는 추기경의 저택을 자세히 살펴봤다. 저택은 세 개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하나는 추기경의 저택 형태를 그대로 되살린 장식예술박물관이었다. 또 하나는 알자스 각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한데 모은 고고학 박물관이었다. 미술관도 있었다. 누구나 이름을 잘 아는 보티첼리, 루벤스, 렘브란트, 반다이크, 엘 그레코, 고야, 와토, 르누아르, 모네의 작품 등이 소장돼 있었다. 눈이 호사를 누렸다.


애국심 일깨운 알퐁스 도데,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운명은 기구했다. 19세기 후반, 근대화에 성공한 프로이센(독일)이 팽창 전략을 펼쳐 옛 땅을 회복했다(1870).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추진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통일을 방해했다. 1870년 7월 19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고 무력으로 프로이센과 충돌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훨씬 강했다. 그해 9월 말 스트라스부르는 독일에 항복했다. 이 전쟁에서 완패한 프랑스는 이듬해 전쟁 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지불했고, 알자스와 로렌의 대부분도 독일에 반환했다. 루이 14세에게 이곳을 빼앗긴 지 약 200년 만의 일이었다. 

그 무렵 알자스의 민심은 어땠을까. 프랑스 애국시민의 입장에서 쓴 문학작품 하나가 있다.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이다. 알퐁스 도데는 1871년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 국토 상실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다뤘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프란츠라는 소년이 주인공이다. 그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 어느 날 교실 분위기가 유달리 엄숙했다. 아멜 선생님이 정장 차림으로 교단에 섰고, 마을 사람들까지도 교실 뒤편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학교에서도 모든 과목을 독일어로 가르치게 됐다. 선생님은 “우리가 국어를 지킨다면 감옥에 갇힌 죄수가 스스로를 구원할 열쇠를 가진 셈”이라고 강조했다. 마침내 시계가 12시를 알리고, 독일 병사가 수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는 글씨를 썼다. 

이 작품으로 인해 많은 프랑스인이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스트라스부르 시민들의 모국어는 독일어였다. 그들은 심한 사투리를 사용했고,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도데의 소설이 묘사한 애국심은 과장된 것이었다.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의 흔적

1567년 자유와 번영의 이 도시에 스트라스부르대가 설립됐다. 이 대학 교수 중에는 후세에 큰 이름을 남긴 학자도 많다. 그중 나는 독일인 게오르크 짐멜(1858~1918)에 주목했다. 

그는 ‘돈의 철학’을 비롯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스트라스부르대에 머문 기간은 짧았다. 1914년부터 겨우 4년이었다. 짐멜의 학문적 화두는 개인적 자유와 소유의 관계였다. 도대체 소유란 무엇인가. 그는 소유를 통해 개인적 자유가 확대된다고 인식했다. 소유란 곧 사물에 자아를 각인하는 것으로, 그로써 인격이 확장한다고 봤다. 소유를 통해 자유가 확대된다니 과연 무슨 말일까. 그의 생각을 조금만 더 파고들어 보자. 

돈이란 무엇인가. 돈의 기능 곧 그 가치를 따져보자. 세상에는 돈이 존재함으로써 거래가 편리해진다. 모든 사물의 가치도 안정성을 얻는다. 또 돈이 있어 가치의 전환이 가능하다. 돈을 통해 소유물의 축적이 어느 정도인지 보편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느 사회든지 경제가 발전할수록 돈의 기능은 더욱 확대되기 마련이다. 과거에는 돈으로 살 수 없었던 많은 물건과 기회를 우리는 돈으로 교환할 수 있다. 

21세기 시민들에게 짐멜의 주장은 그저 그런 주장일 수도 있다. 우리는 돈의 효용성이 극대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멜의 시대에는 달랐다. 그때는 돈의 기능에 대한 이해가 극히 제한된 범위에 머물렀다. 변화하는 인류 사회의 미래를 예감하며, 짐멜은 새 시대의 총아인 돈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피에르와 함께 스트라스부르대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짐멜에 관한 생각을 주고받았다. 우리들 나름의 기념식이라고나 할까. 그러고는 이 고장의 풍미가 깃든 살라미를 먹었다. 이것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만든 소시지다. 저온에서 서서히 건조한 덕분에 보존기간이 무려 2년쯤 된다. 프랑스 사람들이 이 소시지를 특히 좋아하는데, 우리는 브레첼(독일 남부가 원산지인 하트 모양의 빵)과 함께 먹었다. 알자스는 프랑스 영토로 편입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브레첼의 인기가 대단하다. 국경은 바꿀 수 있어도 사람들의 문화는 잘 바뀌지 않는다.


인권, 민주주의, 유럽통합을 향하여

유럽의회 건물 전경.

유럽의회 건물 전경.

다행인 것은 스트라스부르의 역사가 비극으로 치닫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후 프랑스와 독일은 공동의 이해를 증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스트라스부르를 새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었다. 유럽의회가 이곳에 설치된 배경이다. 

유럽연합은 현재 28개 회원국(2019)을 거느린다. 무려 5억1260만(2018년 기준) 명이 회원국에 속한다. 그들이 직접선거를 통해 유럽의회 의원을 뽑는다. 이 의회가 창설된 것은 1962년이었다. 처음에는 회원국마다 국회의원 일부를 파견했다. 그러다 1979년부터 직선제로 전환해 5년마다 의원을 선출한다. 

의석은 인구수에 따라 나라마다 다르다. 그런데 일단 유럽의회에 들어오면 의원들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념에 부합하는 여러 회원국 정당들과 연합해 활동한다. 현재 유럽의회에는 극우파부터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원들이 있다. 그런데 의원의 보수는 자국 국회의원과 동일하게 지급한다. 회기는 한 달에 5일간 정기회의가 있다. 8월은 여름철이라서 한 달간 휴회한다. 

요 몇 해 사이 의회에 극우파 비중이 높아졌다. 국익을 절대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경향도 보인다. 일례로 녹색당의 약진이 인상적이다. 최근의 선거(2019년 5월)에서 독일 녹색당은 20.5%라는 사상 초유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독일 집권여당인 기독민주연합보다 많은 득표였다. 기후 위기의 시대가 왔다는 시민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읽힌다. 

유럽의회 권한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유럽연합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 위원장의 선출권을 의회가 가진다. 의회는 집행위원회에 대한 불신임권도 행사할 수 있다. 아울러 예산동의권과 신규 가입국에 대한 비준권도 유럽의회에 있다. 의회가 점차 기능을 확대함에 따라 스트라스부르의 정치적 위상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에르와 나는 유럽의회 근처의 빵집에서 투르트(tourte)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돼지고기를 넣어 구운 파이다. 파이 안쪽에는 여러 채소와 다진 고기가 들어있다. 오븐에 구워낸 것이라 마치 비스킷처럼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웠다. 

우리는 스트라스부르에 위치한 유럽인권재판소에 대해서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이 재판소의 모태는 1949년 설립된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였다. 그들은 이 재판소를 통해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널리 구현하려고 했다. 회원국 모두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따르고, 높은 수준의 법치주의를 구현하도록 도우려는 것이었다. 오랜 노력 끝에 결국 1959년에 유럽인권재판소가 설립됐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인권위원회와 회원국은 물론이고, 그에 속한 모든 개인과 단체들이 법률적으로 억울한 경우에 제소할 수 있다. 이 재판소의 판결은 법적으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다. 이 때문에 재판을 신청하는 이가 해마다 늘어나 최근에는 매년 1500여 건이 처리되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라는 국제기구가 있다. 1949년 5월에 설립된 것이다. 유럽 각국 정부들이 협력을 도모하는 기구로 정치 문제를 포함해 사회, 문화 및 법적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 역시 유럽의 통합을 좀 더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다. 

피에르와 나는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구도심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대운하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스트라스부르의 전통요리 푸아그라를 시켰다. 이것은 18세기부터 시민의 사랑을 받은 거위고기 요리다. 거위고기는 본래 유대인들이 애호했다.


1, 2차 세계대전의 교훈

드디어 스트라스부르를 떠날 때가 왔다. 한 마디 소감을 간단히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유럽통합에는 많은 장애 요인이 있다. 인권만 해도 동유럽과 서유럽에는 큰 차이가 있다. 회원국들의 경제적 격차도 크다. 남유럽은 여러 모로 서유럽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서유럽 내분도 심각하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여론의 주목을 받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문제만 해도 회원국 간의 엇갈린 이해 조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희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스트라스부르의 역사를 돌이켜보라. 시민들은 프랑스와 독일 틈바구니에서 여러 차례 고통을 겪었으나, 결국 유럽통합 기수로 새 출발하지 않았는가. 유럽 사회는 결코 미래의 꿈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주 무대가 유럽이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비극에서 탈출하려는 야무진 시도가 바로 유럽통합이다.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이란 목표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유럽인들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 같다. 국토 분단과 이웃 나라 일본과의 해묵은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공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은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신동아 2020년 7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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