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영애의 죽음을 다룬 ‘신여성’ 1933년 9월호 기사, 왼쪽 사진은 정성진과 윤영애 부부.
보름 남짓 입원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윤영애는 남편과의 추억이 곳곳에 서린 무교정 신혼집 대신 당주동 친정집에 머물며 신변을 정리했다. 무교정 신혼집에 살고 있는 시부모와 가끔 만나 남편의 유품 처리를 상의하는 것 외에는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도록 당주동 친정집 부근에서는 밤이면 구슬픈 울음소리와 한 맺힌 하소연이 들리곤 했다.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태어나 고학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지 1년 만에 죽은 남편이 유산을 남겼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끼니를 걱정할 만큼 생활고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윤영애의 친정은 수원에서 손꼽히는 유지였다. 무교정 신혼집 역시 친정오빠 윤태종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먹고 입을 걱정이 없는 처지였지만, 언제까지고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혼으로 포기한 사회생활에 대한 미련도 컸거니와 집안에 갇혀 지내니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운명에 대한 번뇌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윤영애는 미용실이나 양장점을 차려서 사는 재미를 붙여볼 결심을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의욕적으로 사업구상도 다듬어 나갔다. 여학생 시절의 씩씩하고 쾌활하던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 안타깝고 괴로운 기록이 가득 찬 일기장과 노트도 불살라버리고, 친한 친구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완고한 오빠가 ‘먹고 입을 것 걱정 없는데 여자가 무슨 장사냐’며 양장점을 내는 데 반대해도 싫은 내색 없이 차분히 설득했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된 7월 중순, 윤영애는 불면증이 생겨서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자기가 불편하다며 평소에 쓰지 않던 뒷방을 치우고 혼자 지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각방을 쓴 이후에도 윤영애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돕거나 친구를 만나러 외출했고, 여가 시간에는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었다. 밤늦도록 자지 않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7월27일, 좀처럼 늦잠 자는 일이 없던 윤영애는 아침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방문을 열어보니 윤영애는 자리에 누워 신문을 읽고 있었다. 윤영애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밥 생각이 없네요. 어머니 혼자 식사하세요.”
어머니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30분쯤 후, 윤영애의 방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황급히 방문을 열었을 때, 그날 아침 윤영애가 한 움큼 집어삼킨 칼모틴의 독 기운은 이미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불면증 치료에 쓴다고 받아온 수면제를 목숨을 끊는 데 써버린 것이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해보았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는 청상과부의 자살 소식이 짤막하게 실렸다.
27일 오후 2시경 시내 당주동 113번지 윤태종의 누이동생 윤영애가 칼모틴을 다량으로 복용하고 신음하는 것을 집안사람이 발견하고 즉시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조치를 베풀었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윤영애는 작년 봄에 결혼한 후 불과 1년도 못 되어 그의 남편이 죽었음을 비관해 자살한 것이라 한다. (‘청상 자살’, ‘동아일보’ 1933년 7월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