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보안사의 일상적 폭력 행사는 가능하지 않았다
‘영화 1987’ 6월항쟁을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묘사
1980년대 중반 일부 급진 이념 학생운동권의 대학 장악은 사실
1987년 한국 사회는 갈등과 타협 공존하며 발전하는 과정
‘영화 1987’에서 치안본부 대공처장으로 열연한 배우 김윤식은 악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CJ ENM 제공]
나는 1987년 6월 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나는 영화가 그리는 모습과는 다른 지점에서 6월항쟁을 기억한다. 민주화운동가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시대의 운명을 부여잡고 그들과 맞서 싸웠던 상대방에 대한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박종철, 이한열, 김정남이 아니라 안기부, 보안사, 남영동에 대한 것이다.
보안사 직원들의 일상적 폭력 행사가 가능했나?
1980년대 중후반, 학교 앞에서 수시로 검문이 있었고 학교 안에는 정체불명의 정보원(짭새)들이 상주했다. 1987년 12월 시위 과정에 연행돼 차례로 경찰서-검찰-구치소-법정을 경험했다. 경찰서는 생각보다 사무적이었고, 30대 초반의 검사는 민주화운동의 의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구치소에 입감되던 날 정체불명의 직원이 내게 반성문을 요구했는데 내가 거부하자 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충분하진 않지만 나는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자격으로 1987년 공안기관의 실상을 나름대로 경험했다. 그에 비춰본다면 ‘영화 1987’이 묘사하는 공안기관의 실상은 실제와 다르다. 영화에는 보도지침을 어긴 신문사에 보안사 직원들이 난입해 기자들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있는데 1987년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 어렵다.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의 1987년은 ‘영화 1987’이 묘사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전두환 군부가 폭력적이긴 했지만 대한민국 전체는 합리적인 근거와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양상이었다. ‘영화 1987’에서 보듯 박종철 군을 화장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검사의 사인이 든 명령서가 필요했고, 의사의 부검 현장에는 가족이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남영동, 보안사, 안기부 등 공안기관이 아무 때나 신문사, 교도소는 물론 교회까지 난입해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영화 1987’ 장면은 1987년 대한민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픽션’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박종철 고문의 실상이 하나둘씩 폭로됨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영화적 묘사도 그에 맞춰 고조된다. 김윤식은 탐욕에 눈이 먼 일개 관리가 아니라 빨갱이 척결에 특별한 사명감과 신념을 가진 악의 화신으로 비화된다. 감독은 김윤식을 상징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영화 곳곳에 삽입해 김윤식을 악마적 인물로 부각하고 그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역으로 재규정한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김정남이 향린교회로 숨어들었다. 이를 알게 된 기관원들이 향린교회를 습격하고 일련의 난투극 끝에 김정남을 검거하는 데 실패한다. 김윤식은 성모마리아상이 그려진 교회 스테인드그라스를 배경으로 극적인 표정을 짓는다. 마치 선과 악을 상징하는 듯한 기묘한 장면이었다.
6월 민주화운동 善惡 구도로 묘사
영화를 보면서 가장 아쉽고 의아한 장면이다. 해당 장면은 감독에 의해 특별히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6월 민주화운동은 직선제를 둘러싼 정치 게임이 아니라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또 하나의 장치는 간첩단 사건이다. 1월 14일 박종철 사망을 조작하려는 기관의 시도는 시작부터 난관에 직면한다. 영화에서 전두환 정부는 궁지에 몰리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빼어 든다. 이 간첩단 사건은 김일성을 정점으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배치돼 있는 구도다. 여기에 김정남을 끼워 넣어 스토리를 절정으로 몰아간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궁금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그런 일은 없었다. 있었다면 6월 민주화운동의 진로와 성격을 뒤흔들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6월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감독의 연출로 보인다.
영화는 시종 사실에 충실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기왕에 그런 관점에서 섰다면 사실을 정직하게 추적한다는 것은 민주화운동의 상대방인 전두환과 공안기관의 행적까지 있는 그대로 추적하고 그것까지 포괄하는 종합적인 진실을 추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화 1987’을 보면서 갖게 된 또 다른 아쉬움은 학생운동의 성격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대 초반 청년을 잔인하게 고문하던 기관원이 묻는다.
“종운이 어디 있어?”
기관원이 박종철을 고문한 이유는 서울대 82학번 박종운의 거처를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1984년 유화 조치와 졸업정원제가 시작되면서 서울대는 열기로 들끓었다. 학생들은 5·18 진상 규명, 직선제를 뛰어넘어 혁명 이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혁명가들을 자임했고 주체사상과 레닌주의가 난무했다.
학생운동의 급진화는 민주화추진위원회-구국학생연맹(구학련)으로 이어진다. 1986년 건국대 사건을 계기로 급진적 학생운동이 일대 타격을 받고 1987년 상반기 급진 이념 대신 대중노선을 표방하는 새로운 학생운동이 등장했다. 우리가 말하는 학생운동의 긍정적 역할은 주로 건대 사건 이후 나타난 새로운 학생운동을 의미한다.
1985~1986년 급진 이념을 표방한 학생운동이 대학을 장악해 가자 공안기관도 강경 노선으로 선회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김근태, 문용식, 권인숙에 대한 고문과 박종철 치사 사건이다.
급진 이념 학생운동권이 대학 장악한 것도 사실
1987년 7월 9일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이한열 열사 장례식. [동아DB]
1987년 고난에 찬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그 선두에 있었다. 불행히도 민주화운동은 하나의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영화 속 강동원과 김태리 같은 순결한 청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일부 학생들은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스레닌주의가 말하는 바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을 두고 경합했던 공안기관과 학생들을 각각 절대악과 절대선으로 나눠 묘사하기보다는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한결 성숙한 관점에서 6월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는 것은 어땠을까 싶다. 검경은 안보와 치안을 담당하는 중추기관으로 불행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미래를 위해 유지, 발전해야 할 기관이기 때문이다.
6월 민주화운동의 성격에 또 다른 단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아주 재밌게 봤다. 교도관 유해진은 기밀을 전하기 위해 잡지 ‘다이제스트’를 사용한다. 다이제스트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다.
1970년대 초반 한국은 가난하고 촌스러웠다. 이 시기를 대변한 노래가 이미자나 남진, 나훈아가 부른 청승맞은 노래들이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한국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대학가요제, 개그콘테스트 등 젊고 교육받은 대학생들이 한국 사회를 근본에서 바꾸고 있었다.
1970년 대말쯤으로 기억한다.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탐욕과 욕망이 들끓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컬러TV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회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엠마뉴엘’과 ‘애마부인’ 시리즈다. 공부밖에 할 줄 몰랐던 20대 초반의 나도 피끓는 청춘을 어쩌지 못하고 이런 영화들을 봤더랬다.
사람들은 정권교체와 올림픽을 앞둔 1987~1988년 파국을 의미하는 대회전이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러나 1985~1989년 한국은 ’3저 호황‘이라는 고도성장 국면에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1980년대 후반 한국은 중진국 또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
6월 민주화운동을 과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착각을 한다. 하나는 한국이 마치 무법천지에 가까운 나라였다고 상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 투쟁이 없었다면 한국은 파멸했을 것이라는 묵시록에 가까운 진단이다.
전자의 오류는 ‘영화 1987’에서도 드러난다. 의사, 검사, 기자, 교도관 등 많은 사람이 군부에 굴하지 않고 조금씩 군부의 기도를 무산시킨다. 박종철을 화장하기 위해서는 검사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검사의 동의가 없으면 어쩔 수 없다. 하정우는 이 간극에서 용기 있는 검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은 무법천지 독재국가가 아니라 걸음걸음마다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현대적 국가였고,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는 남영동 권력 또한 검사 한 명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맨다.
1987년 한국사회, 갈등과 타협 공존하는 발전 과정
후자도 그러하다. 대한민국은 1987년 민주화운동과 승리가 없었다면 천당에서 지옥을 오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기보다는 다소 시간이 지체됐을지언정 민주화의 길로 들어선 상태였다. 따라서 6월 민주화운동은 선과 악, 회생과 파멸이라는 양극단의 궤도 위에 서 있었다기보다는 수많은 타협과 갈등이 공존하며 중진국, 선진국을 향해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다.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선데이서울’ ‘엠마뉴엘’이다. 대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대한민국은 빠르게 민주화·산업화·현대화되었고 그렇게 발전한 대한민국은 선과 악, 대회생과 파멸이라는 극단적인 시나리오 대신 직선제와 같은 온건한 길을 택했던 것이다.
나는 최근에야 ‘영화 1987’을 봤다. 나는 1987년 1년 내내 거리에서 살았다. 1987년에는 젊은 날, 나의 영혼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개중에는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도 적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많이 울었다. 특히 박종철 아버지와 문익환 목사가 오열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정말 짐승처럼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넘어서야 하는 산이 있다. 공안기관의 범죄행위를 응징하되 그들의 역할을 공정히 인정하는 것, 6월 민주화운동을 추억하되 학생운동의 잘못 또한 성찰하는 것 등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 1987년의 기억이 소중한 자산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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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