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고에 입학해 처음 받아든 성적표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반에서도 중위권을 훌쩍 넘긴 등수였다. 처음엔 워낙 잘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그렇겠지, 좀더 열심히 하면 금방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2학기 중간고사에는 달라질 거야, 아니 기말고사엔 성적이 오를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며 2년 동안 애써봤지만, 성적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중위권을 넘는 숫자가 내 진짜 등수임을 인정하는 순간,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나를 더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부모님의 달라진 눈빛이다. 공부 잘한다고 딸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두 분은 이제 내가 부끄러운 모양이다. 어머니는 남에게는 내색조차 하지 않고, 성적이 안 나오는 딸 때문에 혼자 속앓이를 하신다.
요즘 나는 교실에선 멍 하니 앉아 있고, 같은 반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교실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에 숨이 막힌다. 학원도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딱히 오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난 이제 선생님의 주목을 받는 기대주가 아니라, 그저 교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조용한 학생에 불과하다. 일반고에 다녔다면, 이렇게 자기비하에 빠지진 않았을 텐데….
최근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물론 학교엔 비밀이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이토록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학원 선생님은 내게 “일반고로 전학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지만, 망설여진다. 일반고 친구들에게 ‘부적응자’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워서다. 외고에 입학한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2. “1등 엄마가 못 돼서 미안해”
나는 올해 아들을 서울 C과학고에 입학시킨 40대 주부다. 지난해 아들의 과학고 합격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 아들이 전국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수재들과 경쟁해 150여 명 안에 들었으니, 정말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
그런데 요즘 아이가 무척 힘들어한다. 언젠가 시험을 치른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나는 두 번째 문제를 몰라서 틀렸는데, 다른 애들은 일반화학을 미리 공부하고 와서 모두 쉽게 풀었대요. 친구들은 화학Ⅰ, 유기화학까지 다 공부하고 왔는데 나는 이제 시작이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선행학습을 많이 해온 친구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미리 공부를 못 해와서 꼭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아요.”
다른 엄마들처럼 발빠르게 정보를 입수해 아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다 공부하고 입학하도록 이끌지 못한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이야…. 나는 아들이 과학고에만 입학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요즘은 ‘아이가 1등이면 엄마도 1등’이라는데, 나는 정말 무능한 엄마인가보다.
다른 학부모들 얘길 들어보니, 전교 60등 안에 들어야 조기 졸업해서 카이스트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1~2점 차이로 등수가 천양지차로 갈리는 살벌한 현장에 있으니, 아이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조기 졸업을 목표로 한 아이들은 2학년 1학기까지 고등학교 전 과정을 끝내야 한단다.
과도한 학습 부담 때문에 아이가 주저앉을까봐 걱정이다. 차라리 일반고에 갔다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명문대에 무난히 진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아이가 부쩍 체력도 떨어지고, 자신감도 잃은 것 같다. 기숙사에서 돌아온 아이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