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웅장한 느낌을 주는 금당의 외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告)의 목조건물이다.
‘일본 최후의 궁대공(宮大工)’이라 불리는 니시오카 스네카스(西岡常一·1908∼95)옹은 이렇게 말했다. ‘궁대공’이란 민가는 짓지 않고 오직 절이나 신사만을 짓는 일본 대목(大木)을 일컫는 말이다.
스네카스옹은 호류지와 나라(奈良)의 야쿠시지(藥師寺)를 복원한 인물로 평생을 목수로 살았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몇 권의 저서를 남겼다. 필자는 그 중에서 말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쓴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을 읽고 호류지 앞 서리(西里)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필자가 그 책을 산 것은 호류지를 처음 찾은 1993년이었고, 그를 만난 것은 1995년 3월 두 번째 호류지 방문길에서였다.
호류지가 자리잡은 곳은 이카루카(斑鳩)라는 이름의 아주 한적한 마을이다. 일본의 역사 도시 나라 역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호류지 오층탑(일본에선 ‘오중탑’이라 부른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회랑을 한바퀴 돌아 중문(中門)을 통해 탑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호류지 오층탑은 전체적으로 볼 때 부여 정림사 오층 석탑을 빼닮았다. 정림사 탑이 비록 석탑이기는 하나 그 모델은 어디까지나 목탑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네카스옹도 호류지의 건축 기법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했고, 아스카와 나라시대 사람들이 백제로부터 문화를 배웠으니 전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35m 높이의 탑(기단 위 31.5m)은 다섯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층을 만드는 처마는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가 줄어드는데, 그 비율이 10:9:8:7:6이라고 한다. 바닥은 겨우 12.5평이다. 그래서 탑은 매우 날렵해 보인다.
각 층의 처마 아래에는 여러 종류의 사귀(邪鬼)들이 특이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쪼그려앉은 원숭이가 혀를 내보이며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 볼 만하다. 하지만 그 원숭이조차 첨차(서까래를 받치기 위한 꾸밈새)를 받들고 있어 실제 기능을 가진 구조재의 하나다.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오층탑에서 단순히 꾸미기 위해 설치한 것은 하나도 찾기 어렵다. 나라(國)를 처음 세울 때라 군더더기를 철저히 배제한 모양이다.
탑은 부처의 사리, 즉 유골을 모신 곳으로 그 1층에는 소상(塑像)이 조각돼 있다. 동서남북 네 면을 장식하고 있는 소상은 각기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동면에는 유마 거사와 문수보살의 문답 장면이, 서면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는 모습이, 남면에는 미륵보살의 설법 장면이, 북면에는 부처님의 입멸(열반) 장면이 담겨 있다.
오층탑 뒤로 2층 구조의 금당(金堂)이 있다. 금당이란 본존불을 모신 성스런 곳이니 곧 대웅전을 말한다. 금당은 비가 많은 일본의 전형적인 사찰 형식인 긴 처마에 가파른 물매를 갖추고 있다. 다만 기둥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가운데가 불룩한 이른바 배흘림 기법으로 처리해 무척이나 단아한 느낌을 준다. 그 아래 조각된 용의 형상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목조건축물이 갖는 경쾌함과 종교건축물의 장중함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눈길을 끈다.
세계 最古 목조 건축물
오층탑과 금당은 대강당과 종루·회랑·중문·경장(經藏) 등이 둘러선 사각 마당의 중심에 있다. 나라시대에 세워진 대강당은 법회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탑과 당을 감싸안은 자세라 너그럽게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의 건축물이 대부분 국보라는 사실이다. 일본 국보의 10분의 1이 이 호류지에 집중돼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탑과 금당이 1대 1의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가람인 고구려의 청암리 절(6세기)은 ‘1탑 3금당식’, 즉 탑 하나에 금당이 셋인 구조다. 그러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의 미륵사와 정림사, 신라의 분황사에서 보듯 ‘1탑 1금당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탑과 금당과의 이 같은 경쟁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금당이 곧 가람의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탑은 금당을 좌우에서 수호하는 형상으로 세워졌다. 그것이 9세기말 세워진 감은사에 나타난 이른바 ‘쌍탑 1금당식’이다. 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좌우로 거느린 불국사에서 절정을 이뤘고, 우리나라 가람의 기본구조로 정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