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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이동식씨 “군용 트럭에 실려온 문드러 진 토막 시신들, 한나절 파묻고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었지…”

  •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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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형수 묘역 근처에 얕게 파묻어
  • ●“인천에서 난동 부린 군인들”이라고 들었다
  • ●지금도 파면 유골 나올 것
  • ●유족들 “신빙성 있다. 발굴해보자”
  • ●국방부, “신빙성 의문, 희생자 신원 확인이 먼저”
실미도 사건 희생자 ‘암매장’ 증언
“인천 어딘가에서 훈련받던 군인들이 서울로 쳐들어오다가 폭탄을 터뜨렸다고 그랬어. ‘아주 나쁜 놈들’이라고 하대. 시신 상태가 엉망이었지. 살은 다 문드러지고 피는 줄줄 흐르고…. 그걸 다 파묻고 나서 며칠 동안 밥도 못 먹었다니까.”

1971년 ‘실미도 사건’으로 서울 대방동에서 자폭한 훈련병들의 시신을 자신이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대북침투 목적으로 창설된 특수부대인 실미도 부대. 실미도 부대는 그후 3년간 대북침투용 ‘살인병기’를 만들기 위한 혹독한 훈련에 반발한 부대원들의 집단 반란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희생자들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실미도 사건 희생자들을 자기 손으로 암매장했다고 밝힌 사람은 올해 84세의 이동식(경기 고양시 벽제동)씨다. 이씨는 지난 3월6일과 12일 ‘신동아’와의 두 차례 인터뷰에서 “1971년 8월, 나를 포함해 15명 정도의 작업 인부가 동원돼 20여구의 무연고 시신을 고양시 벽제동 벽제시립묘지 1구역 주변에 암매장했다”고 밝혔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산하 실미도 진상조사단도 지난 2월 말 이씨를 면담하고 현장조사를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동식씨가 지목한 장소는 현재 묘역이지만 당시에는 정식 묘지가 거의 없는 야산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 663번지. 고양시 고양동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315번 지방도로상의, 이른바 ‘됫박고개’ 조금 못미친 길가에 있는 한 묘역이다.

이곳에서 100m쯤 떨어진 아래쪽에는 서울구치소에서 관리하는 무연고 사형수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사형수나 사망 재소자 중 시신을 인수할 유족이나 연고자가 전혀 없을 경우 가매장하는 곳으로 현재 19기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이 사형수 묘역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1970년 이전에 조성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군 당국이 자폭해 숨진 실미도 희생자들의 시신 처리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존 무연고 사형수 묘역에 인접한 이곳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씨는 1921년생이다. 실미도 사건이 발생한 1971년 당시 나이는 50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10년간 벽제시립묘지 작업반에서 일했다. 이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더운 8월 어느 날이었지. 아침에 일하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까 길 옆 언덕에 관이 잔뜩 쌓여 있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아카시아를 베어낸 뒤 구덩이를 파고 젊은 사람들은 관을 져서 날랐지. 그런데 평소에 들어오던 시신들과는 뭔가 달랐어.”

소나무 판자를 대강 못질해 만든 관 모양새며, 못질한 틈새로 핏자국이 낭자한 것을 보더라도 직감적으로 뭔가 사연이 있는 시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장 지휘는 당시 묘지관리소장인 한모씨(사망)가 했다.

이씨는 “당시 현장에서 군용 트럭도 봤다”고 밝혔다. 작업 도중 현장 관계자의 입에서 “시신이 더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형 군용 트럭이 도착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트럭 짐칸에는 가마니에 덮인 관이 3~4개 있었고,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관들을 내려놓자마자 부리나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역겨운 냄새에 도망치기도

이동식씨 증언의 신빙성을 검증하기 위해 좀더 자세한 현장 설명을 부탁했다. 이씨는 묘역이 시작되는 입구에 서서 315번 지방도 옆의 빈 땅을 가리키며 “저기서부터 출발해 논두렁길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내려놓고 파묻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대로라면 지게를 지고 100m 정도 논을 가로질러와 야산 초입에 시신을 묻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씨가 지목한 지점 주변에는 1985년에 조성한 개인 묘지 5~6기가 들어서 있다(그림 참조).

당시 이 지역 주변에는 아카시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아는 뿌리의 번식력이 너무 강해 묘지 주변에는 심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아카시아 뿌리가 시신을 훼손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씨는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니까 남들이 다 꺼려하는 아카시아 숲 주변에 묻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시신이라면 몸을 깨끗이 씻어 주요 부위를 묶는 염습을 한 뒤 입관(入棺)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실미도 훈련병들의 시신은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길에서 군경과 대치하다 자폭한 뒤 극비리에 처리됐기 때문에 이러한 장례절차를 제대로 거쳤을 리 없다. 이씨는 당시 시신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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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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