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을 대표하는 성악가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 실종. 남은 것은 ‘짐을 부탁한다’는 가명의 쪽지 한 장 뿐이었다. 언론과 호사가들은 단번에 정사(情死)로 몰아갔고 윤심덕이 죽기 직전 취입한 노래 ‘사(死)의 찬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빈틈은 너무나 많았다. 실종 4년 뒤 “두 사람이 음반회사의 선불 3만원을 받아 신분을 속인 채 이탈리아 로마에서 숨어 살고 있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경성 바닥을 떠돌자 마침내 유족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하는데….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을 제기한 ‘삼천리’ 1931년 1월호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기사.
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
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
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의문의 情死
이튿날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는 물론 ‘도쿄아사히심분’까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한 청춘 남녀의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 |
기사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서로 껴안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고 전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으므로 그들이 언제 어느 지점에서 투신했는지, 과연 투신한 것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윤심덕의 유류품에는 현금 140원과 장신구, 김우진의 유류품에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있을 뿐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윤심덕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음악가였고,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다. 목격자도 없고 유서도 남기지 않아 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동반 자살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지만, 언론은 정사라 단정하고 앞 다투어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도쿠주마루에 몸을 실은 수백 명의 승객들은 제각기 그리운 고향을 꿈꾸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갑판 위에는 다만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사납게 출렁거리는 물결을 굽어보며 가끔 길게 한숨을 내쉬어 무엇인지 비상히 한탄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멀리 남실거리는 수평선 저쪽을 바라보며 애조(哀調)에 넘치는 애련(哀戀)한 목소리로 ‘사의 찬미’를 불렀으니 그의 오장에서 끓어 나오는 처량한 노랫소리는 다만 으르렁거리는 모진 파돗소리와 함께 수평선 저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버릴 뿐이었다. 그 순간 그들은 푸른 바닷물 속에 몸을 날렸다. (‘윤심덕 김우진 정사사건 전말’, ‘신민’ 1926년 9월호) |
사고 발생 사흘 후인 8월7일 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은 목포 자택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비보를 듣고 부산까지 갔다가 오늘 낮차로 돌아왔소이다. 형님이 투신한 곳은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 한가운데랍디다. 그런 까닭에 지금껏 시체를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합디다. 형님의 사고에 대해 각 신문에서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를 부풀려 기사를 실었는데 각 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가족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돼 경찰의 손에 들어갔다 함은 낭설이올시다. 저는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여 세상의 오해가 없도록 발표하려 합니다.” (‘김씨 투신과 가족의설움’, ‘조선일보’ 1926년 8월10일자) |
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사의 찬미’는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고?
“얼마나 기쁘십니까?”
1930년 12월, 매일신보 김을한 기자가 이화여전 음악과 윤성덕 교수를 찾아가 대뜸 축하인사를 건넸다. 윤성덕은 윤심덕과 오사카에서 함께 지내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하기 불과 몇 시간 전 요코하마에서 미국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에 도착한 후에야 언니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노스웨스턴대학 음악과를 졸업한 윤성덕은 1928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김을한의 뜬금없는 질문에 윤성덕이 되물었다.
“무엇이 기뻐요?” “언니 되시는 윤심덕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껏 살아계시다니 얼마나 기쁘시냐는 말이에요.” “글쎄요?” “아니 글쎄라니요? 김우진씨의 아우님 되는 김익진씨가 총독부에 수색원까지 제출했다는데 그것을 모르십니까?” “모르긴요. 김우진씨의 두 아우 김익진씨와 김철진씨가 찾아오셔서 언니와 김우진씨가 아직도 이태리에 살아있다는 풍문이 있어 총독부에 수색원을 내겠다고 하기에 좌우간 손해는 없을 것이니까 한번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니 좀 기쁜 일입니까. 아직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벌써 5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새파랗게 살아있다는 말이 있어서 당국에 수색원까지 제출했다고 하니, 누가 듣든지 좋은 일 아닙니까?” “죽었다던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 하니 좋기야 하지요. 그렇지만 나는 도무지 좋을 것이 없어요.” “그것은 또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러냐고요? 나는 처음부터 언니의 죽음을 절대로 믿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아니, 지금까지도 절대로 죽음을 부인합니다. 처음부터 죽지 않은 사람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세상 사람들이 떠든다고 새삼스럽게 무엇이 그리 기쁘겠습니까?” “처음부터 죽음을 부인하셨다고요? 혹 거기에 대해서 무슨 유력한 증거라도 있나요?” “글쎄요…. 내가 미국으로 떠날 적에 언니가 나한테 하는 말이 자기는 즉시 이태리로 갈 터이니 어쩌면 좀 오랫동안 소식을 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결단코 궁금하게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저 언니가 살아있을 줄만 알고 있을 뿐이지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벌써 5년 전에 그들을 죽은 사람으로 치고 있는데 선생만 그것을 부인하신다는 말씀이에요?” “나와 가족들은 한 번도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언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항상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윤심덕씨와 김우진씨가 목하 이태리 로마에 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그들의 죽음만은 절대로 부인합니다.” “만일 선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살아있을 터인데 이태리에서나 혹 다른 곳에서 그 동안 무슨 소식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설사 무슨 소식이 있었다 한들 그것을 지금 말할 것 같습니까? 그저 처음부터 언니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말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 못하는 벙어리이니까요.” “지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라면 윤심덕씨의 죽음에는 무슨 크나큰 비밀이하나 잠재해 있고 그 비밀을 알고 있을 사람은 세상에서 윤성덕씨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듯한데 어떻습니까?”“비밀이요? 글쎄요. 어쨌든 그렇게만 알아두십시오.” “그렇게 숨길 것이야 무엇 있습니까? 늦어도 한 40일 후면 이태리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상세한 회답이 와서 모든 흑막이 판명될 터인데 혹시 그들의 생존설이 사실이라면 아주 지금 발표해 버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아니 그들이 지금 이태리에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꼭 일본영사관 직원에게 발견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그들이 이태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면….”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문제의 여성 윤심덕이 현해탄의 사나운 파도 속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사회에 일시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윤심덕이 죽었다지?” “응 죽었대.” “왜 죽어버렸을까?” “그야 알 수 있나!” “그 쾌활한 윤심덕이 자살을 하다니.” “그러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지.” 라는 대화가 오갈 만큼 윤심덕 자살에관한 이야기는 전 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윤심덕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녹음한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는 수만장이 팔려 음반회사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전 조선을 풍미하던 비상한 인기를 능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윤심덕이 애인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은 한낱 능청스러운 연극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태리 나폴리에 생존해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과연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아 있다 하면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한 번이라도 그의 집에 서신이라도 띄웠을 것이련만 그도 없다 하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윤심덕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든지 아직 안 되었든지 어쨌든 거친 인생의 행로를 걸어온 그의 고달픈 영혼에 안일한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조선일보’ 1928년 1월10일자) |
윤심덕의 삶과 애정사를 전하는 ‘삼천리’ 1938년 11월호 ‘다한한 윤심덕’ 기사.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씨는 듣건대 원래 평양 어떤 기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그 기생은 딸을 낳고 생각다 못해 자기 동네에 사는 어떤 큰 부잣집의 후원 소나무 밭에 갓난애를 눈물 머금고 버렸습니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사람이 쫓아 나와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친부모같이 귀애(貴愛)하며 길렀습니다. 친부모같이 주어다가 기른 이가 바로 윤성덕씨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래서 윤성덕씨와 윤심덕씨는 자매가 된 것이라 합니다. (‘가인춘추’, ‘삼천리’ 1932년 7월호) |
윤심덕의 집안이 ‘큰 부잣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하지만 서른에 이르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이 정상적인 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살뜰한 동무들과 마주 앉았을 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나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딸 셋 중에 나에게만 제일 박하게 대해. 이런 기막힌 노릇이 있니…”하고 커다란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지며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가끔 말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김윤 양인이 정사하기까지 4’, ‘동아일보’ 1926년 8월9일자) |
윤심덕은 열한 살에 진남포 삼숭학교에 입학해 박인덕, 김일엽과 단짝 친구로 지냈다. 공교롭게도 훗날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박인덕은 청년 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자 조선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고, 김일엽은 네 차례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집안이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모친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 평양여고보에서 공부하면서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윤심덕은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까 훈도라는 명예로운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여러 동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고향으로 부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 낙심했으나 상사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부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학기 만에 더 오지인 횡성으로 전근명령이 내려왔다. 심중에는 불만이 쌓였고 가슴 속에 타오르는 명예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윤심덕은 경성여고보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내빈으로 초대된 하세카와 교장과 세키야 학무국장을 만났다. 윤심덕은 학무국장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멱살을 붙들고 “나를 무슨 죄로 시골구석으로 쫓아 보냈느냐. 나는 있기 싫어 흥!”하며 억지를 썼다. 좌중은 모두 웃었다. 국장도 교장도 웃고 말았다. 이 모험이 효험이 있어 그의 전근지는 횡성에서 춘천으로 변경되었다. (‘윤심덕의 일생’, ‘신민’ 1926년 9월호) |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교사생활을 1년 만에 청산하고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김우진과의 만남
부유한 집안 때문에 불행했던 극작가 김우진. 윤심덕의 애인 가운데 한 사람이긴 했지만, 같이 정사를 결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니혼(日本)대학 문과에 다니던 박정식은 윤심덕에게 반해 약혼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연애편지를 보냈다. 꽃다발과 사랑의 시를 전하면서 전력을 다해 구애했지만, 윤심덕은 냉정하게 뿌리쳤다. 박정식은 실연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해 몇 년 동안 총독부병원 8호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박정식의 친구들이 윤심덕에게 찾아와 “사람이 그 지경까지 되었는데 사랑을 받아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자 윤심덕은 짜증을 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왜 내 탓이냐. 아무리 내게 반해 실성했기로 내가 싫은데 어떻게 사랑을 받아주느냐?”
윤심덕은 싫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했다.
윤심덕이 동경에 있을 때 특히 친하게 지내는 청년이 두세 사람 있었다. 그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윤심덕과 그 청년들이 사랑하는 사이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아주 본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심덕의 정숙지 못한 행동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웬만한 사람의 입에는 거의 오르내릴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남들이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면 할수록 윤심덕은 자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년들에게 더욱더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했다. 그러다 보니 윤심덕을 헐뜯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다시는 그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일도 흔히 있었다. 다시 말하면 윤심덕은 자기 속만 결백하면 세상에서야 아무렇게 떠들거나 머리털 하나 까딱하지 않는 뱃심이 있었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
1921년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 윤심덕은 김우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김우진은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윤심덕도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여서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동우회 순회공연단은 일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여관방이 모자라서 윤심덕은 독방에서 자지 못하고 남자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윤심덕과 가장 가깝다는 그 청년도 같은 방에서 잤다. 밤이 조금 이슥해서 같이 자던 청년이 윤심덕의 정조의 단물을 한번 맛보고자 윤심덕에게 수상한 행동을 했다. 그때 윤심덕은 갑자기 일어나며 그 남자의 뺨을 치고 “나는 네가 그 같이 더러운 남자인 줄 모르고 가깝게 사귀었더니 이것이 무슨 금수의 행동이냐?”며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너무도 무안하고 민망해서 당장 백배사과하며 이후 다시는 그 같은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애걸복걸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도 윤심덕은 여전히 그 남자와 가깝게 지낸다 한다. (‘석일은 악단의명성 윤심덕 3’, ‘동아일보’ 1925년 8월4일자) |
‘삼천리’ 1932년 5월호 ‘이태리 총영사가 조사한 윤심덕씨 생사’.
졸업을 한 해 앞둔 1923년, 김우진과 사귀던 일본인 간호사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해 여름방학 김우진은 목포 본가에서 지내며 죽음이 앗아간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 김우진은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놀러 오라며 편지와 차표 석 장을 보냈다. 윤심덕은 윤성덕, 윤기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집에서 조촐한 가족음악회를 열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윤심덕과 바리톤 윤기성이 노래를 불렀다. 김우진은 아내와 함께 윤심덕 남매를 극진히 대접했다.
1924년 도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이용문 스캔들
윤심덕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여덟이었다. 혼기가 꽉 차다 못해 넘긴 상태였다. 도쿄 유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성이 윤심덕에게 구애했지만 혼처가 마땅치 않았다. 재산이 있는 남성은 죄다 기혼자였고, 그에게 구애하는 미혼자는 재산이 없었다. 한때 함경남도 대부호의 아들 김홍기와 혼담이 상당히 진전됐지만, 신랑 집안에서 뚜렷한 이후 없이 혼담을 파기했다. 비슷한 시기 윤심덕은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다.
윤심덕이 한창 성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을 때 그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남동생 윤기정이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운동하여 이미 여행권까지 나왔으나 다만 여비가 없어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윤심덕은 동생의 여비를 변통해 주려고 각처로 애를 많이 썼지만 선뜻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이용문이 동생의 여비를 자기가 부담하겠다며 모월모일 돈을 내어주겠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윤심덕은 돈을 받으러 이용문의 집을 찾아갔다. 윤성덕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윤심덕은 굳이 자기 혼자서 다녀오겠다며 동생을 떼어놓고 혼자서 갔다. 윤심덕이 다녀간 날 이용문의 계좌에서 600원이 인출되었다. 그 밖의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거니와 이후로 윤심덕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때 세상에는 윤심덕이 시내 모처에서 이용문과 살림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것도 양편에서 절대 비밀에 부치는 일이라 오직 독자의 상상에맡기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윤심덕이 자기 일신의 안락을 위하거나 허영에 눈이 어두워 이용문과 가깝게 사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뿐인 자기 남동생을 미국에 유학 보내려는 정성으로 이용문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5’, ‘동아일보’ 1925년 8월7일자) |
이용문은 대한제국 내장원경과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낸 이봉래의 아들이었다. 이용문 자신도 대한제국 정삼품 장례원 전례를 지냈다. 을지로 일대 3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고, 소문난 호색한이었다. 이용문과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자 윤심덕은 더 이상 조선에서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하얼빈으로 도피했다.
한참 당년에 경성 여류음악가로 갈채를 받던 윤심덕은 근래 낙산 부호 이용문의 애첩이 되어 황금정 거대한 가옥에다 거처까지 마련했더니 또 무슨 사단이 생겼는지 불과 한 달 만에 서로 갈라서서 이용문은 기첩(妓妾)을 데리고 강원도 방면으로 수렵(狩獵)을 가고, 윤심덕은 약간의 금전을 얻어 가지고 하얼빈(哈爾賓)으로 뺑소니를 쳤단다. 윤심덕이 하얼빈에 간 것은 이용문이 즐겨 피우는 아편 무역을 하러 갔는지 또는 아주 단발을 하고 홧김에 시베리아로 바람을 쐬러 갔는지 알 수 없다. 하여간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더니 윤심덕은 금전 앞에선 처첩의 구별이 없는 모양이다. 예술가인지 예술가(穢術嫁, 더러운 술수로 시집가다)인지. (‘예술가인가 예술가(穢術嫁)인가’, ‘개벽’ 1925년 2월호) |
하얼빈으로 도피한 윤심덕은 반 년 동안 배형식 목사 집에서 은거했다. 1925년 6월 윤심덕은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언니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귀국했다.
윤심덕이 이용문과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 김우진은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김우진은 문학과 연극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부친의 강요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상성합명회사는 김우진 집안이 소유한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는 회사였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떠맡은 김우진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낮에는 회사 일을 돌보고 밤 시간을 이용해 작품을 읽고 썼다. 부친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스캔들에 휩싸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윤심덕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배우가 된 성악가
1926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권했다. 조만간 집을 나온 후 극장을 차려 윤심덕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여배우를 기생처럼 여겼다. 여배우가 되는 것은 신세를 망치는 일처럼 인식됐기에 극단들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시절, 한때 악단의 여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윤심덕이 여배우가 되겠다고 자원해서 나서자 토월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피하기 위해 대구 일갓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여관에서 기거했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갓집에 간다고 집을 나간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모친은 열흘 동안 매일같이 광무대를 찾아와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모친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윤심덕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문으로 도망치듯 광무대를 빠져나왔다.
윤심덕은 여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몸짓은 둔하고 부자연스러웠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가끔 오쿠다 사진관 2층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에서 상경한 김우진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언니!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합니다. 수은정 오쿠다 사진관 2층에서 김우진 군과 공허한 살림살이를 꾸미고 지내며 가끔 남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길거리를 내다보던 형용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아마 지금은 천국의 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고해(苦海)를 내려다 보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다한한 윤심덕’, ‘삼천리’ 1938년 11월호) |
1926년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집을 나온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쿄로 건너갔다. 김우진이 도쿄로 떠난 지 한 달 후 윤심덕은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취입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1926년 8월3일, 윤성덕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은 도쿄에서 황급히 달려온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그 후 아무도 윤심덕과 김우진을 보지 못했다.
윤심덕 생존설의 진상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함으로써 한동안 잠복했던 윤심덕·김우진 생존설은 또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고 설명한다.
남의 소문을 잘 알기로 유명한 어떤 소식통은 다음의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를 부인하고 아직도 생존설을 주장한다. 첫째, 악단의 여왕이라는 존칭을 듣던 윤심덕의 성격이 본시부터 쾌활해 절대로 자살을 하지 못할 사람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정사했다는 1926년 8월 피아노를 공부하려고 미국에 건너간 피아니스트 윤성덕을 보고 “동생 성덕아! 내가 큰 성공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간 곳을 알리지 않을 터이니 그런 줄 알고 절대로 나를 찾지 말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간 것. 둘째, 그들의 정사 사건이 있은 후 양가에서 특히 김우진의 집에서 기어이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마 찾고자 부산, 시모노세키 등지에 있는 각 신문지상에 현상금을 내걸고 광고까지 내면서 시체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건 발생 후 5개년이나 지난 금일까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 셋째, 윤심덕의 집안에서는 아직도 칠십 노모가 생존해 있는 관계도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망을 부인해 지금까지 정식으로 발상하지 않은 것 등등.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이태리까지 가기만 하는데도 상당한 여비가 필요하겠거늘 하물며 산 설고 물 설은 이역만리 로마에서 악기점까지 경영하고 있다 하니 그들은 대체 무슨 돈을 가지고 이 같은 전대미문의 연극을 실행했을까? “윤심덕이 세상을 떠난 것과 같이 보이는 연극에는 적어도 어떠한 유력한 음반회사와 크나큰 밀약이 성립된 뒤의 일이다. 즉 김우진과 정사극을 연출하기 전 우선 ‘사의 찬미’라는 죽음을 암시하는 노래를 녹음해놓고 그후 즉시 정사극을 실행한다면 소위 악단의 여왕이라는 사람의 로맨틱한 정사극에 100퍼센트 이상의 흥미를 느낀 세상 사람들은 대체 ‘사의 찬미’란 어떠한 노래인가 하고 앞을 다투어가며 음반을 사갈 것이다. 그러면 음반회사의 배가 불러질 것은 물론이요그 대가로 윤심덕도 상당한 보수를 받을 것이니 두 사람이 이태리 로마로 가게 된 것은 실로 ‘사의 찬미’를 음반에 녹음해놓은 닛토레코드 회사로부터 ‘산송장’이 될 것을 조건으로 받은 보수금 3만원 때문이다.”라고 정말로 그 내용을 아는 것과 같이 말하는 친구도 있다. 그렇지만 윤심덕이 아무리 조선에서 인기가 있는 음악가라 하더라도 음반 한 장을 녹음하는 데 3만원씩이나 되는 막대한 보수금을 주었을 리가 있을까?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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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심덕과 김우진이 1926년 8월4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동반자살이 정사라는 믿음은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