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잉어가 죽는다고? 잉어 입장에서 생각해야지”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㊿]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 조경 총책임 정영선 조경가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8-11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50여 년 삶 자체가 한국 조경의 역사

    • 단양 자연석·강원 소나무 직접 가져와 심어

    • 자연·땅·인간 연결하는 ‘연결사’로서의 사명

    • 일본 유학 후 사비 들여 문화 유물 모은 이건희

    • “그건 뺐습니다” 소리에도 전적으로 믿고 맡겨줘

    • 동식물 가리지 않고 아낀 회장의 ‘사랑’ 에너지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의 조경을 설계부터 완성까지 진두지휘한 정영선 조경가.
[지호영 기자]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의 조경을 설계부터 완성까지 진두지휘한 정영선 조경가. [지호영 기자]

    비 갠 하늘은 높고 파랬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100여 m 앞에서 눈부시게 파란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공작새가 모이를 쪼고 있었다. TV 속 동물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공작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미술관 안내센터 직원이 신기해하는 기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여기선 공작이 주인”이라고 했다.

    호암미술관 주차장에서 만난 공작새. [허문명 기자]

    호암미술관 주차장에서 만난 공작새. [허문명 기자]

    ‌이날은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을 조경한 정영선(83·조경설계 서안 대표) 조경가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3월 벚꽃이 만개했을 때 미술관을 찾았던 기자는 미술관 앞 산과 호수의 절경에 새삼 놀랐다.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가 다시 개관한 전통 정원 ‘희원(熙園)’의 격과 품위, 자연스러움에 두 번 감탄했다. 이곳 희원을 설계한 이가 바로 정영선 조경가다.

    우리나라에서는 건축가에게 관심을 기울일지언정 조경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라 정영선은 대중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늦은 나이에(?) 스타가 됐다. 조경가로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그의 평생에 걸친 삶과 작업을 조명하는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9월 22일까지 진행한다. 4월 17일 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땅에 쓰는 시’도 개봉해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2만여 명이 넘는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5월 1일엔 tvN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도 나왔다.

    정영선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여성지 기자를 하다가 마침 문을 연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에 입학해 제1호 졸업생(1975)이 된다. 1980년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이기도 하다. 1984년 당시 아시안게임을 2년 앞두고 기념공원과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예술의전당 현상설계 공모에서 당선되면서 조경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조경이 정부 주도로 이뤄지다 보니 초기에는 정부가 발주하는 공공 프로젝트를 많이 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던 정부가 국제행사를 치르면서 외국인들에게 보여줄 풍요롭고 세련된 한국 풍경이 필요해지자 국립공원을 비롯해 문화유적지, 고속도로, 주거지역 주변에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50여 년 외길 조경 인생에는 낯익은 업력(業歷)으로 가득하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영등포구 선유도공원, 경춘선 숲길, 디올 성수,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제주 오설록 티뮤지엄, 서울아산병원,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 서울식물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조경계의 최고 영예라고 할 수 있는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주는 제15대 ‘제프리 젤리코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한때 대학교수로도 활동했지만 지금은 조경설계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인이자 80대에도 여전히 전국을 누비는 현역이다.

    사람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가

    정영선 조경가는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의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모두 기억한다는 듯 만지고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호영 기자]

    정영선 조경가는 호암미술관 전통 정원 ‘희원’의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모두 기억한다는 듯 만지고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호영 기자]

    그를 만나고자 한 것은 ‘희원’을 통해 이건희 회장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을 통해 인터뷰 청을 해놓고도 쉬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지나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정영선입니다. 이건희 회장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목소리만으로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성품이 느껴졌다. 인터뷰도 희원에서 하자고 했다. 그의 집이 있다는 양평에서 먼 길일 텐데 현장을 중시하는 조경가의 DNA도 읽혀졌다.

    그의 지난 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꽃과 나무와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정원으로 나가 꽃과 나무에게 “잘 잤니” 인사하고 외출할 때는 “잘 다녀올게”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평생 자연을 대해온 사람의 따뜻한 성품이 읽혔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게’라는 그의 조경 철학대로 그 역시 그런 길을 걸어온 듯했다.

    희원을 함께 거닐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여기저기 많이 보이지 않아 걱정인데 이리 날아다니니 고맙다”며 나비에게도 인사했고, 풀과 나무 하나하나에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했다. 잡초를 뽑고 있던 일꾼들에게도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희원은 한국 정원의 미의식을 재현한 곳으로 유명하다. 정교하거나 인위적인 정원보다 자연과 가장 친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한국적 정원 말이다.

    그와 본격적 투어(?)를 시작했다.

    호암미술관 입구 보화문. [지호영 기자]

    호암미술관 입구 보화문. [지호영 기자]

    ‌“원래 미술관은 저 앞 도로에서 바로 들어가는 계단이 길게 죽 있었는데 이걸 다 뒤집었어요. 정원을 찬찬히 다 둘러보고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했죠. 메인 정원으로 들어가기 전 인트로덕션 개념으로 바깥 정원과 메인 정원 사이에 끼워 장면이 달라지게 설계했어요. 아이고, 여긴 담이 하나도 안보이네. 가지를 좀 쳐야 할 것 같네.”

    나무 하나 풀 하나를 모두 기억한다는 듯 만지고 쓰다듬으며 걷던 그는 ‘관음정’ 정자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저 돌들은 단양에서 가져온 거예요. 우리나라 자연석 중에 저렇게 묘하게 예쁜 돌은 단양 것이 최고입니다. 희원 곳곳에는 회장님과 홍라희 관장님이 쏟으신 정성과 애정이 깊게 스며 있어요. 그래서 오자고 한 거야.”

    그의 몸은 가녀리고 왜소했다. 그러면서도 여든 넘은 나이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걸음이 빨랐다. 미술관 건물 앞 대형 연못 앞에 함께 섰다.

    “우리나라 가장 전통적인 연못 방식이 이렇게 건물 앞에 섬처럼 연못을 만드는 거예요. 보통 둥글게 하는데 가끔 네모난 것도 있어요. 나는 둥근 게 싫어서 네모나게 했죠.

    저기 건너편 화분에 심은 돌들이 보이나요. ‘돌을 심는다’고 해서 식석(植石)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소박했던 우리 옛날 선비들이 했던 것을 재현하고 싶어서 내가 가져와 직접 심어놓은 것입니다. 전국을 다니며 구한 것들이에요.

    나무도 마찬가지예요. 저기 서 있는 키 큰 소나무들은 30여 년 전에 제가 직접 강원도에서 사 온 것이죠. 강원도 어딘가에서 아파트가 대규모도 들어서서 소나무들이 버려진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홍 관장님께 보고했더니 ‘가보고 맘에 들면 사 오라’고 해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산(山) 주인을 만나 제가 소나무를 다 사겠다고 하니까 ‘아니, 이렇게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 하나’ 어리벙벙해하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소나무들이 이렇게 굵고 높게 자랐으니 그저 고맙네요. 지금은 사려고 해도 못 삽니다.”

    그는 나무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고맙다 고맙다” 하면서도 “너무 컸으니 이젠 좀 덜 자라도 좋겠다”고 사람한테 말을 거는 듯했다.

    건물 아래 연못을 지나 내려오니 대형 돌로 쌓은 긴 돌담이 보였다.

    “초기 호암미술관은 좀 초라했어요. 건물도 일본식이었죠. 우리나라에 전문가들이 없으니 호암 회장님이 일본 사람들 불러서 일을 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일을 맡은 후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습니다. 영주 부석사에서 영감을 얻어서 메인 미술관 건물을 위로 바라보며 차근차근 올라가는 식으로 설계했어요. 초기에 개념 잡고 할 때 서울대학 조경과 교수로 계시던 유병림 선생님도 진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내시고 같이 일 열심히 하고 그렇게 했었어요.

    이 돌담들은 부석사 돌 쌓은 분들을 불러다가 나도 거의 매일 와서 지시하면서 쌓은 것입니다. 어느 날은 사다리 올려놓고 돌 사이사이에 흙을 한창 집어넣고 있는데 회장님이 와서 보시더니 씩 웃고 가시기도 했어요.”

    호암미술관의 장관은 미술관을 나와 건너편 호수 뒤 산에 펼쳐지는 사계절의 경치다. 기자가 올봄에 벚꽃이 만개한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했더니 그는 “다 회장님이 직접 산에 올라가서 지게꾼들에게 지시하면서 심은 것들”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산을 바라보면서 문득 ‘사람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이 올라왔다. 만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향유하고 있으니 새삼 감사와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희원’의 명물 석물들. 지호영 기자

    ‘희원’의 명물 석물들. 지호영 기자

    차경 원리를 보여주는 담장. 지호영 기자

    차경 원리를 보여주는 담장. 지호영 기자

    ‌희원은 전통 정원 조형미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풍경을 빌린다는 뜻의 ‘차경(借景)’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하고 석단, 정자, 연못, 담장 등 다양한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살렸다. 특히 정원 곳곳에서 만나는 석물(石物)은 볼수록 명품이다. 신라시대 석탑을 비롯해 이름 없는 석공들이 다듬은 불상, 벅수, 석등, 물확 등 귀중한 석조물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배치돼 정원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레 녹아들고 있다.

    ‘벅수’라 부르는 다양한 모양의 돌장승이 100여 쌍에 이르는데 그 옛날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인사를 하듯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희원 석물을 보면 공간과 썩 잘 어울려서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석물 배치는 원래 설계에 넣은 것이 있기도 하고 나중에 공사가 다 되고 난 다음에 거기에 맞춰서 다시 전시한 것도 있고 두 가지 방법으로 했어요. 2차 3차 4차 여러 번에 걸쳐서 했지요.

    여기가 좋을까, 무엇이 좋을까 관장님과 하나하나 상의하고 골라서 배치한 겁니다. 관장님이 얼마나 미감이 뛰어나신 분인지 제가 많이 배우며 일했습니다.”



    공부, 또 공부에 몰두했던 이건희 회장

    한 시간가량 정원 투어가 끝나고 안내센터 간이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이건희 회장님을 생각하면 마음속 깊이 존경한다는 말밖에 안 나와요. 회장님도 저를 많이 아껴주셨어요. 제 말이라면 뭐 콩이 팥이라 해도 믿어주셨죠.

    진입로를 바꾸는 건 큰 결정인데 그런 일을 비롯해서 나무 심는 일, 꽃 심는 일, 담 쌓는 일 회장님이 ‘마음에 안 든다’ 이런 말씀 전혀 안 하셨어요. 관장님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시고요. 제가 ‘뭐뭐를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죠. 그러니 참 미친 듯이 일하게 됩디다.”

    ‘이건희 회장’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정말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분이었죠. 뭔가 골똘히 생각할 일이 있으면 방 안에서 두문불출 나오지를 않고 당신이 해야 될 다음 단계의 일을 구상하고 생각하셨어요.

    저는 어렵지 않았는데 직원들은 정말 무서워했지요. ‘희원’ 때문에 보고하러 한남동에 간 적이 있는데 동행한 임원들이 방문 앞에서 우왕청심환을 먹어요. 그러면 제가 ‘효과가 있으려면 미리 드셔야지 지금 먹는다고 되겠느냐’고 농담을 던지던 일이 생각납니다.”

    왜 그렇게 어렵고 무서웠을까요.

    “이분들이 긴장하는 게 회장님의 질문 때문이었어요. 업무 자체를 물어보시면 얼마나 사전에 준비를 잘하고 업무에 몰두해 계신 분들이니 대답을 잘하겠어요.

    문제는 회장님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뚱딴지(웃음) 같은 질문을 하시니까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지요. 한마디로 혼(魂)이 나가는 거죠. 회장님은 똑같은 질문을 두 번째까지는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아도 봐주셨지만 세 번 같은 질문을 했는데 답을 못 하면 혼을 냈어요.”

    어떤 질문들이었을까요.

    “업무 보고하러 들어갔는데 갑자기 도자기에 대해 물으시는 거예요. 백자는 몇 도에 굽고 청자는 몇 도에서 굽느냐, 만드는 과정이 뭐가 어떻게 다르냐, 일본 것하고 우리 것 차이가 뭐냐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감당이 불감당이지.”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지키려 한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정영선 조경가. [허문명 기자]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고 지키려 한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억을 말하는 정영선 조경가. [허문명 기자]

    ‌제가 ‘경제사상가 이건희’ 책을 쓰면서도 적었지만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정말 깊으셨더라고요.

    “제가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일본에 유학 가서 공부하는데 살던 곳이 어느 유명한 부잣집이었나 봐요. 이 집에는 굉장히 큰 정원도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디디는 댓돌이 조선 여인들이 다듬이질할 때 쓰던 돌이라는 걸 알고 너무 속상하셨대요.

    일제 때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가져갔잖아요. 다듬잇돌도 그렇게 흘러갔을 테고요. 그런데 신발 놓는 댓돌로 쓰는 걸 보고 충격을 받으신 거죠. 귀하디귀한 우리 물건들이 엉뚱하게 쓰이는 걸 보고 열불이 났다는 거예요.

    귀국하자마자 ‘우리 것들을 외국에 팔지 말고 내가 살 테니까 나한테 다 가져오라’고 했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탑이다, 백자 항아리다 모든 것이 일본으로 마구 실려 나갈 때인데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장사꾼, 심지어 도굴꾼까지 몰려들었을 것 아닙니까.

    이제는 진짜냐 가짜냐 판단하는 게 중요해졌대요. 어느 날 호암 회장님이 ‘의심스럽다 생각되면 몇 개는 깨보라’고 했대요. 실제로 그렇게 했대요. 장사꾼들은 억만금을 받으려고 왔는데 그걸 마당에다 깨버리니까 얼마나 놀랐겠어요. 혼비백산한 거죠.

    근데 회장님이 깨뜨린 게 대부분 가짜였답니다.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지겠어요. ‘가짜를 가지고 저 댁에 가면 그 자리에서 깨버린다’는 게 알려지니까 그때부터는 장난을 못 치는 거죠.

    어느 날 호암 회장님이 ‘자네가 의심스러운 거를 잘 구분할 줄 아니까 이제 그만 깨도 되겠다’ 해서 그때부터 안 하셨대요(웃음).

    어떻든 회장님이 그렇게 문화재를 지켜서 이나마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밖에 있는 귀한 물건도 많이 가져왔어요. 그런 점에서 정말 애국자 중에 애국자셨죠. 회장님 아니었으면 우리나라 전통문화 자료가 이렇게 오롯이 버텨낼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지키고 사들이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일반 사람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회장님 하면 그냥 사업만 잘한 분으로 아는데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여력이 안 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 기업활동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고 그걸 정말 제대로 쓰신 분이죠.”

    열심히 하면 믿고 맡겨준 분

    호암미술관 호수에 설치된 현대미술가 장-미셸 오토니엘 작품. [허문명 기자]

    호암미술관 호수에 설치된 현대미술가 장-미셸 오토니엘 작품. [허문명 기자]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나요.

    “(혼잣말처럼) 어디서 처음 만났노. 한남동 댁에서 처음 뵀을 거예요. 방에서 계시다가 잠옷 가운 입은 채로 나와가지고, 아 이건 쓰지 마세요.”

    다른 분들도 비슷한 증언을 해서 이미 책에 썼습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옷 대부분이 잠옷”이라고 말씀한 적도 있고요.(웃음)

    “(따라 웃으며) 그런가요. 어떻든 처음 뵌 자리에서 보고를 하려는데 미술관이나 희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기억나는 게 있나요.

    “요즘 유기농에 관심이 많다며 ‘자네가 농과대학을 나왔으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전(前)은 이렇고 후(後)는 이렇습니다, 앞으로 바람직한 일이니 에버랜드, 그때는 자연농원이지요. 여기에서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죠. 회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렇지 그렇지’ 해서 유기농 농장을 만들게 하셨어요.

    막상 미술관이나 희원에 대해 보고하려고 하면 ‘자네가 이렇게 저렇게 알아서 잘할 줄 믿네’ 하며 끝이었어요. 어느 날 제가 ‘이제 이만큼 됐는데 한번 와보시겠습니까’ 했더니 ‘한번 가지’ 하시더니 며칠 뒤 새벽에 왔다가 가셨지요.”

    혼자서요?

    “네. 뭐 그런 스타일이었어요. 그러다 준공 하루 전날 본격적으로 와서 쭉 돌아보시는데 제가 모시고 다니면서 여기는 왜 이렇게 만들었고 저기는 왜 저렇게 했는지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회장님께서 호수 건너편 산에 심은 벚나무들이 미술관 앞에 서서도 잘 보이도록 지시하신 건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또 담은 어떻게 하고 뭐는 어떻게 하고 자세하게 말씀드렸지요.

    저는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지 않고 직원들을 통해서 어록을 넘겨받아 작업했는데 그 어록에 보면 구체적으로 지시한 게 나와요. 그걸 하나도 빼지 않고 차근차근 짚어 보고하니까 다 듣고 하시는 말씀이 ‘인간 컴퓨터네’ 했어요.”

    칭찬받아서 기분이 좋으셨겠어요.

    “내가 정말 그런 줄(인간 컴퓨터인 줄) 알아서 지금 이렇게 건방을 떨고 있잖아요(웃음). 칭찬받아 뿌듯한지 안 뿌듯한지는 모르지만 그저 무탈하게 보고가 끝났다 안도했지요. 회장님 표정이 좋았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요. 회장님이 ‘너 잘했다’ 이런 말씀은 안 하시잖아요. 그러면서 모든 일을 맡겼으니까.

    어떻든 당신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되 말씀대로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드렸는데 거기에 대해 뭐라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예를 들어 미술관 앞에 만든 커다란 호수에 분수를 두라고 했는데 ‘그건 전통 정원하고 맞지를 않아서 뺐습니다’ 했더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셨죠.”

    그런 믿음은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것이 바탕이 됐겠지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희원’이 끝나고 한남동 영빈관 공사도 했는데 담 처리를 전통 꽃문양을 넣은 ‘꽃담’으로 하고 싶은데 동네에 접한 길이고 차도 다니고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길이 좁으니 낮에는 동네 사람들에다 차들까지 막 다니니까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새벽 3시, 4시에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에 회장님이 불쑥 나오신 거예요. 밤새 잠도 안 주무시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거나 공부하고 계셨나 봐요. 저희를 보고 놀라면서 ‘왜 이렇게 일찍부터 일을 하느냐’고 해서 ‘이웃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될 것 같아 새벽부터 시작해 후다닥 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죠.

    그렇게 일하는 게 희원 만들 때도 그랬고 몇 번 들킨 거야(웃음). 그런 사소한 게 쌓이고 쌓여 믿어주신 거죠. 하여튼 제가 하는 일은 뭐든 무조건, 무조건 받아주셨어요. 저로서는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은 건데.

    “일이란 매사 그렇게 해야지요. 지금도 똑같아요.”

    건축가나 조경가는 의뢰인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잖아요. 더구나 이건희 회장 아이디어에 ‘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한다는 게 보통 사람은 엄두가 안 났을 텐데요.

    “저처럼 말하는 사람 별로 없죠(웃음). 무엇보다 회장님과 관장님이 전폭적으로 저를 믿어주고 위임해 주셨으니 정말 행복하게 일했습니다. 제가 복 받은 사람이죠.”


    1997년 ‘희원’을 만들 당시 홍라희 관장과 함께. [정영선]

    1997년 ‘희원’을 만들 당시 홍라희 관장과 함께. [정영선]

    희원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 공간인가요.

    “희원을 맡기 전까지는 아시안게임이다, 올림픽이다, 대전 박람회다 국립공원이다, 고속도로다, 농촌 주택 개발이다 다 정부 일만 했어요. 그러다 희원을 맡으니 정말 살 것 같았죠.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니까요.

    더욱 고마웠던 건 개막식 날 오신 거의 모든 분이 제게 일을 맡겼어요. 별장에, 사옥에, 연수원에 평생 일거리가 생긴 거지요. 희원은 나한테 뭐라카노, 모유지 모유(웃음).”

    생각만 하면 마음 아픈 회장님

    그는 이건희 회장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연구하시는 분, 공부하시는 분. 하고자 하는 사업이나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뼛속까지 검토해서 정말 밤새 연구하고 뭐 하나를 결정할 때 건성건성 결정하신 거는 없어요. 그렇게 온몸을 불사르셨으니 아무리 좋은 약을 먹고 운동한다 해도 몸이 버틸 재간이 없죠. 그래서 일찍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해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더구나 피 말리는 기업활동을 하면서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모든 걸 지키기 위해 큰 노력을 하셨잖아요. 시내에 현대미술관 짓고 또 필요하다면 또 뭘 하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 비싼 외국 작품들도 기회 있을 때마다 사 오고 그걸 또 기증하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주변 환경이 좋지도 않았잖아요. 재벌이 하는 일은 무조건 나쁘다고 험담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런 일들을 하느라고 얼마나 마음고생했을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얼핏 어디선가 미술관 연못에 잉어를 키우는데 잉어가 자꾸 죽는다고 했더니 이건희 회장께서 ‘잉어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회장님이 워낙 잉어를 좋아했어요. 한남동에도 연못이 있고, 여기에도 있는데 조건이 안 맞으면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 말씀을 드리니 잉어 입장에서 뭐가 어떻게 되는지를 좀 자세히 봐라, 물이 문제가 있는지 다른 것이 문제가 있는지. 회장님은 잉어에 대해서도 정말 많이 아셨어요.

    신기한 게 회장님이 연못 앞에 서서 박수를 딱딱 두 번 치면 잉어가 떼로 쫙 몰려왔답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랑’의 에너지를 금방 알아채니까요. 회장님은 살아 있는 꽃, 나무, 물고기 참 좋아하셨어요.”

    개도 좋아하셨잖아요.

    “맞아요. 여기 희원 땅이 비옥하게 된 것도 회장님 덕분이에요. 이 희원 일대가 360만 평인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요. 자연농원에서 돼지를 길러서 돼지 똥을 모아 퇴비로 썼다고 들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에버랜드가 지금은 울창하지만 처음에는 황폐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나무 다 심고 퇴비를 뿌리고 해서 지금 이렇게 된 거예요. 진짜 상상이 안 가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에요.”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점이다. 문득 그 옛날 여성 1호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조경은 그야말로 남자들의 영역이었을 텐데 여자로서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남녀 구별할 수가 없지 뭐, 나한테는 못 당하니까(웃음). 청주대학에 발령을 받아 내려가 교수 회의를 한다고 갔더니 다 남자야. 그 학교가 그래도 한강 이남 최고로 오래된 사립대학인데 웬 쪼끄만 여자가 딸랑딸랑 오니까 다들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더라고. 그러거나 말거나지 뭐. 여자라고 어쩌고저쩌고할 새도 없었어요.

    학교 창립자가 조경설계 새로 하자고 해서 학생들 데리고 신바람 나게 실습 겸 해서 같이 삽질하고 난리 쳐가며 정원 만들고 하니까 교수들도 어이없는지 가만히 놔둬 버리더라고요(웃음). 그다음부터는 여자가 더 잘하네 이래 되더라고요. 여자 화장실도 없어서 이사장님한테 좀 하나 해주세요 이랬던 시절이죠.”

    돌아보면 제일 힘들었던 때가 당연히 있으셨겠죠.

    “힘들었다는 생각은 별로 없어요. 일하는 와중에 남편이 오랫동안 아파가지고 간병하랴 일하랴 울면서 돌아다니던 시절이 힘들었지 그 외에는 뭐. 하지만 회사 운영하다 보면 저라고 어려운 일이 왜 없겠어요. 하지만 일은 무조건 즐겁게 해야 됩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