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론적으로 보면 시간이란 언어와 별개인 자연과학의 개념이다. 인간은 이러한 시간을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이 일단 멈추어 있다고 가정해 시간적 구분을 문법적으로 표시하는 제도인 시제(時制)를 만들어 언어활동에 활용하고 있다.
시간의 개념은 범세계적이지만 시제는 언어마다 다르다. 영국이나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미국이나 한국은 민주공화제를 정치제제로 채택하고 있는 것처럼, 영어는 12시제를, 국어는 3시제를 채택하고 있다. 불어는 영어보다 시제가 더 많다. ‘시제일치’법칙에서도 영어와 국어는 차이를 보인다.
‘예’
I think that he is good.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I thought that he was good.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o)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 (x)
▼ Time(실제 시간)과 Tense(명목 시간)
실질적 시간(time)과 명목적 시제(tense)를 구분할 줄 알아야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시제는 실질개념인 시간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런 예다.
(1)의도적으로 조작된 시제
우리의 언어습관을 살펴보자. 훌륭한 어구나 전하고 싶은 표현을 전할 때 쓰는 한문(漢文)투의 말 ‘가라사대’ ‘가로되’ ‘曰(왈)’은 ‘말하기를’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예수는 약 2000년 전 사람이고, 공자는 약 2500년 전 사람인데도 마치 지금 생존해서 말하는 것처럼 현재형을 쓴다는 사실이다. 말하는 사람이 시간 개념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듣는 사람의 착각(錯覺)을 유도한다. 이것을 ‘과거의 현재화’라고 하며 읽는 이 또는 듣는 이에게 생생한 느낌을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Jesus Christ say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Confucius says water which is too pure has no fish.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다. 공자는 ‘수지청즉무어(水至淸卽無魚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인간만사에서 미래의 일은 예측불허의 불확실한 사실이다.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재의 일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인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1880)는 I doubt about everything, even about my doubt(나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심지어 나의 의심까지)라고 말했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일이다. 국어나 영어나 내일 일어날 일을 현재로 끌어와서 내일이 현재인 것처럼 현실적 미래를 심리적 현재로 둔갑시킨다. 미래의 일을 현재로 서술하는 것은 확실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 조작으로 미래의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면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 I‘m dead(나는 이미 죽었어)라고 말한다.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가? 엄밀히 말해서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죽음이 확실하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동서를 막론하고 특히 대화에서 미래의 일을 말하는 데 미래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시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