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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반쯤 열린 문 안쪽의 세계

소년, 반쯤 열린 문 안쪽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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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반쯤 열린 문 안쪽의 세계

‘너의 목소리가 들려’<br>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282쪽, 1만2000원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아름다운 소년 이야기 ‘보이(The Boy)’라는 화집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기분을. 206개의 도판과 177개의 컬러 화보를 거느린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 책이 ‘보이-아름다운 소년’(새물결, 2004)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 출간될 당시, 한국에서는 전무후무 ‘꽃남’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소년의 존재, 더 이상 아이는 아니지만 아직 어른도 아닌 남자에 대해 주목하지 못했었다.



소년이란 더 이상 아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직 어른은 아닌 남자를 가리킨다. 소년기(boyhood)는 길 수도 있다. … 15년 혹은 심지어 2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짧을 수도 있다. … 순식간에 지나가든 아니면 길고 점진적인 유도과정이든 소년기가 지나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 저메인 그레이, ‘소년이란 무엇인가’(‘보이’ 수록) 중에서



나는 김영하가 소년을 모델로 신작을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가 깊숙이 꽂혀 있던 G. 그레이의 ‘보이’를 다시 꺼내볼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2년 전, 은희경이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 ‘소년을 위로해줘’를 출간했을 때도 했으나,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소년들, 정확히는 21세기 한국 소설가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호명할 수밖에 없는 소년들은 G. 그레이가 수집하고 기록한 ‘가장 아름다운 한때로서의 소년의 역사’에는 누락되었거나 제외된 존재들일 것이라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소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한 인간의 일생 중에 거치는 보편적인 이행기라기보다는 가혹하게 겪어내야 하는 ‘특수한 시기이자 환경’이 되어버렸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소년이 아닐지라도, 한국의 소년들은 대부분 비인간적인 교육환경에서 부모나 사회에 의해 ‘사육당하고’‘박제되고’ 있다고 느낀다. 소년은 꿈을 가져볼 새도 없이 꿈으로부터 멀어져 어른(부모)의 꿈을 대신 꾸는 시늉을 하고, 대신 꿈꾸는 연기를 고분고분 해 보이느라 속으로는 극도로 피로하다. 풀리지 않고 쌓이는 피로는 분노를, 분노는 폭력을 잉태하고, 폭발시킨다.

그런 환경을 알고도 묵인하며 사교육과 제도교육에 소년을 맡길 수밖에 없는 부모 특히 어미는 ‘낳았다’는 자체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넘어 원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한국의 현실이다. 원만한 가정에서조차 피해의식과 죄의식이 특수한 시기, 특수한 환경을 형성하고 있는데, 가정을 이루지도 못하고, 또 가정을 이뤘다 해도 파탄 난 지경에 처한 이들은 어떠하랴.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첫대목은 헤어날 길 없이 악순환되고 있는 지금-이곳, 궁지에 몰린 소년·소녀의 초상을 카메라로 따라가듯 차갑게 보여준다.

아직 귓가에 솜털이 보송한 소녀가 쇼핑용 카트를 밀면서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카트가 그녀를 질질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트 안의 백팩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고 소녀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앳된 얼굴만 아니었다면 터미널에서 살아가는 그렇고 그런 노숙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눈가와 입술에는 세상을 오래, 험하게 산 자들 특유의 독한 기운이 없었다. -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중에서

고아 3부작 완결편

고아 소년 동규와 제이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불러낸 김영하 신작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출간될 즈음, 나는 이정이라는 또 다른 고아 소년의 디아스포라 여정을 그린 그의 장편 ‘검은 꽃’을 안고 북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소설의 행로를 따라 유카탄 반도까지 돌아보고 귀국하자 그의 고아 시리즈 3번째 장편이자 완결편이라는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로 들어가기 전 탐색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관습이 머릿속에서 출몰했다. 이때 관습이란 공적 영역의 상상력으로, 캐나다 출신의 서사학자 N. 프라이가 지적한바, ‘시인이나 소설가의 독창성은 관습이라는 역사 위에 존재하고, 인간의 상상력은 전체로서 인간을 상상하는 공적인 것.’ 이때의 관습을 기반으로 하는 공적 영역의 상상력은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myth making power)으로 개인의 꿈을 공동체의 꿈으로 연결’하는 의미심장한 것으로, ‘문화를 형성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는 것.(N. 프라이, ‘비평의 해부’ 참고)

“요즘 들어 자꾸 제이 목소리가 들려요.”

“뭐라고 하는데?”

“새로운 말은 없어요. 예전에 걔가 했던 말이 마치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다시 들려요.”

“나도 가끔 내가 쓴 소설의 인물들이 하는 말을 듣곤 해. 멍하니 앉아 있다가 누가 나한테 말을 거는 줄 알고 돌아볼 때도 있어. 근데 아무도 없지. 생각해보면 내가 며칠 전에 쓴 대사야.” …

“저는 아주 생생해요. 자다가 깜짝 놀라 일어날 정도라니까요. 가끔은 길을 걷다가도 들어요.”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뭐니?”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예요.”

- 위의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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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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