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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1

청상과부 신여성 윤영애 자살 사건

“시어미 있는 사람은 연애도 걸지 말아요”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청상과부 신여성 윤영애 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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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과부 신여성 윤영애 자살 사건

윤영애가 자살한 1933년에는 수많은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학대를 못 이기고 목숨을 끊었지만, 반대로 일부 신여성들은 시어머니를 학대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조선일보’ 1933년 1월21일자에 실린 안석영의 만문만화 ‘33년식 가정쟁의’.

전문학교 교육까지 받은 쾌활한 신여성이 채 1년도 함께 살지 못한 남편이 그리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다음날 공개된 유서는 의문을 증폭시켰다. 죽은 윤영애의 머리맡에 있던 유서에는 “나의 시체는 남편과 똑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지내고 위패를 나란히 놓아달라”는 부탁과 “이 세상에는 금전도 중하지만, 금전보다도 의리가 더 중한 것을 알아달라”는 한 맺힌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금전보다 중한 게 의리”

윤영애는 1911년 슬하에 1남1녀를 둔 수원 부호 윤성단의 늦둥이로 태어났다.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족하게 지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자애 깊은 어머니와 정 많은 오빠 덕분에 외로움과 서러움을 모르고 자라났다. 수원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잠깐 동안 경성실천여학교에 다니다가 일본 모지(門司)의 진세이(鎭西)고등여학교로 전학했다.

영애는 퍽 총명하고 또 이지적 여성이면서도 지순한 감정과 발랄한 기상을 가진 순수 모던 걸이었다고 그와 친한 동무는 이야기해준다. 영화감상의 취미를 알고, 문학과 소설을 이야기하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읽고, 사회문제를 비판해보고, 서점과 백화점을 유영(遊泳)해 다닐 줄 알고, 스포츠를 이해하고, 시를 쓰고, 음악을 아는 요컨대 그네들 말대로 순수 모던 걸이었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어디서나 우수했으며 더욱이 모지 진세이고등여학교에서는 발군의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빠지지 않는 용모, 세련된 체구! 다시 거기에 물질적 혜택까지 갖추고 있는 여성이요, 가정에서의 간섭과 구속조차 적게 가진 여성이었다. 실로 행운의 소녀요, 선앙(羨仰)의 소녀였다. 가슴에는 불같이 타는 지식욕이 있었을 뿐이요, 대망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기뻐하는 여성이었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진세이고등여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 사감이 사적인 편지를 뜯어보았다고 사감의 뺨까지 치면서 잘못을 질책한 일화가 전해질 만큼 성격이 급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진세이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해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 전문학교나 대학까지 마칠 생각도 있었지만,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어머니 걱정에 유학생활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오빠 소유의 당주동 집에서 어머니와 둘이서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내면서 신촌 이화여전까지 통학했다.



달콤한 신혼

마냥 행복하게만 보이던 신여성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일본 유학에다 전문학교 교육까지 받고보니 어느덧 스무 살이 훌쩍 넘어버렸다. 어머니는 윤영애의 혼사가 마냥 늦어지는 것을 몹시 근심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공부는 그만하면 됐으니 시집가라고 다그치자 윤영애 역시 결혼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애 앞으로 나타나는 신랑후보자의 행렬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얼굴 곱고 마음 착하고 교양 있고 재산 있고 이보다 더 나을 신부가 또 있을 것인가? 장안의 청년이란 청년이 전부 동원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한 사람도 OK의 검인을 맞은 이가 없었다. 모두 어딘지 부족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청년이 있었다. 영애는 정성진이라는 호남자를 소개받았다. (‘윤영애 순종(殉從) 애화’, ‘신여성’ 1933년 9월호)


정성진은 가난하지만 유서 깊은 양반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졸업한 이후에는 곧바로 경성지방법원 서기로 임용될 만큼 수재였다. 학창시절 운동선수로 활약했고, 성격이 쾌활하고 견실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윤영애와 정성진이 처음 만난 것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이화여전을 나란히 졸업한 직후인 1932년 4월. 까다롭게 신랑감을 고르던 윤영애도 정성진 같은 청년이라면 평생을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정성진 역시 윤영애에게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당사자 사이에 마음이 맞으니 혼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담이 오가고 약혼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5월15일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변호사 김병로의 주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는 가인(街人) 김병로는 신랑 정성진의 경성법학전문학교 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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