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아버지께서 한국방정환재단에 재산을 기증하시며 나는 재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의 재산이니 당신의 뜻을 존중해드리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사를 맡아서 살펴볼 뿐이었다. 당신께서 앞으로 너희도 혹시 재산이 만들어지면, 함께하면 좋겠다고 하셨을 때도 그저 좋은 일이니 그리 할까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2008년 이사장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재단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은 소파 선생의 호를 딴 ‘작은(小)물결(波)문고’ 보급 사업이다. 이는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방과 후에 보살피는 지역아동센터에 문고를 설치하고 도서를 보급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2009년부터 시작한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 연구다. 이 지수는 우리 재단이 후원,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기획연구, 현대리서치에서 조사해 매년 발표하고 있다. 4년 연속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게 나타나고 있다는 현실이 가슴 아프지만, 문제를 깨달으면 꼭 해결해낸 현대사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저력을 믿어본다. 언젠가 이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조사가 필요 없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때때로 소파 선생님 연구에 필요하다며 소장하고 있는 자료가 있느냐는 문의가 오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요나 글, 어린이날의 들뜬 기분 등을 통해 소파 선생에 관한 기억 몇 가지를 담아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분을 제대로 알고, 또 그 시대에 어떤 고민을 안고, 어떻게 어린이운동을 하셨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2010년에 근대사-천도교운동 전공자인 정용석 박사를 소개받아 일단 소파 선생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이 보이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知卽爲眞愛 愛卽爲眞看 看卽畜之而非徒畜也).”-유한준의 김광국 화첩 발문 중에서.
바로 이런 일이 내게도, 재단에도 일어났다. 일단 모았더니, 질문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근대어는 현대어와 참으로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제대로 읽기도 어렵고, 뜻을 명확히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 당시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왜 그리 많은 필명, 예명이 있는지, 또 소파 선생이 왜 ‘어린이’라는 잡지를 출판했는지, 이 잡지가 얼마나 널리 읽혔는지 연쇄적인 궁금증이 일었다. 그 미디어를 통해 우리 아동문학계, 나아가 사회운동의 일환으로서 아동운동에 대한 맥락을 모르고서는 문자 해석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다시 국문학자 한 분과 역사학자 두 분에게 소파 선생 연구를 의뢰하게 되었고 최근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나왔다. 1편은‘새로 찾은 방정환 자료, 풀어야 할 과제들’, 2편은 ‘방정환과 어린이 지(誌) 주요 집필진의 투고 동향’, 3편은 ‘소년들, 조선을 보다-1920년대 어린이 지 독자 공동체의 형성과 변화’에 관한 것이다. 연구 작업을 지켜보면서 ‘어린이’지에 예명과 필명이 많이 쓰인 이유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저작권 문제가 민감한 지금으로선 가당치 않은 일이지만 1920년대에는 지식인도 적었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척박해서 다양한 필명과 예명을 동원해 필진을 채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직도 소파 선생의 작품인지가 명확지 않은 글들, 또 소파 선생의 글인데 다른 사람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여 소파 선생의 업적과 활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천도교의 영향, 소년운동사, 색동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일본 아동문학이나 잡지와의 비교 분석 등을 새로운 과제로 삼기로 했다.
또한‘어린이’지의 주요 필진 연구를 통해서는 소년운동 지도자, 출판기획자, 기자, 문학가, 교육자, 동화구연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재다능함을 넘어 최초의 문화콘텐츠 개발자이자 기획자로서 활동하며 한국 근대 문화 전반에 기여한 방정환을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에겐 요즘 아이돌 스타와 같은 존재가 소파 선생이었다고 한다. 소파 선생이 구연동화를 하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때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어린 친구들이 몰려들어 열렬히 환호했다고 한다.
아동잡지 `어린이`의 표지들.
현재를 읽고 미래를 내다보려면 역사를 탐구하라
소파 선생이 ‘어린이’ 지를 발간하던 1920년대는 젊음이 추앙받던 시대였고, 격변의 시대였다. 새로운 사상과 생활태도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조금씩 들어오던 근대적 관념들은 새로운 매체들을 통해 급속히 번졌고, 전통과 충돌했다.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어린이’라는 새로운 잡지 매체를 통해 조선 민족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동을 위한 제도와 이념도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 당시 소년들이 어린이를 위한 제도와 이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만큼 ‘어린이’지의 독자 참여 양상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었다.
독자투고 동향을 연구한 결과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독자가 전국 각지에 고루 분포하고 이 잡지를 통해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자투고자 가운데 경성의 윤석중, 진주 소용수, 마산 이원수, 언양 신고송, 대구 윤복진, 울산 서덕출, 김천 승용순, 수원 최순애, 원산 이정구, 안주 최경화, 안변 서이복 등은 나중에 ‘기쁨사’라는 동인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어린이’는 1920년대 소년들에게 그들의 ‘조선’을 상상하게 하는 유력한 매체였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독자 참여는 ‘어린이’의 독자라는 공동체 안에서 청소년이 조선이라는 정서적 민족정체성을 깨닫고 지면 위에 온전한 조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해줬다. 이 잡지는 그 당시 10만 부를 발행했는데 한 권을 여러 명이 돌려 읽던 시절이었으니 그 영향력이 지금의 어떤 매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했을 것이다.
3년간 추진하기로 하고 시작한 이 연구 프로젝트는 첫 번째 발표회에서부터 많은 과제를 안겼다. 앞으로 어린이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배경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할 대상으로서 소개되고 정착되는 과정, 전체 사회운동 속에서 어린이운동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됐는지를 끈질기게 알아내는 일은 참으로 설레고 보람된 작업일 터. 다만 그 시대를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건 여전히 안타깝다. 이제라도 이런 연구를 지속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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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역사적 추적과 고찰을 통해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측하려면 과거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야 한다. 나 역시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더 깊고 넓게 역사를 파고들 참이다.
이번 작업을 지켜보면서 얻은 뜻 깊은 교훈은 역사를 알아야 현재가 더 분명하게 읽힌다는 것이다. 봉인된 뚜껑을 열어보니 커다란 보물이 가득 담긴 걸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앞으로도 전문 연구자들과 함께 그 보물의 또 다른 가치를 꾸준히 내보일 수 있길 바란다. 오늘보다 한층 더 성숙한 내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