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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위원 구영필 유족의 항변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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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독립군은 국내에 들어와 일제와 친일파를 공격했다. 일제로서는 조선의 통치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싸움이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다. 청산리전투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토벌에 대응하고 역량을 보전하기 위해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는 과정에 치러진 싸움이었다. 청산리전투 직후 일본군이 연변에서 저지른 경신년 대학살을 계기로 대부분의 무장단체는 와해됐으며, 다수의 무장대원이 러시아로 이동해야 했다.”

간민호회의 탄생과 고려국 건설계획

한편 비슷한 시기인 1919년 11월9일 구영필씨는 ‘동지 황상규, 김대지와 함께 일합사(一合社)를 해체한 후, 중국 길림에서 밀양 출신 후배 김원봉(金元鳳)과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등을 중심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다’고 일본 고등경찰요사와 의열단 판결문에 기록돼 있다. 여기서 한봉근과 한봉인은 구영필씨의 외사촌조카로 두 사람 모두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은 1920년 5월과 12월에 두 차례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을 시도하는데, 구영필씨가 직접 참여한 5월에는 거사 전에 발각돼 상당수 대원이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구영필씨는 이때 체포망을 피해 무사히 도망쳐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는 1920년 3월 북만 영안현 영고탑에 민족학교 ‘여명의숙(黎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와 국사, 산수,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

1920년대 후반 경신년 대학살 이후 일본군은 북만주 일대까지 모두 장악한다. 1921년 중반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이 일대의 항일운동은 암흑기나 다름없는 시기였다.



1921년 초 구영필씨는 영고탑에 조선인 자치기관인 ‘한교호회’를 설립했다가 중국 관헌에게 간판을 압수당한다. 1915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만몽조약’으로 만주지역에서 조선인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으로 귀화할 경우에는 재산 소유가 가능했다.

그래서 1921년 6월 구영필씨가 중국명 ‘최계화(崔桂華)’라는 이름으로 중국국적을 취득한 후 만든 조직이 바로 ‘영안현 입적간민호회(이하 간민호회)’다. 간민호회는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해 실질적인 자치기관의 면모를 갖춘다. 이후 영고탑에는 학교와 병원, 정미소, 교회 등이 세워지고 별도의 청년회도 조직된다. 조선인의 이주도 급증해 1923년 10월에는 거주 조선인이 420여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관련 사료에 기록돼 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중 대정11년(1923) 10월5일자 보고내용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고려국 건설 계획에 관한 건. 밀정의 정보에 따르면 고려국 건설 계획이 있다고 보고함.’

이처럼 나날이 커지는 영고탑 조선인 자치지역 내에서 간민호회와 김좌진 장군의 군정파 간의 갈등은 일본군이 물러나고 1년 정도 지난 1922년 중반부터 시작된다. 다음은 신주백 연구원이 조선총독부 ‘길림성 동부지방의 상황’과 ‘경찰사-하얼빈 총영사관 외편’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당시 상황이다.

독립군단, 영고탑으로 재집결

“입적간민호회는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대항단체로 결정돼 중국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경신참변을 피해 북만지역에 이주해온 동만지역 무장독립세력은 입적간민호회와 같은 자치조직과 원만한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馬橋河)에서 한인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을 해제당하자 이후 주요 간부들이 영안현 영고탑으로 집결해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들의 의무금 징수활동은 입적간민호회와 그곳 주민들에게 원성을 샀다. 이에 중국의 지방관헌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를 체포하려 하였고,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는 다시 흩어져야 했다. 이렇게 하여 쌓인 갈등은 신민부가 결성된 이후 폭발했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결성됐는데, 김좌진과 이윤범 등이 1922년 8월 결성한 대한독립군단과 김혁의 북로군정서 등 두 단체가 주축이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1920년대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진영에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다. 수원대 박환 교수의 연구 논문 중 일부다.

“만주지역은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할 만한 기본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주 조선인의 열악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또 당시 한인들은 워싱턴 회의(1921.11~1922.3)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코민테른이 개최한 ‘제1회 동양제민족대회(1920.9.1~8)에서는 피압박 민족의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신주백 연구원은 그의 저서에서 “만주지역 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젊은 청년 인텔리들이었다. 이들은 민족주의운동 계열이 벌여온 무장투쟁 일변도의 활동방식을 비판하며 야학과 잡지 발행 등을 통해 계몽과 선전활동에 주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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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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