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4

희대의 납치 작전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07-20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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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주>

    1

    [GettyImage]

    [GettyImage]

    그날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민항기 한 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조용히 이륙했다. 안에는 납치된 아이히만과 그를 체포한 모사드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동시에 견제하던 아르헨티나 정부가 알았더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희대의 납치 작전은 그렇게 감쪽같이 성공했다. 

    페루 여권을 가지고 있던 비젠탈은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이었다. 아르헨티나 정부의 항의와 조사에 대비한 위장 동선이었다. 멕시코시티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비젠탈이 자신 옆에 서 있던 세자르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건가?” 

    여행객 차림을 한 세자르가 대답했다. 

    “이탈자 녀석은 아직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다. 꼭 잡겠어.”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린 비젠탈이 웃으며 말했다. 

    “아주 빠른 놈이었어. 혼자 감당하긴 어려울 텐데? 우리 조직으로 들어오지 그래?” 

    고개를 저은 세자르가 대답했다. 

    “여럿이 덤빈다고 잡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섬세하고 은밀하게 접근해야 그나마 희망이 있지.” 

    “그래도 필요하면 우릴 찾도록 해. 적어도 지구에선 자네보다 경험 많은 추격자들이니까.” 

    어깨를 움찔한 세자르가 대답했다. 

    “두더지를 놓치게 만든 건 미안하다. 쫓고 있는 놈만 소멸시키면 협력하겠다.” 

    “초심자 단계에선 다 그런 시행착오를 겪어. 어쨌든 행운을 빌겠어. 잊지 마. 지구에 추격자는 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려는 비젠탈을 향해 세자르가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친구!” 

    비젠탈이 살짝 몸을 틀어 뒤돌아보자 세자르가 다시 물었다. 

    “혹시 토마스 하이체크에 육화했었나? 베를린에서?” 

    모자챙을 잡아 비스듬히 눌러쓴 비젠탈이 속삭였다. 

    “맞아. 나였어. 히틀러를 잡으려고 비행하다 폴란드 상공에서 중단했지. 그 두더지가 히틀러 몸에서 이미 벗어났더라고. 왜 그걸 묻지?” 

    빙그레 미소 지은 세자르가 뭐라고 말하려다 멈칫한 후 천천히 속삭였다. 

    “아냐. 그냥 됐어. 각자 자기 목표물이 있는 거니까. 아디오스!” 

    두 팔을 벌리고 익살맞은 표정을 지은 비젠탈이 몸을 휙 돌려 크게 한 걸음 내딛더니 차츰 멀어져갔다.

    2

    “그자의 다음 이동 장소를 알고 싶다고요?”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루이 호르헤 보르헤스가 일본인 여비서가 가져다준 녹차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시력을 거의 상실한 그는 도서관 사무실 천장을 공허하게 올려다봤다. 

    “그렇습니다. 보르헤스 교수님. 당신이 알 거라 믿고 찾아왔습니다.” 

    말을 마친 세자르가 근육이 사라진 가는 팔로 찻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가져갔다. 

    “왜 내가 알 거라고 믿고 있지요?” 

    검은 양복 깃을 매만지며 보르헤스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자르가 대답하자 보르헤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웃기를 마친 아르헨티나 최고의 환상소설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불상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올해가 1971년이니까…, 세자르 씨가 여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자를 쫓은 게 10년이 넘은 셈이로군요? 고개 끄덕이지 마세요. 어차피 안 보이니까. 아무튼 난 뉴욕의 해나 아렌트처럼 이 행성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성단에 맹세했습니다. 어떤 추격으로부터도 면제된 존재지요. 그건 알고 있나요?”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대답했다. 

    “추격이 면제된 이동자 신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차원 이동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더는 이동자도 아니지요.” 

    “그래도 다른 이동자를 알아볼 수는 있는 분이시죠? 놈은 틀림없이 최근 여기에 들렀습니다. 분명 단서를 남겼을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쉰 보르헤스가 고대 수메르어로 이상한 노래를 부르다 말고 속삭였다. 

    “상파울루 쪽으로 가보세요. 그자가 당신이 찾는 그 사람이 맞다면. 그는 수메르 고대어로 내게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누군가 찾아와 자기에 대해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 재밌던 중동학자가 당신이 찾는 그자라고 가정한다면.” 

    세자르가 곧바로 일어나 사무실을 벗어나려 하자 보르헤스가 덧붙였다. 

    “다시는 날 찾지 말아주세요. 나나 아렌트 박사 같은 사람은 이제 간절히 평화를 갈구합니다.”

    3

    죽음의 천사 멩겔레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오렌지 주스를 빨았다. 숨어 살던 히틀러 총통이 죽자 남미 나치 조직의 꼭대기에 올라선 건 바로 그였다. 바야흐로 세상에 커다란 전쟁을 벌여 자신의 숙주가 지닌 가능성을 남김없이 써볼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자기 옆에 누워 있던 아르헨티나 출신 중동학자 이스마일 쪽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늙을수록 몸을 갖고 산다는 게 참으로 불편하구나. 안 그러냐?” 

    볼록 튀어나온 자기 배를 내려다본 이스마일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긴 해. 다음 꿍꿍이가 궁금하군. 계획이 뭐지?” 

    주스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멩겔레가 비만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남미도 좋긴 하지만…, 중동을 먼저 화약고로 이용하려 하노라. 네게 그 숙주를 권한 이유를 여태 몰랐느냐?” 

    말을 마친 멩겔레가 튜브를 쥐고 해변 백사장 쪽으로 뒤뚱대며 걸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스마일이 껌 형태의 담배를 입에 넣고 질근질근 씹기 시작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멩겔레가 튜브를 몸에 걸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오른쪽에서 뛰어오는 브라질 소녀가 바람개비를 돌리고 있었다. 강렬한 파동이 느껴졌다. 

    “젠장!” 

    이스마일 속 이탈자가 육체를 벗어나며 멩겔레 쪽으로 경고파를 보냈다. 튜브를 멘 채 파도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던 멩겔레의 시신은 저물녘에야 경찰에 의해 회수됐다.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해변에서의 일이었다.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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