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진보가 내놓은 더불어 잘사는 길 ‘복지국가 혁명’

  •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 참여사회연구소장 lbch@kangwon.ac.kr

    입력2007-09-05 22: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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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가 내놓은 더불어 잘사는 길 ‘복지국가 혁명’

    ‘복지국가 혁명’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정책위원회 지음, 밈, 400쪽, 2만원

    올해는 ‘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라 행사도 많았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1987년의 정치적 민주화 이행 이상으로 1997년 경제위기가 전환점이 된 급진적 시장화와 개방화의 충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정부는 수출이 잘 되고, 특히 최근 주가가 유례없이 치솟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의 반응은 아주 냉담하다. 수출이 늘고 주가가 올라도 그것으로 득을 보는 사람은 소수 계층에 국한할 뿐이다. 세계화한 시장과 무한 경쟁의 시대에 민생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필자는 머리를 식힐 겸 동네 산에 곧잘 가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사는 게 팍팍하고 불안하다는 것이다. 도무지미래에 대한 희망이 안 보인다고 한다. 일자리 걱정부터 시작해서 집값, 자식 교육비, 입시, 건강, 보육… 그야말로 걱정이 태산이다. 노후 걱정은 해볼 겨를도 없다. 그렇듯 걱정을 쏟아내고 난 다음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험악한 말들이 이어 진다. 우리 동네만 그럴까.

    동네 이야기는 그만두고 최근 벌어진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사태만 보아도,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의 일그러진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부(富)는 재벌, 국제자본이 독차지하는 부일 뿐,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의 영향이 파급되기는커녕 진작부터 양극화가 심각했다. 나라 경제의 성장과 국민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의 권리, 복지권 간의 비대칭이 극심하다. 1997년 이후는 성장력마저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신흥경제 4국)에 밀리는 실정이다.

    북유럽형 복지국가

    이런 상황을 타개할 해법을 내놓아야 할 한국의 진보 개혁 세력은 저항과 반대에는 대단한 능력을 보이지만 대안의 구성력은 퍽 취약하다. 대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근본주의적이다. 한편 그간 시민운동의 주류는 투명성, 절차적 공정성을 주된 개혁 과제로 삼았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달리 새로운 출구는 없는가.



    우리는 7월4일 창립된 한 단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임은 문패를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 ‘복지국가 SOCIETY’(이하 WSS)라고 달았다. 이들은 ‘복지국가 혁명’을 선언하면서 한국이 북유럽형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그런 국가를 창조하기 위한 실천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도 다졌다. WSS는 이를 위한 12가지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을 슬로건 형식으로 제안했는데, 현수막에 써서 걸어놓은 대로 보자면, 1. 병원비 걱정 없는 나라, 국민이 건강한 나라 2. 아동은 국가가 키운다. 아동수당, 무상보육 실현 3. 여성의 사회 참여 보장, ‘일’과 ‘가족의 돌봄’이 가능한 나라 4. 건강하고 보람 있고, 활기찬 노후가 보장되는 복지국가 5. 장애 차별 없는 사회, 더불어 어울려 사는 나라 6. 차상위 계층까지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는 나라 7. 공부하고 싶은 나라, 공부할 수 있는 나라 8.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는 나라….

    이런 슬로건을 보고 아마 많은 사람이 ‘글쎄, 참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있겠나’ 하고 되묻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자. WSS는 창립대회와 함께 출판기념회도 했는데 그 기념회의 주인공이 ‘복지국가 혁명’이다. 혁명이라니? 좀 과격하다 싶기도 한데, 복지국가 혁명이라지 않은가. 최소한 복지국가 SOCIETY가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을 읽은 다음에 이 조직의 실체에 대한 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뜨거운 감자, 재벌 개혁

    WSS의 대표 이성재는 ‘복지국가 혁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이 학술서적도 아니고 수필집도 아니라고 썼다. 그러면 뭔가. “세계화라는 거센 물결에 휩싸인 한국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의 수집”이고, 새로운 복지국가 물결을 일으키기 위한 “발버둥”이란다.

    ‘복지국가 혁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왜 복지국가 혁명인가’를 주제로 한 좌담과 역동적 복지국가에 관한 글, 2부는 보편적 복지에 대한 세부 각론, 3부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의제를 싣고 있다. 이 책을 훑어본 필자가 보기로는 1부의 주제 글은 내용보다 스타일이 좀 건조한 반면, 좌담이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유익하다. 이 좌담에는 WSS의 주요 멤버들이 거의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나오는 대강의 이야기들이 이후 2, 3부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된다. 그리고 2, 3부는 전부 문답식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해하기 쉽게 짜여졌다.

    우선 지난 시기에 대한 평가에서 주류적 견해와 선을 긋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 개혁은 한국 경제를 정상화하고 선진화의 발판을 닦은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오늘의 저투자, 노동시장 유연화, 저(低)복지, 승자 독식의 시장 지상주의와 양극화, 삶의 불안정을 가져온 원점이라는 것. 그 연장선상에서 한미FTA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대안론에서 보수주의적인, 양극화를 통한 선진화 혁명론을 비판하지만, 참여정부나 시민운동 일각에서 말하는 영국식 사회투자국가론과도 선을 긋는다.

    북유럽식 복지국가가 이들의 대안이다. 이 대안은 실업, 교육, 의료, 주거, 출산, 아동보육, 노후, 빈곤, 장애인 문제 등 전반에 걸쳐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기본적 사회권으로서 보편적 복지를 향유하는 것이다. 또 공공 부문에서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를 일자리 창출의 우선 정책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덴마크와 네덜란드식 유연안정성 모델을 수용한다. 보편적 복지와 함께 능동적 복지가 또 하나의 축이다. 이는 사회구성원에게 잠재 능력 개발의 평등한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복지가 지식기반 혁신경제의 동력으로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지와 성장,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 역동적 복지국가가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의 3부는, 발상 전환이 요구되는 의제들을 다루고 있어 특히 관심이 간다. 참신한 만큼 부담을 져야 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교육 분야는 무상 교육뿐만 아니라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라든지, 대학을 연구중심대학·교육중심대학·일반 대학으로 3중화하는 방안 등 교육 제도와 내용의 선진화 방안이 제시되고 있는데 공감할 만한 부분이 꽤 많다. 재벌 개혁 분야는 아무래도 뜨거운 감자다. 여기서는 솔로몬의 해법이 제안되고 있는데 스웨덴의 발렌베리 재단과 같은 공익 재단을 활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또 그렇게 하려면 기업집단을 법인격으로 인정하는 독일의 콘체른법 같은 것이 도입돼야 한다고 본다. 그대로만 된다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겠고 이는 스웨덴이 걸어간 길이기도 하다.

    ‘불신의 덫’ 벗어나야

    그러나 그간 재벌의 온갖 천민적 행태, 금산 복합체로서 갖는 폐해, 그 정치경제적 지배력과 대조적인 약한 노동의 힘 등을 생각하면 타협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제시하는 대안은 그림의 떡일 수 있다. 또 이런 조건 속에서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만들어진 사정도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주자본주의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수탈을 심화시킨다는 설명은 좀 심하다 싶다.

    노동 개혁 분야의 경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임금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보나, 왜 기간제 사용 사유를 제한해 비정규직 남용을 막는 방안은 언급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노동시장 문제의 해법을 너무 복지 쪽으로 넘긴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복지국가 혁명은 조세의 혁명적 개혁 없이는 불가능할 텐데, 우리 사회에서 증세 논의가 부딪치는 곤란은 이 책에서도 느껴진다. 그래서 돌파구로 ‘선 복지 후 조세’ 원칙이 제시된다. 그러나 잘못할 경우, 복지의 뒷받침 없이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모순을 방치하게 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는 역시 우리 사회 진보는 공적 권력, 제도,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린 ‘불신의 덫’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새 길을 개척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을 느꼈다. 이 책은 공들인 아주 잘 짜인 책이다. 우리에게 한국형 복지국가 정책 모델이라는 큰 그림을 제시한다. 이 큰 그림은 구체적이면서도 간결한 각론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널리 이 책을 읽고, 배우고 또 토론하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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