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전자 폐기물 年5000만t… “수리해 쓸 권리를 달라!”

[제로웨이스트]

  •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입력2021-01-0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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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해 1인당 16㎏ 전자기기 버려

    • 생산업체 저작권 근거로 임의 분해 시 수리 거절

    • EU 환경보호 위해 ‘수리할 권리’ 법안 시행

    • 美 법제화 시동, 국내선 논의조차 없어

    • 보조배터리 등 소형 폐기물 관리 체계 필요

    ‘수리할 권리’는 고장 난 전자기기를 직접 수리하는 모임이다. [수리할 권리]

    ‘수리할 권리’는 고장 난 전자기기를 직접 수리하는 모임이다. [수리할 권리]

    A씨는 2014년형 애플 노트북 운영체제(OS)를 빅서(Big Sur·최신 OS)로 업데이트했다. 이후 전원이 켜지지 않아 공식 서비스센터인 애플 스토어를 찾았으나 “보증 기간이 끝나 50만 원을 내고 메인보드를 교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50만 원은 이 제품 중고 가격과 맞먹는다. A씨가 비슷한 일을 겪는 이가 많다고 호소하자 애플 직원은 구형 기기를 사용하는 A씨의 책임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A씨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50만 원을 부담하고 노트북을 고쳐 쓰거나 폐기 후 새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다종다양한 전자기기가 생활필수품이 되면서 전자 쓰레기가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일부 소비자는 수리할 권리를 독점하는 생산자가 전자 폐기물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생산업체가 공식 서비스센터를 통한 수리만 허용하거나, 공식 서비스센터가 아니면 수리 자체가 어렵도록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매립·소각하면 유독 물질 배출

    애플은 사용자가 임의로 분해한 제품에 대한 수리를 거부한다. 사설 업체에서 한 번이라도 수리한 제품은 애플 공식 서비스센터에서 고칠 수 없다. IT기기 수리 정보를 제공하는 글로벌 사회적 기업 아이픽스잇(iFixit)은 삼성 갤럭시 S20 모델에 수리 용이성 점수(10점 만점에 가까울수록 수리 용이)를 3점만 부여했다. 

    유엔이 발간한 ‘2020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The Global E-waste Monitor 2020)’에 따르면 2019년 5260만t에 달하는 전자 폐기물이 발생했다. 그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6% 수준(81만8000t)이다. 1인당 한 해 15.8㎏꼴로 미국(21.1㎏)이나 일본(20.4㎏)에 비해 적지만 세계 평균(7.3㎏)의 두 배가 넘는다. 

    전자 폐기물 재활용 비율도 유럽에 비해 낮다. 2017년 독일은 전자 폐기물 83만7000t을 회수·재활용했지만 한국은 29만2000t에 그쳤다. 2019년 독일 전자 폐기물 양(160만t)이 한국의 두 배임을 감안해도 적은 양이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국가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 인포멀 섹터(informal sector)가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한국에서 전자 폐기물이 소각·매립돼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비율은 높지 않다”면서도 “선진국에서 버려진 전자 폐기물이 저소득 국가에서 재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해당 국가에 전자 폐기물 처리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으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전자 폐기물은 매립·소각 시 폴리염화비페닐·폴리브롬화비페닐 등 유독성 화학물질이 배출된다. 유독 물질은 생물 지방 조직에 축적돼 간·갑상선·신경계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전자 폐기물 양은 앞으로도 늘어날 전망이다. ‘2020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는 2030년에는 전자 폐기물 7470만t이 배출될 것이라고 관측했다.


    소비자에게 수리할 권리를 달라

    글로벌 사회적 기업 아이픽스잇(iFixit)이 게시한 자가 수리 선언문. 이들은 “수리할 수 없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아이픽스잇]

    글로벌 사회적 기업 아이픽스잇(iFixit)이 게시한 자가 수리 선언문. 이들은 “수리할 수 없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아이픽스잇]

    3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수리할 권리’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1년부터 유럽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부품을 사설 업체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법안이다. 부품을 공급받으면서 사설 업체들도 제품을 수리할 수 있게 됐다. EU 집행위원회는 환경오염과 자원 낭비 방지를 법안 통과 이유 중 하나로 제시했다. 

    “수리는 지구를 구한다(REPAIR SAVES THE PLANET).” 

    아이픽스잇이 게시한 ‘자가 수리 선언문(Repair Manifesto)’ 내용이다. 이렇듯 수리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가 구입한 제품을 더 싸고 쉽게 고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생산업체가 전자기기 부품과 수리 매뉴얼을 사설 업체 또는 소비자에게 제공할 책임도 강조한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전자기기 수리를 시작했어요. 제품 수명도 늘어나니 환경에도 도움을 주는 셈이죠.” 

    강두루(36) 씨는 2018년 동료 엔지니어와 함께 전자제품을 직접 수리하는 모임 ‘수리할 권리’를 만들었다. 수리하는 재미와 끝마쳤을 때 성취감이 작지 않다. 워크숍을 열어 고장 난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수리하는 과정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한계가 많았다. 전자기기 생산업체 대부분이 공식 부품이나 수리 매뉴얼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씨는 “1998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Digital Millenium Copyright Act) 때문에 소비자가 스스로 물건을 뜯어보고 저렴하게 수리할 권리를 빼앗겼다”고 말했다.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은 디지털 콘텐츠에 포함된 저작권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졌다.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전자기기는 이를 소유한 사람이 직접 분해하거나 수리할 수 없다. 이 법은 소비자가 전자제품을 임의 분해할 경우 무상 수리나 수리 자체를 거절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미국 20개 주에서 전자기기를 수리할 권리와 관련한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은 수리할 권리에 대한 규정이 없다. 다만 행정규칙인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이 무상 수리가 가능한 보증기간을 명시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2년, 노트북은 1년이다. 

    네이버 카페 ‘제로 웨이스트 홈’을 운영하는 이도연 씨는 “대개 배터리 문제로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를 교체하는 경우가 많다. 제조사에서 교체 매뉴얼만 제공한다면 배터리만 구입해 쉽게 교체할 수 있다. 수리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못 고치면? 잘 버리자

    수리가 어렵다면 잘 버려야 전자 폐기물로 인한 환경오염이 줄어든다. 새 제품을 구입할 경우 쓰던 가전제품을 쉽게 폐기할 수 있다. 가전제품 생산자 또는 판매자는 소비자의 기존 제품을 회수·재활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새 제품을 사지 않는다면 무상 방문수거 서비스를 이용해 보자. 2012년 서울시가 시작한 이 서비스는 2014년 상반기 전국으로 확대됐다. ‘폐가전제품 배출예약시스템’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가습기·전기밥솥·청소기·선풍기 등 소형 가전제품은 5개 이상 모여야 무상으로 수거해 간다. 다만 USB·보조배터리·이어폰 등은 수거하지 않는다. 

    일부 아파트 단지는 소형 가전제품 전용 폐기함을 갖추고 있다. 공동주택에 거주하지 않는 경우 주민센터를 방문해 폐기해야 한다.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면 소각돼 유독 물질이 배출될 수 있다. 

    환경부는 현재 경남 김해·창원시 등 10개 지자체와 함께 보조배터리 재활용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폐건전지 분리수거함을 통해 보조배터리를 함께 배출하는 방식이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앞으로 전자기기는 소형화·다양화될 것이다. 소형 전자 폐기물에 대한 유연한 관리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늘어날 전자 폐기물 생산량을 고려해 수리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제도적 기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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