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7월, 1997년 대통령선거 직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주요 인사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이프, 세칭 ‘X파일’이 공개돼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의 연장선에서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되고, 이수일 전 차장은 자살했다. 다른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김은성 전 차장이 추가 수사를 받게 됐다. ‘당연히’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소리가 쏙 들어가버렸다.
국정원 개혁은 입법권을 쥔 국회가 국정원 관련법을 개정하거나 제정함으로써 시작된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공청회를 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국정원 관련 법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연일 보도를 쏟아내던 언론도, 식당에 가면 “이 밥상 밑에도 도청기가 있는 것 아니야?” 하던 국민도 채 1년이 못 돼 관심이 식은 듯하다. 이제 개혁을 위한 시동을 걸었는데….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대체로 수사권 폐지를 국정원 개혁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은 외견상으로나마 중립을 지켜야 하기에 자기 의견 표출은 자제해야 한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소속 신기남 국회 정보위원장은 ‘신진보 리포트’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국정원의 수사권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 정보위의 열린우리당 간사인 임종인 의원은 지난해 12월2일 열린우리당 의원 6명, 민노당 의원 9명, 한나라당 의원 1명과 함께 기존의 국가정보원법에서 수사권만 폐지한 ‘국정원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도 유사한 내용의 국정원 관련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라고 한다.
야당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 3월23일 정보위 한나라당 간사인 정형근 의원은 같은 당 의원 18명과 공동으로 ‘국정원법 전부 개정안’과 ‘국가정보활동 기본법안’을 발의했다. 그가 내놓은 국정원법 개정안에는 국정원이 지금처럼 수사권을 갖는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기본법안에는 국내 13개 정보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는 정보협의회와 13개 정보기관을 감독하는 정보감찰관을 두는 등 정교하게 짜여 있다.
여야의 법안 제출로 국정원 개혁 방향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국정원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도출하고 싶다면 우리에 앞서 유사한 길을 걸은 선진국의 정보기관 개혁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통일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자본주의로 흡수통일한 독일과 공산주의로 통일을 이룬 베트남 사례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언론과 정보기관
작금의 국정원 개혁 논의의 봇물을 터뜨린 것은 언론이다. MBC의 이상호 기자는 X파일을 입수했으나 통신보호기밀법 때문에 공개하지 못했다. 그 사이 ‘동아일보’ 서정보 기자가 X파일의 존재를 보도했고, 이어 ‘조선일보’ 이진동 기자가 X파일 녹취록을 입수해 실체를 보도함으로써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국정원이 동네북 신세가 되고 말았다. X파일 사건이 터지기 4년 전에는 ‘신동아’가 수지킴 사건을 보도해 국정원을 곤경에 빠뜨린 바 있다.
언론과 정보기관은 정보수집 활동을 하면서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군사정권 시절이라면 정확한 보도를 했더라도 얻어터지는 쪽은 언론이다. 그러나 민주화한 세상에선 오히려 정보기관이 당하고 만다. 언론과 정보기관의 충돌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과 세계 최고의 언론이 모여 있다는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