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울타리 안에서 계열사 나눠 맡는다”
- “사재 털어 SKC 지분 늘린 이유는…”
- “선친의 기업가 정신 제대로 안 알려져 아쉬움”
- “조금만 더 사셨어도 SK는 훨씬 더 커졌을 텐데…”
- “내게 워커힐호텔은 숙원의 대상”
○1952년 경기 수원 출생 <br>○경희대 경영학과, 미국 브랜다이스대 경영학과 졸업<br>○1981년 선경인더스트리 입사 <br>○(주)선경 전무·부사장, SK유통 부회장 <br>○現 SKC 회장, SK텔레시스 회장
최종건 회장은 1953년 적산(敵産)기업인 선경직물을 인수해 창업한 이래 20년간 기업을 일구면서 SK그룹의 토대를 닦은 인물. 그러나 SK가 막 대기업의 면모를 갖춰가던 1973년 젊은 나이(48세)로 타계했고, 이후 동생인 최종현(崔鍾賢·1929~1998)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최종건 회장은 3남4녀를 뒀지만, 당시 자녀들이 어려 기업 경영에 나설 처지가 못 됐다. 1998년 최종현 회장이 사망한 뒤엔 그의 장남인 최태원(崔泰源·48) 현 SK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경영권이 넘어간 것이다. 최태원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崔再源·45) SK E&S 부회장도 경영에 참가했다.
최신원 회장은 ‘큰집’인 최종건 회장가(家)의 차남이다. 장남인 최윤원(崔胤源·1950~2000) 전 SK케미칼 회장은 일찌감치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일임한 뒤 50세 되던 해 세상을 떴다. 최신원 회장은 이때부터 양쪽 집안의 장형 노릇을 하며 가족사를 챙겨왔다.
최종건 창업 회장(좌)최종현 2대 회장(우)
“책임경영 위해 지분 늘렸다”
▼ 최 회장과 최창원 부회장이 SKC와 SK케미칼·SK건설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확보했습니다. 분가를 위한 준비작업이라고 봐도 될까요.
“SK가(家) 2세들인 우리 4형제가 앞으로 계열사를 나눠 맡는 것은 분명합니다. 최태원 회장은 그룹을 전반적으로 잘 이끌고 있고, 최재원 부회장은 가스 등 에너지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최창원 부회장은 건설과 케미칼을 중심으로 신규사업 개척에 열심이고요. 저는 SKC와 SK텔레시스를 통해 화학사업과 IT 소재부품사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서비스·레저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있죠. ‘분가’라기보다는 각자의 사업영역에서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해가고 있다는 것이 옳겠지요. 그러니 ‘준비작업’이라는 것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 ‘각자의 영역’이 분명하게 나눠진 건 맞습니까.
“지금은 확실하게 답할 단계가 아닙니다. 아직 몇 가지 절차가 남아 있어요. 조만간 ‘합의’가 끝날 겁니다.”
▼ 형제·사촌형제 경영인들과 자주 만납니까.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눕니까.
“제사 등 집안 대소사가 많아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그럴 때는 사업 얘기보다는 일상사나 가족과 관련된 대화를 주로 나눕니다. 그룹 경영상황은 지주회사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듣고 있으며, 굵직한 현안이 생기면 최태원 회장과 협의합니다. 우리 형제들은 선대의 전통대로 불협화음 없이 우애와 믿음으로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요.”
최태원 SK 회장(좌)최재원 SK E&S 부회장(중)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우)
“스톡옵션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내 사재를 털어서, 또 은행대출을 받아서 하나하나 사모은 겁니다. 몇 년 전 지인이 ‘회장이란 사람이 어떻게 지분이 한 톨도 없을 수 있느냐’며 황당해 합디다. 틀린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차 싶어서 그때부터 사 모은 게 이제 3.08%가 됐는데, 15% 정도까지는 늘려갈 겁니다. 그쯤 돼야 안정적으로 책임경영을 할 수 있고, 만에 하나 있을 지 모를 적대적 M&A 시도에도 대비할 수 있거든요. 우리가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오너가 책임지고 회사 경영에 매진하겠다는 의미가 있으니 직원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죠. 그런 뜻으로 봐 주면 좋겠어요. 이렇게 모은 주식은 훗날 고생하는 우리 직원들에게 나눠줄 생각입니다.”
SKC의 한 관계자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분가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전체 계열사가 SK텔레콤과 SK에너지를 양대 축으로 수직계열화해 있어 이 라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 기업의 사세(社勢)가 약화되는 것은 불 보듯 하다는 것. 예컨대 SK텔레콤 기지국 건설이나 SK에너지 시설 공사가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SK건설이 굳이 ‘마이웨이’를 선언할 까닭이 있겠느냐는 얘기다. 그는 “SK라는 막강한 브랜드파워를 포기하면서까지 무리하게 분가해 나갈 형제는 없다”며 “한 울타리 안에서 영역의 독립성을 인정받고, 필요할 경우 ‘코디네이션’을 수용하는 형태의 책임경영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신원 회장(왼쪽)이 지난해 7월 해병대 극기훈련을 받고 있다. 최 회장과 그의 형인 고 최윤원 회장은 선친의 권고에 따라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 올해는 최종건 창업 회장의 35주기이자 최종현 2대 회장의 10주기가 되는 해인데, 창업 회장의 업적은 2대 회장의 그것에 가려 상대적으로 빛이 약하다는 느낌입니다. 2대 회장이 SK텔레콤과 SK에너지를 일으켜 그룹을 급성장시켰기 때문일 텐데, 아들의 처지에선 이런 상황이 좀 섭섭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선친의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늘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한 겁니다. 형님이 세상을 뜨셨으니 마땅히 제가 맡아야 할 일이죠. 선친은 폐허에서 맨손으로 기업을 세우고 한국 최고의 섬유회사로 키워낸 거목이셨습니다. 패기, 도전정신, 일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한번 결정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면모였죠.
무엇보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선경석유를 설립하고 워커힐호텔을 인수한 것은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SK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신 겁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느라 급급하던 그 시절에 정유사업과 레저사업을 구상했다는 건 놀랍지 않습니까. 워커힐 앞에 72홀짜리 골프장을 지을 생각까지 하셨으니…. 그런 안목과 추진력이 오늘날 SK그룹의 굳건한 뿌리가 됐다고 봅니다. 선친께서 ‘판’을 다 벌여놓고 가신 거죠. 조금만 더 오래 사셨어도 SK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했을 겁니다.”
▼ 선친과 2대 회장에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게 공통점입니다. 선친은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경영철학으로 사람에 대한 투자와 신뢰를 아끼지 않으셨고, 2대 회장도 인재양성에 뜻이 커서 교육에 관심이 깊으셨죠.
그렇지만 성격은 정반대였어요. 성미가 급하고 배포가 큰 선친은 앞날을 내다보며 신규사업을 적극 개척해나가는 스타일이고, 꼼꼼한 성격인 2대 회장은 치밀한 회사운영과 자금관리로 내실을 충실하게 다진 뒤에 이를 바탕 삼아 외부로 진출하는 스타일이었죠. 두 분이 서로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이상적 경영체제였다고 봅니다.”
▼ 군 복무시절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을 남기시던가요.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특별휴가를 얻어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죠. ‘네 해병대 모자가 참 잘 어울린다. 나는 괜찮으니 다시 들어가야지?’라고 하셨어요. ‘우리 집안이 폐와 위가 안 좋으니 건강 잘 챙겨라, 네 형한테도 꼭 전해주고…’라고도 하셨고. 그때 형님은 미국 유학 중이었는데, 부친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으면 공부를 안 마치고 귀국할까 봐 현지 지사에다 형님 여권을 따로 보관하라고 지시하셨거든요. 작은아버지(최종현 회장)께는 ‘우리 윤원이를 잘 부탁한다, 다음에 크게 될 인물이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이제 내 아들은 5명”이라며 두 아들과 세 조카가 각자 공부를 마치는 대로 계열사를 돌며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또 사장단 회의와는 별도로 이들 5명과 매월 가족회의를 열고 그룹의 주요 사안에 대해 토론하며 경영능력을 테스트했다. 아들과 조카를 가리지 않고 자질이 있으면 전문경영인으로 키우고, 그렇지 못하면 대주주 자격으로 경영을 측면지원하게 한다는 구도였다.
화학·필름·파인세라믹
▼ 워커힐호텔은 선친께서 마지막으로 인수한 것이라 애착이 특별하겠군요.
“워커힐 인수가 결정되던 날, 아버님이 퇴근길에 태극당에서 케이크를 사다주시며 싱글벙글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또 워커힐 빌라에 계시다 서울대병원으로 모신 뒤 세상을 뜨셨으니 워커힐이 우리 가족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죠. 선친께선 워커힐을 인수하신 뒤 경영의 밑그림만 그리다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제게 워커힐은 관광 및 레저산업에 대한 선친의 꿈을 실현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숙원의 대상이자 유산입니다. 요즘 국내외 경제사정으로 호텔사업이 부진한 편이지만, 워커힐의 자연친화적인 주변환경을 살려 차별화된 마케팅을 펼친다면 지금보다 훨씬 경쟁력 있는 호텔로 거듭나리라 믿습니다.”
최태원 SK 회장은 2003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 이후 자신의 워커힐 지분을 SK네트웍스에 무상출연했다. 이에 따라 현재 워커힐 지분은 SK네트웍스가 50.4%, SKC가 7.5%를 보유하고 있다.
▼ SKC는 최종 소비재를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일반인에겐 그리 친숙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이가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만드는 회사로 알고 있을 텐데, 지금은 사업구조가 완전히 탈바꿈했더군요.
“제가 회장으로 부임한 2000년은 외환위기 후유증이 한창이었습니다. 주력사업인 비디오테이프 등 미디어사업이 한계에 이르러 기업의 외형은 물론 재무적으로도 돌파구가 절실한 시점이었죠. 그래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했습니다. CD사업에서 철수하고 비디오테이프사업을 분사시키는 등 수익성이 떨어진 사업을 정리했어요.
반면 핵심사업은 꾸준히 확장했습니다. 화학사업에선 PO(프로필렌옥사이드) 생산규모를 연 28만t 규모로 늘렸고, 필름사업에선 비디오테이프용 필름 생산라인을 디스플레이 소재인 광학용 필름 생산라인으로 전환시켜 수익성을 개선하고 열수축 필름, 생분해 필름, 태양광용 필름 등 친환경소재로 사업의 중심을 옮겨왔습니다. 2007년엔 디스플레이 소재사업을 분사, 미국 롬&하스사(社)와 제휴합작한 SKC하스를 설립해 세계 일류의 디스플레이 소재기업으로 변신시켰죠. 또 그해 연말엔 반도체 실리콘 소재 등을 생산하는 솔믹스사(社)를 인수해 파인세라믹 사업에도 진출했습니다.”
PO는 자동차 내장재, 냉장고 및 LNG 선박용 단열재, 건축용 자재, 합성수지, 페인트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산업용 기초원료로 해마다 5% 이상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SKC가 지난 8월 준공한 PO 공장은 HPPO(과산화수소를 이용한 PO 제조) 공법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해 관련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존의 공법으로 PO를 만들면 SM(스티렌모노머)이 부수적으로 생산된다. 그런데 SM은 수요가 거의 없어 재고가 누적될 뿐 아니라 이 공법에선 염소를 사용하기에 환경문제를 유발한다. 이에 비해 HPPO 공법은 PO만 생산하므로 경제적이고 환경친화적이다. SKC는 HPPO 상용화에 따라 연 2000억원 이상의 수입대체효과와 600억원의 수출증가를 전망하고 있다.
열수축 필름이란 것도 재미있다. 요즘 나오는 일부 소주엔 예쁜 그림이 그려진 비닐이 병목에서 바닥까지 감싸고 있다. 이게 열수축 필름인데, 그저 장식용이 아니라 소줏병과 밀착돼 있어 병이 깨져도 조각이 튀지 않도록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만취한 술꾼이 소줏병을 휘둘러도 가벼운 타박상 정도지, 치명적인 자상(刺傷)을 입히진 못할 것 같다.
자식 앞세운 모친 생각에 금연
▼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가 실물경제로까지 번지고 있습니다. 다가올 ‘추운 겨울’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자금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축적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R&D를 강화하면서 신성장산업을 겨냥한 M&A 기회도 잘 포착해야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 절대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가령 제가 환율상승을 예상해 HPPO 공장 준공을 예정보다 7개월 앞당겼는데, 덕분에 1달러에 900원 할 때 대부분의 비용이 지출됐어요. 투자액이 2000억원 이상이니 얼마를 절감한 겁니까. 이처럼 원가경쟁력, 기술력, 글로벌 마케팅 능력, 신사업 발굴능력 등을 수시로 점검하면서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갈 것입니다.”
▼ 소문난 ‘골초’셨는데 한순간에 금연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하루 2갑 이상 피웠죠. 아버님이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형님마저 후두암으로 잃은 후 자식을 앞세운 어머님의 심정을 생각하니 이런 불효도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룻동안 담배를 참아보니 7개비를 피웁디다. 아, 이 정도면 나도 끊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그 이튿날부터 완전히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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