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이후 2004년 6월까지 11년간 12명의 당대표와 22명의 대변인을 ‘모셨고’, 당 입장을 대변하거나 출입기자들의 취재를 지원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 보좌한 첫 대변인이 강재섭 현 한나라당 대표다.
차관급인 국회도서관장에 올랐던 그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초대 청와대 ‘춘추관장’(1급)을 맡아 다시 출입기자들에 대한 보도지원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강현석 고양시장은 당 사무처 공채 동기이고, 고경화 의원은 한 기수 후배다.
꼼꼼하고 소탈한 성품을 바탕으로 당과 언론계에서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자기 정치’는 할 줄 모른다는 평. 2004년 4·15총선을 앞두고 사무처 선임 케이스로 당선 가능권의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받을 것이 유력시됐으나, 탄핵역풍 속에 당 대표와 공천심사위원들이 바뀌면서 당선 가능성과 거리가 먼 32번을 받는 바람에 금배지 진출이 좌절된 일이 있다.
국회도서관장을 맡고 있던 2006년도는 ‘입법정보제공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주제로 40여 국이 참가한 ‘세계 의회도서관총회’를 개최했다.
2007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준비 캠프였던 ‘안국포럼’에 참여해 공보특보로 활약했다. 하루에 휴대전화 배터리를 서너 번씩이나 갈아 끼울 정도로 기자들과 끊임없이 전화통화를 하는 바람에 한때 왼손에 마비증세가 오기도 했다. 선거대책위원회에서 ‘BBK사건’ 등 네거티브 공격에 대한 반박 보도자료를 만들고 언론사 인터뷰 상황을 점검했다.
이 대통령도 당시 밤 11시30분에서 자정 사이에 배 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의 공보상황을 점검하고 이튿날 언급할 내용 등을 논의하곤 했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당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대변인실 행정실장으로 일하던 그의 전문성과 성실성을 눈여겨보고는 그를 이 대통령의 경선 캠프에 추천했다.
당시 배 관장이 “건강이 좋지 않아 치료받는 중”이라고 고사하자, 이 대통령은 “치료는 일하면서도 할 수 있고, 필요하면 의사를 사무실로 불러 치료받게 해주겠다”며 캠프에 합류시켰다는 후문이다.
대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분과 상근자문위원으로 일하던 배 관장은 한때 18대 총선 출마에 뜻을 두었지만, 당선인 신분이던 이 대통령이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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