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의혹의 안기부 수사 20일, 자살시도, 그리고 실종20년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3-10-27 18: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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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뒤 저희 아버지는 다니시던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일년 동안 엄마를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셨습니다. … 새벽녘이면 숨죽여 흐느끼던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저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
    • 유골이나마 찾아 뼛조각 하나하나에 입맞추며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랫동안 고민한 듯, 사건진정 마감을 사흘 남겨둔 2000년 12월29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에 접수된 한 통의 진정서는 그렇게 끝맺고 있었다. 읽어본 조사관들이 숙연해질 정도로 사연은 절절했다.
    • 정여인은 과연 간첩이었나.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나꼭 나가봐야 돼. 너는 절대로 따라오지 마.”1983년 12월15일 밤 9시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여동생 집에 머물고 있던 한 중년여성이 딸과 현관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배가 아파 약국에 간다”고 말하던 엄마는 “내가 사다주겠다”는 딸의 대답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사실은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와서 빨리 가야 한다”고 말을 바꾼다.

    “나도 같이 가요, 응? 몸도 성치 않으면서 추운데 어딜 혼자 가요.”

    “중요한 일이라 혼자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알았지? 절대로 따라오지 마!”

    평소와 달리 화를 내며 쏘아붙이고는 급하게 현관을 빠져나가는 엄마. 이날 따라 자꾸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불안해진 딸은 바로 뒤를 쫓아나갔지만 골목 어디에서도 엄마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을 만나고 있을 만한 인근의 다방과 제과점을 모두 뒤졌지만 흔적도 없었다. 순간 ‘지금 놓치면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맥이 탁 풀린 딸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후 20년.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전국을 누비며 찾아헤맨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낱 같은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사라진 여인의 이름은 정은복. 마흔여덟 살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월북자의 딸, 간첩의 조카’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검거한 대남공작원들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던 정경희가 1970년대 남파되어 공작활동을 벌였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80년대에는 이선실, 70년대에는 정경희’라 할 만큼, 그는 노동당 중앙위 연락부장을 맡으며 대남공작사업을 진두지휘한 ‘전설적인 존재’였다. 이런 정경희가 남한에 다녀갔다는 것, 그런데도 검거는커녕 다녀간 사실조차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것은 안기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였다. 더욱이 당시는 각종 조직사건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 했던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정경희는 본래 대구 출신으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월북한 인물. 1983년 가을 안기부는 남한에 살고 있는 정경희의 가족과 친척들을 연행해 남산 청사에서 조사를 벌이기 시작한다. 대구에 살고 있던 정경희의 친형제는 물론 역시 월북한 정경희의 오빠가 남겨둔 딸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한 날 한 시에 가족 대부분이 지하 조사실에 구금됐다. 정은복씨는 정경희의 조카였다.

    아버지의 월북 이후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상경한 정은복씨는 가족을 보살피면서도 이화여대 국문과에 진학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힘겨웠던 성장환경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천적이고 단아한 성격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정씨의 큰딸 최현정(가명)씨는 “어른들이 안기부에 끌려가기 전에는 외할아버지와 외고모할머니가 월북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말했다.

    대학을 마친 정씨는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틈틈이 습작소설을 지을 정도로 감수성도 풍부했다. 어머니가 운영한 하숙집에서 기거하던 은행원과 결혼한 그녀는 3녀1남을 낳은 후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1979년 강원룡 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천 아카데미하우스’의 주부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생명의 전화’ 상담원으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정씨의 집 또한 흠잡을 데 없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 1983년 당시 중견은행의 강남지역 지점장이었던 남편 최회영씨와 대학에 다니던 세 딸, 중학생이었던 막내아들은 함께 둘러앉아 책 읽기를 즐기곤 했다. 정씨 가족이 다니던 성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준회 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오던 정씨 부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그게 관행”

    평범한 가족에게 어머니의 연행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알고 있는 것은 ‘기관’에 끌려갔다는 것 뿐, 누가 왜 데려갔는지에 대해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던 가족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정씨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남편 최회영씨는 김보좌주교에게 청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를 소개받기도 했다. 함신부를 통해 부인과 처가 사람들이 안기부 남산 조사실에 있다는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지만, 무슨 이유로 조사를 받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이들 가족에게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엄혹했던 1980년대 초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만 동동 구르며 속을 태우는 것이 전부였다. 항의할 곳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안기부에 끌려간 지 20일이 지난 9월20일경, 정은복씨를 비롯해 구금됐던 가족들은 ‘혐의 없음’으로 훈방조치됐다. 당시 안기부의 사건기록은 ‘정경희와 접촉했으리라는 혐의점이나 정황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되어 있다. 연행이 갑작스러웠듯 석방 또한 갑자기 이루어졌다.

    심문 녹취록과 자술서 위주로 구성된 안기부 사건기록에는 정씨가 자필로 작성한 ‘간첩인정 자술서’가 포함돼 있지만,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정씨가 다른 가족들의 석방을 위해 거짓진술한 것으로 밝혀져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의문사위에서 진술했다. 내용 자체가 횡설수설인 데다 사실확인을 해보니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는 것.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이 자술서에는 본인의 서명은 물론 간인 등 공문서에 필요한 확인도장이 하나도 없다.

    “내가 살면 가족들이 고통받는다”

    문제는 안기부의 이러한 조사가 당시 실정법으로도 명백히 불법이었다는 사실. 1차적으로는 영장 없이 이루어진 불법 구금이었고, 20일이라는 기간 또한 법정기한(48시간)을 훨씬 넘긴 것이었다. 더욱이 구체적인 혐의사실이나 증거도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일단 찔러보는 식’의 조사였다.

    이에 대해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지금 기준에선 불법이었음을 인정하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4인1조로 구성된 이 사건 담당 수사팀 가운데 팀장과 주무는 이미 사망했고, 보조업무를 맡아 조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의문사위에서 “영장발급 없는 강제연행이나 법정구금기한 초과 등은 당시 정보기관들의 대공수사에서는 관행화된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온 정은복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과 자녀들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왜, 어떤 조사를 받았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정씨는 가족들의 눈을 피해 수면제 40알을 삼켰다. 그의 가슴 위에는 “내가 살아 있으면 남편과 자식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편지와 함께 막내아들의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놀란 가족들이 재빨리 병원으로 옮긴 덕분에 정씨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응급조치와 내과치료 후 정씨는 ‘생명의 전화’ 상담원 활동 당시 알고 지내던 정신과 전문의 이모 박사가 있던 이대 동대문병원으로 옮겨졌다. 사건 이후 이박사를 만난 정씨는 사람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박사에게 “나를 아는 척하면 당신도 안기부에 끌려가 피해를 입을 것이니 모르는 척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

    유감스러운 것은 사건발생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진료기록은 보존연한이 넘어 폐기되고 없다는 점이다. 정씨의 담당의사였던 이박사도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증언하기 쉽지 않은 상태다. 어렵사리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이박사는 “차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증상이었는지 회상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지난 2001년 의문사위에서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이는 피해망상과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한 달 가량 치료를 받고 퇴원해 집에서 요양하던 정씨는 이후 “다소간 차도를 보이는 듯했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자녀들의 귀가시간이 밤 아홉 시만 넘기면 패닉상태에 빠지는 등의 몇 가지 증세를 제외하고는 희망을 가질 만했다는 것. 성당에서 정씨를 다시 만났던 김보좌주교 또한 “이전에 비해 말수가 상당히 줄었지만 그래도 이겨내는 듯 보여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고 회상한다. 그러던 정씨가 안기부에서 풀려나온 지 석 달이 채 못 된 12월의 겨울밤, 딸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관심의 초점은 단연 정씨가 20일간 안기부 지하조사실에서 어떻게 조사받았는가에 쏠린다. 그러나 조사를 주도한 수사관의 진술 없이 보조역할을 한 이들의 증언만으로 당시 상황을 복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 특히 이들은 “고문 등의 가혹행위는 일절 없었다”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오로지 계속해서 자술서를 작성하게 하고 이를 기초로 심문하는 작업만 20일 동안 진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정씨가 심리적인 충격을 입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1기 의문사위 조사팀의 판단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악명 높은 ‘남산’에서 20일을 보내며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사를 받은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타격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는 것. 정씨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간첩행위 자술서’를 허위로 작성했던 것이나, 귀가한 다음날 자살을 시도한 것만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정은복씨가 조사를 받았던 옛 안기부 지하조사실 복도(위)와 내부(아래)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등이 행해졌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해도, 1980년대 초반의 대공사건 수사관행상 잠을 안 재운다거나 폭행을 가하는 수준의 가혹행위는 없을 수 없었으리라는 판단 또한 가능하다. 이는 막내아들 출산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정씨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큰딸 현정씨는 기자에게 “실종 직후 수차례 졸라 만난 안기부 직원들이 ‘그 아주머니는 조사받을 때부터 좀 안 좋아 보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의문사위의 한 조사관은 “수십 년간 ‘월북자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정씨에게는 무엇보다도 남편이나 자식들이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 조사관의 견해다.

    정씨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녀는 왜 그리 황급하게 밖으로 나간 것일까. 사라지기 직전 딸에게 한 “누가 나를 찾아와 만나러 가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정씨의 행방을 알려줄 수 있는 이 세 가지 질문은 여전히 안개에 쌓여있다. 우선 가족들은 “무혐의로 석방된 이후에도 안기부 관계자들이 계속 집에 연락을 해왔다”며 의구심을 갖고 있다. 특히 큰딸 현정씨는 엄마가 사라진 그날 오전, 자신을 찾는 안기부 관계자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 관계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먼저 받았던 정씨가 “왜 도대체 딸을 찾느냐, 관심을 갖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우선 정씨는 혐의가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된 상태였고, 북한 공작원들도 이미 조사를 받은 가족이나 친지에게는 절대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안기부가 계속 감시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반박이다.

    한편 가족들은 정씨와 함께 안기부 조사를 받았던 동생 은숙씨가 언니가 실종되기 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해 숨진 과정에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퇴근 무렵 번화가에서 일어난 사고였음에도 목격자가 없었던 점 등 평범치 않은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실체 또한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로 인해 정은복씨가 심리적으로 더욱 불안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는 사실이다.

    정씨가 사라진 이후 가족들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6시 퇴근하면 바로 집에 오던 가정적인 아버지 덕분에 노랫 소리가 끊이지 않던 2층짜리 단독주택에는 깊은 절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가족들은 경찰에 가출신고를 한 것은 물론 정씨를 찾아 전국을 헤매기도 했다. 특히 남편 최씨는 다니던 은행을 휴직하고 약 1년 동안 아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행려병자 수용시설, 부녀자 보호시설, 정신병원, 기도원 등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무렵 남편 최씨는 다니던 성당 주임신부를 이따금 찾아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원래는 술을 거의 못 마시던 사람이었는데, 이때부터 종종 술을 많이 마시고 한밤중에 와서 통곡하곤 했다”고 김보좌주교는 회상했다. 최씨가 그 와중에도 당시 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던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내가 사라진 지 3년 후인 1986년 최씨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자녀들은 고아가 되었다. 이미 큰딸 현정씨가 대학을 졸업한 뒤이기는 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적인 곤란은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이들은 이야기한다. 지나가는 경찰차만 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20년을 살았다는 것이 이들의 회상이다.

    큰딸 현정씨는 “그때는 어떻게든 살아 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당시 가족들이 느낀 공포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는 회상이다.

    “그때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 지금도 죄책감에 시달리곤 해요. 만약 내가 사라졌다면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싸웠겠죠. 그렇게 못했다는 게 엄마한테 부끄럽고 미안한 거예요.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기자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최씨의 눈에 순간 눈물이 맺혔다.

    정씨가 사라진 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상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묻어뒀던 기억을 다시 꺼낸 것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이들은 안기부에 ‘엄마를 찾아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굳이 소득이라고 한다면 15년 전 엄마가 조사를 받은 것이 월북한 대고모 정경희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는 점이었다.

    이후 마음을 정리한 큰딸 최씨는 독립이민을 결심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기자는 “혹 이민을 결심하게 만든 마음 가운데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실망이나 불안도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주 없었다고는 못하겠죠”라며 쓸쓸히 웃어 보였다.

    1기 의문사위 ‘진상규명 불능’

    영주권 발급심사 인터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00년 말, 오랜 고민 끝에 최씨는 절절한 사연을 담은 진정서를 작성해 한국으로 부쳤다. 이번에는 혹시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진정인이 직접 출두해야 한다는 말에 최씨는 영주권 심사를 포기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건을 접수한 의문사위는 전국 행려병자 수용시설의 옛 기록을 뒤져가며 정은복씨로 추정되는 인물을 수용한 적이 있는지, 혹은 시체를 처리한 적이 있는지 추적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의문사위 활동에 관한 언론과 세간의 관심 또한 장준하, 최종길, 이내창 등 주요인물들의 사건에만 집중된 까닭에, 사라져버린 평범한 중년주부의 이야기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 사건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사들이 공권력의 위법한 개입으로 사망한 사건’을 조사하는 의문사위의 취지에 맞느냐를 두고 의문사위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결국 1기 의문사위는 조사기한 만료가 다가오던 지난해 9월 이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추가로 밝혀진 사실도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기 의문사위 관계자는 “솔직히 이 사건에 많은 시간을 투입해 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지난 7월1일 활동을 시작한 2기 의문사위에서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2기 조사팀은 시립묘지 무연고자 매장기록 등 1기 조사 당시 확보하지 못했던 자료를 통해 정씨의 이후 행방을 추적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단서는 없는 상태다.

    국정원, “사과는 적절치 않아”

    ‘신동아’는 이 사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공식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국정원 공보관실에 질의서를 보냈다. 1983년 안기부가 정은복씨를 연행할 당시 구체적인 혐의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영장 없는 연행의 불법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혹행위 여부와 추후 행방에 대해 추가정보가 있는지, 공식적으로 정씨는 무혐의 처리된 것인지 등 7개의 질문이 담긴 질의서였다.

    이에 대해 국정원 공보관실은 이튿날 전화를 통해 회신해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달라진 국정원’에 대한 최근의 평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국정원은 1기 의문사위가 요구한 정은복 사건관련 자료일체를 넘겨 주었으며 지난 9월4일 2기 의문사위가 추가로 요구한 자료 또한 전달했다. 따라서 사건내용에 대한 사항은 의문사위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이 사건에 관한 국정원의 입장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진행되고 있는 2기 의문사위의 조사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추후 이 사건과 관련해 의문사위의 추가협조요청이 있다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할 방침이다.”

    “불법체포와 법정기한을 넘긴 조사기간 등 현재까지 밝혀진 사항에 대해서만이라도 가족들에게 사과 혹은 유감표시를 할 용의는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국정원 공보관실측은 “현재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답했다. “2기 의문사위의 조사결과가 1차에서와 마찬가지로 결론지어진다면 그때 가서 유감표시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상황을 가정한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8월16일 서울지방법원은 1987년 옛 안기부가 ‘윤태식 게이트’의 주인공인 윤씨에게 살해당한 수지김(한국명 김옥분)씨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과 관련해, 김씨의 유족 10여 명에게 42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들은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가 위법행위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고 있다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은 8월21일 ‘수지김 사건 판결에 따른 국정원 입장’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죄송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유가족과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고 밝혔다. 더불어 국정원은 “잘못이 명백한 만큼 항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표명했고, 결정권자인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9월4일 항소를 포기했다.

    정은복씨 사건 조사에 관여했던 1기 의문사위 관계자는 기자에게 “사실 안기부의 위법행위와 그에 따른 피해 정도로만 따진다면 정은복씨 사건이 수지김 사건보다 더 심각하다”고 이야기한다. 불법적인 장기조사와 실종 사이의 연관관계를 인정한다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고 덧붙였다.

    “의문사위 기록만 들여다봐도 권위주의 정권 시절 유사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안기부 조사는 불법체포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관련조사는 영장이 필요없던 시절이었으니, 별다른 증거나 혐의점 없이도 아무나 지하조사실에 끌고 올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방첩활동은 정보기관의 고유업무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족들이 나서지 못해 그렇지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잊고 지낼 뿐입니다.”

    취재 초기 기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정은복씨의 자녀들과 접촉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사라진 어머니와 견디기 힘들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동생들과 상의해보겠다”던 큰딸 현정씨는 몇 번의 전화설득 끝에야 겨우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고, 그나마 여러 차례 “기사화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집안 어른들과 동생들이 여전히 불안해한다는 것이었다.

    정씨가 사라진 지 20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나서서 떠들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인 듯했다. 지나간 시대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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