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종전선언 ‘재탕’은 남북의 ‘오징어 게임’?

북한엔 비핵화 면죄부, 관련국에 책임지우고…[백승주 칼럼]

  • 백승주 국민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원 kidabsj@gmail.com

    입력2021-10-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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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탕’ 종전선언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

    • 안보 불안정이 종전선언 부재 탓이라는 文

    • 평화프로세스의 허구, 유엔 연설 통해 자인

    • 하든 안 하든 국민과 무관한 정치적 종전선언

    • 여러 번 속으면 속는 사람이 문제

    ‘오징어 게임’의 상우와 알리. [‘오징어 게임’ 화면 캡쳐]

    ‘오징어 게임’의 상우와 알리. [‘오징어 게임’ 화면 캡쳐]

    ‘종전선언’을 주제로 원고를 준비하던 중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황 감독이 만든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서 병자호란이 종전되는 과정에서 당시 역사의 주인공들을 치열하게 묘사한 장면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황 감독에게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서 남북한과 주변국 지도자들과 닮은꼴 캐릭터를 묻고 싶었다. ‘남한산성’은 한반도 역사의 비극적 장면의 정점에 있는 병자호란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다. 조선 조정이 굴욕을 감내하고 위신을 유지하려는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을 위해 피눈물을 삼키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위정자들의 군상이 잘 묘사돼 있다. 황 감독에게 오징어 게임 게스트들의 캐릭터와 남북한 지도자들의 캐릭터를 비교해 달라고 하면 어떤 대답을 할까.

    ‘오징어 게임’ 구슬치기, 1대 1 데스매치

    ‘오징어 게임’을 본 사람들의 감상평은 각자 조금씩 다를 것이다. 직업이나 인생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필자에게는 제6화 ‘깐부’에 나오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참가자들은 ‘팀전’을 예상하며 신뢰하는 사람과 짝을 이룬다. 상우(박해수 분)는 평소 필요에 의해 신뢰를 쌓아온 외국인 알리(아누팜 트리파티 분)를 선택한다. 2인 1조의 구슬치기 게임이자 1대 1 ‘데스매치’다. 상우는 평소 쌓아온 신뢰를 이용해 감언이설로 알리를 속인다. 속임수로 알리의 구슬을 뺏고, 구슬을 조약돌로 바꿔치는 방법으로 게임에서 승리한다. 착한 알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남북관계 문제에 천착해 온 필자는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동안 한반도에 다시 일고 있는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미풍에 주목했다. 한반도 위에서 펼치는 구슬치기 게임. 그 시작은 9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었다.

    문 대통령은 대선을 5개월여 앞둔 9월 22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종전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입구’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두 해 전, 이 자리에서 전쟁불용과 상호 안전보장, 공동번영을 한반도 문제 해결의 세 가지 원칙으로 천명…지난해에는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되었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한국전쟁 당사국들이 모여 ‘종전선언’을 이뤄낼 때, 비핵화의 불가역적 진전과 함께 완전한 평화가 시작될 수 있다.”



    이처럼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는 그의 한반도 정세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종전선언이 없는 탓에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완전한 평화가 시작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안보 불안정이 종전선언 부재 탓인가. 북한 핵 폐기라는 용어 대신에 ‘주어 없는’ 비핵화라는 용어도 마뜩잖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핵 폐기와 동의어가 돼야 하는데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연설에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문 대통령은 임기 내내 평화프로세스를 진행시켰지만 평화의 입구에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음을 스스로 유엔 연설을 통해 자인한 셈이다. 종전선언 관련국들 모두에게 비핵화 책임을 지우고, 북한에는 면죄부를 주겠다는 인식의 일부도 엿볼 수 있다.

    남북 정상에게 만들어준 달콤한 선물, 종전선언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 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은 왜 이 시점에 유엔으로 달려가 종선선언이라는 ‘재탕 메시지’를 내놓았을까. 남은 임기 중 종전선언을 성사시켜 한반도 평화와 한반도 비핵화의 기반을 다지려는 거룩한 의욕 때문일까.

    문 대통령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에 합의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남북합의서 3조 ③항(북과 남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 남, 미 3자 또는 북, 남, 중, 미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에 따르면, 남북은 이미 종전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에 종전선언 합의를 지키기 위해 4항(북과 남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조선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에 담긴 비핵화 약속을 지키라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 온당하다.

    여기에 종전선언 제안과 관련국의 우호적 반응으로 만들어질 한반도 정세가 정권 재창출을 위한 차기 대선에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남북합의서 조항뿐 아니라 문 대통령은 당시 합의서 발표 연설을 통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통해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 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기로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당시 합의는 한반도 비핵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종전선언을 위한 미국과 중국 등 관련국의 새로운 외교적 조치도 유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2018년 남북 정상들의 종전선언 합의는 남북 지도자들에게 달콤한 정치적 선물을 만들어줬다. 문 대통령에게는 합의 2개월 후에 열린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전무후무한 압승을 가져다줬고,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국제정치적 위상을 업그레이드시킨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가져다줬다.

    한반도 종전선언이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된 것은 2006년 11월 18일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The US is willing to declare the formal end to the war and establish a peace treaty, if North Korea abandons its nuclear weapons program)고 제안했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긴장된 분위기에서 부시 대통령이 직접 종전선언을 언급한 것은 대북정책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해석됐고, 북한 및 관련국들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종전선언이라는 거품

    당시 미국의 ‘종전선언’ 제안 배경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됐다. 첫째,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을 준비하려는 치밀한 외교적 제안으로 볼 수 있다. ‘종전선언’이 평화협정의 전 단계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제1차 북·미 실무회의에서 북·미관계의 조기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의지가 천명됐다는 점이 고려된 것이다. 이는 1996년 2월 북한 외교부 대변인 담화에서 밝힌 ‘잠정협정’ 제안에 대한 화답의 성격이었다. 1996년 2월 북한 외교부는 완전한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정전협정을 대신해 안전질서 유지와 관련된 문제와 공동군사기구의 조직 및 운영 문제 등을 다룰 북·미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했었다.

    둘째, 북한이 2006년 10월 6일 1차 핵실험 이후 상황 악화 조치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 반전을 선택할 것이냐를 고민한 북한 당국에 새로운 선택의 명분을 주는 전술적 제안이었다. 부시 대통령 이후 역대 미국 정부는 북한 핵 폐기에 도움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잣대로 종전선언 문제를 다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현재 남북한과 미국 당국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종전 상태가 아니라 ‘전쟁이 중지된 상태’ ‘기술적으로 교전상태’로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 두 차례 서해교전과 정전협정 위반을 고려할 때 적대행위가 중지됐다고 볼 수도 없다. 국제법적으로 정전협정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지만, 남북은 68년간 전면전 대신 평화가 유지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종전선언의 거품이 있다. 지금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은 ‘진행 중인 전쟁의 중단’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정치적 선언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진행된 종전선언 합의가 종선선언이 거품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남북이 종전선언을 하든 안 하든 국민의 일상생활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종전선언 ‘재탕’에 거는 김정은의 기대

    북한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6주년을 맞아 10월 11일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을 개막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당 총비서가 기념연설을 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2일 보도했다. [평양노동신문=뉴스1]

    북한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6주년을 맞아 10월 11일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을 개막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당 총비서가 기념연설을 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2일 보도했다. [평양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위원장은 9월 29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해 “종전을 선언하기에 앞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보장되고 타방에 대한 편견적인 시각과 불공정한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들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중요한 것은 종전선언에 대한 김정은의 반응이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김정은은 2018년 4·27판문점 선언에서 종전선언에 합의했고, 당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현재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에 큰 차이는 없다.

    따라서 문 대통령의 유엔 연설에 대한 김정은의 반응에는 다음 몇 가지 기대가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종전선언을 매개로 바이든 정부와 직접 대화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지도자를 만나지 않고는 북한을 옥죄어 오는 대북제재의 압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 담판하고, 속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종전선언 논의를 통해 문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돕는 게 대남전략상 불리하지 않다. 지난 4·2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확인된 민심과 정권교체에 대한 높은 여론을 감안하면 문재인 정부의 정권 재창출에 적신호가 켜져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문재인 정부를 돕는 게 생존전략에 유리하다. 셋째, 어떠한 합의를 해도 언제든지 합의를 파기할 수 있고,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다. 개성공단 남북공동사무소를 폭파해도 이후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데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김 위원장은 선대가 만들어놓은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종전선언을 하면 당연히 유엔사령부 해체를 주장하고, 정치적으로 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등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요구를 북한 핵 폐기 전제조건으로 만들어 핵 보유 논리를 강화할 것이다. 당연히 한반도 전체를 북한식 체제로 전환하는 정치군사적 조건을 완성해 가려 할 것이다.

    알리를 속인 상수와 북한의 대남 위정자

    임기 말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미국과 북한 등 관련국들의 대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바이든 정부의 반응은 차갑게 느껴진다. 유엔 연설을 위해 뉴욕까지 간 문 대통령은 같은 시기 뉴욕에 있는 바이든 대통령과는 정상회담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이 ‘코로나19를 이유로 문 대통령의 유엔 방문을 말렸다’는 일부 언론보도도 있었다. 지난 4년 6개월간 추진해 왔지만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종전선언이 문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다시 황동혁 감독에게 ‘알리를 속인 상수라는 캐릭터와 북한의 대남 위정자가 닮았는지’ 묻고 싶다. 그렇다면 상수에게 속고, 이역만리 떨어진 가족을 그리다 죽은 알리는 누구를 닮았을까. 대한민국은 ‘오징어 게임’의 알리가 돼서는 안 된다.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문제이지만, 여러 번 속으면 속는 사람이 문제이다. 평범한 속언이지만, 외교에서는 금과옥조가 돼야 한다.

    #종전선언 #문재인대통령 #오징어게임 #신동아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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