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일은 2002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로 입지가 공고해져 있던 정몽준 회장 체제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결국 정몽준 회장은 지난 1월18일 대의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재선에 성공한 뒤 취임사에서 “4년 뒤엔 축구협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축구계는 크게는 2개, 작게는 3개 계파로 나뉜다.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을 지지하는 파와 이에 반대하는 파, 여기에 정 회장과 함께 축구협회에 와서 축구계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출신 인사들도 하나의 계파로 추가할 수 있다. 현대 출신은 정몽준 회장이 떠나는 순간 함께 따라갈 사람들이지만, 지난 12년간 국내는 물론 국제 축구계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놓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협회를 떠나도 축구계에서 언제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파워 그룹이다.
축구인들만 놓고 보면 정 회장을 밀며 ‘축구협회의 요직을 장악해 힘을 과시하는 그룹’과 정 회장을 반대하거나 반대했다는 이유로 ‘협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며 빙빙 돌고 있는 파’로 나뉜다. 정 회장을 지지하는 이른바 ‘축구 여당’의 중심엔 조중연 축구협회 부회장이 있고, 정 회장을 반대하는 축구 야당의 핵심엔 허승표 전 축구협회 부회장이 버티고 있다. 한마디로 축구인들이 정 회장을 축으로 둘로 나뉜 셈이다.
축구 여당은 “정 회장을 중심으로 2002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하는 등 한국 축구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하고, 축구 야당은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 회장 때문에 한국 축구의 구조가 완전히 뒤틀렸다”고 비난한다.
정몽준 회장, 진짜 떠날까?
정 회장의 취임사 중 일부다.
“저는 4년 뒤 임기를 마치면 물러날 것입니다. 누가 차기 축구협회장이 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 차기 회장이 되면 좋을지, 여기서 잠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제가 처음 축구협회장이 될 때입니다. 축구협회의 대의원들이 찾아오셔서 ‘축구를 좋아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좋아한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축구회장을 맡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저 자신이 축구를 좋아해서 수락했습니다. 그때는 축구협회장 경선이니 이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으며 아마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사양했을 것입니다. …(중략)
축구는 누구나 좋아하는 운동입니다. 그렇기에 축구협회장은 기본적으로 축구를 좋아하고 국민들로부터 믿음직하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 맡는 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역대 축구협회장을 보면 여운형 (2대), 신익희 선생(7대), 일제하인 1925년에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신 하경덕 박사(5,6대), 윤보선 대통령(9대), 장택상 총리(12대), 한국일보 창업자인 장기영 부총리(19, 21, 23대) 등 다양한 분야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축구협회장은 축구인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도 이해는 되지만 문화계, 언론계, 경제계 등의 분야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분을 모시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축구선수 출신도 회장이 될 수 있습니다. 유럽의 50여 국가 가운데 축구인이 회장을 맡고 있는 나라는 10개국쯤 됩니다.”
떠난다고 선언은 했지만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정 회장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협회 내부에서도 “회장 자리를 축구 야당 쪽에 쉽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축구 야당측도 “취임사 전체 맥락을 보면 끝까지 축구계에서 힘을 행사하겠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정 회장은 4년 전 회장 선거 때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아니지만 ‘마지막 회장 도전’이라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또 4년을 연임하게 됐다. 물론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공식적인 취임사에서 분명히 마지막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떠날 것”이라는 게 협회 내부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면 정 회장의 뜻은 짐작할 수 있다. 후계자를 심어 수렴청정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겠다는 것. 또 최소한 축구 야당에는 ‘정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정 회장은 취임사에서 “축구협회장을 떠나도 FIFA(국제축구연맹) 부회장 직을 유지하며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계속 뛸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