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청 이전으로 더욱 침체된 경기
- 중견 건설업체들, 서울로 본사 옮겨
- 시민들 “기아차 파업은 절대 안 돼”
- “김대중·노무현 지지해 득 된 게 뭐 있나”
- 극도의 정치 불신…“대선후보? 누가 돼도 상관없다”
- 주상복합아파트 없고 미분양 아파트 넘쳐
- 교통체증 없어 유료 순환도로 외면
- “신랑감 ‘씨’ 말라 노처녀 여교사 수두룩”
2007년 5월17일 5·18민주화운동 제27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전야제 행사에서 시민들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횃불행진을 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여주인공 신애(이요원 분)가 계엄군과 시민군의 마지막 대치를 앞두고 울먹이며 가두방송을 한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던 관객조차 눈물을 쏟고 마는 애잔한 장면이다.
“말로만 듣던 ‘5·18’이 이 정도로 끔찍한 사건인 줄 몰랐어. 자기는 알았어?”
지난 8월 초. 서울 강남의 한 극장에서 ‘화려한 휴가’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선 20대 초반의 남녀가 나눈 대화다. 한때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민주화운동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던 시절을 지나 교과서에서 ‘배워야’ 하는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예기치 않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광주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화려한 휴가’는 개봉 16일 만인 8월9일 오전 40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빛고을. 예향(藝鄕). 광주 앞에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그러나 1980년 5월18일 이후 ‘5·18민주화운동’에 그 자리를 내줬다. 8월8일 오전 서울 용산에서 광주행 KTX에 몸을 실었다. 광주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곧바로 영화 ‘화려한 휴가’의 주 무대이자 광주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옛 전남도청(동구 광산동 금남로 소재)으로 향했다.
영화 속 27년 전 거리 풍경은 지금과 비슷했다. 영화 세트장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촬영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거의 그대로였다. 금남로 좌우에 길게 늘어선 건물들도 27년 전 광주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굳이 바뀐 것을 찾는다면 간판 정도.
썰렁한 ‘그날’의 거리
광주 시가지의 중심지이자 금융가인 금남로와 충장로는 썰렁했다. ‘화려한’ 휴가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오가는 사람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손님을 기다리는지, 더위를 피해 가로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지 도로 양쪽에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다. 택시들의 주·정차가 교통의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만큼 교통량도 적었고 택시를 이용하는 승객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물동이를 쏟아 붓는 듯한 소나기가 한두 차례 지나간 이후 습한 열기가 거리를 점령했다.
“전남도청이 (전남) 무안으로 옮기고 난께 사람들이 더 없지라우. 도청이 옮겨지기 전까지만 해도 여그가 이렇게 안 생겼제.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리고 그랬는디. 밤 8시만 되믄 깜깜해라우. 도청, 그거이 있을 때는 잘 몰랐는디. 없어도 이 정도일 줄은 예측 못했어라우. 생각했던 것보다 심허요. 김대중 대통령이 목포가 지역구인 자기 아들(김홍일 의원)하고 한화갑 의원 때문에 무안 쪽으로 도청을 옮긴 거 아니요. 서민들은 (무안으로의 도청 이전에 대해) 그런갑다(그런가 보구나) 생각하지만 광주 지식인들은 다들 DJ 욕을 하지라우. 그러잖아도 먹고살 것 없는 광주가 도청 이전 때문에 이렇게 팍 죽어 분 것 같소.”
택시기사 강대현(49)씨의 말이다. 동구 광산동 13번지, 옛 전남도청사는 109년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켜봤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이후 전남을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활동과 1919년의 3·1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민족의 자주권을 찾으려는 외침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전남도청은 광장 분수대와 함께 한국민주화운동의 본산이 됐다.
1986년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광주시에 대한 행정권을 내놓은 전남도청은 그 위상이 크게 약화됐다. 이어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 5월13일 대통령 특별담화로 전남도청 이전 결정이 발표됨으로써 광주시대 마감이 예고됐다. 도청 이전 발표 후 치열한 유치 경합이 벌어졌다. 1999년 1월9일 신(新)도청 소재지 용역결과 보고회를 통해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1000번지가 선정됐다. 새 청사는 3년9개월 동안의 공사 끝에 완공돼 2005년 11월 정식 개청했다.
지난 5월31일 건설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전국의 개별 공시지가는 평균 11.6%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광주시 동구는 전남도청 이전 여파로 공시지가가 1.4% 떨어졌다.
농번기 광주 경제는 ‘보릿고개’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옛 전남도청 앞에 세워진 ‘그날’이라는 제목의 조각.
“광주는 반(半)농업도시입니다. 전라남도 사람들이 농사지어서 광주에 유학한 자식들에게 보낸 돈이 광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농업도시나 다름없지요. 광주는 당최 먹고살 것이 없단 말이요. 강원도보다도 훨씬 못한 곳이 광주란 말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강원도에는 땅도 사고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투자도 하지만, 광주에 투자한다는 소리 들어봤습니까. 광주는 돈의 흐름이 막힌 지 오래됐어요. 광주에서 돈이 안 도니까 우미, 호반건설 같은 중견 건설업체들이 다 본사를 서울로 옮겼어요. 광주에서 돈 나올 데라고는 기아자동차와 삼성전자밖에 없다니까요. 기아차가 파업한다고 하면 광주시민이 두 손 들고 말립니다. 광주의 가장 큰 기업체인 기아차가 파업하면 광주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걸 알기에 시민들이 파업을 막는 겁니다.”
인테리어업에 종사하는 양상현(46)씨의 말이다. 농번기인 4~5월, 9~10월이 되면 광주시의 경제는 ‘보릿고개’에 가깝다고 한다. 전라남도에서 자식을 광주로 유학 보낸 사람들이 농사일에 바빠 광주를 드나드는 횟수가 줄어드는데다 광주에 ‘올려 보내는’ 돈이 줄기 때문이라는 것. 반대로 농한기에 접어들면 광주의 경기가 조금 살아난다. 농업으로 벌어들인 돈의 일부가 광주에서 돌기 때문이다.
양씨뿐 아니라 취재 중 광주에서 만난 주부, 교사, 의사, 식당·술집 주인과 종업원, 대학생, 시장 상인, 택시기사 등 40여 명의 광주시민은 한결같이 광주 경제의 어려움, 즉 일자리 부족을 지적했다. 이들은 “광주가 집값도 싸고 물가도 싸 ‘살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먹고살기’에는 안 좋은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광주를 찾는 정치인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호남 표심(票心)의 ‘핵심’인 광주의 표밭 관리에 신경 쓰는 정치인의 광주 방문에 광주시민의 반응은 냉담하다. 정치 문제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채널 돌려요!”
광주의 정치적 민심(民心)은 어떨까.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 박창래(71)씨는 입에 거품을 물고 전·현직 대통령과 대선 예비주자, 그밖의 정치인을 싸잡아 비난했다. 여·야 대선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정치를 제대로 해야 나라가 바로설 것 아니냐”며 “차라리 개(犬)가 나오면 개를 찍어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박씨는 “총선이든 대선이든 표가 필요할 때는 머리를 조아리며 구걸하다가도 뽑아주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당리당략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무리가 바로 정치인”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정치인들이 필요에 의해 ‘광주’를 활용하고는 사후관리를 빵점에 가깝게 한다는 것이다. 없는 돈에 대학 보낸 자식에게 취직할 일자리가 없는 것도 정치인 때문이라고 원망했다. “잘못된 정치 탓에 불쌍한 것은 국민이고, 죽어나는 것도 국민뿐”이라고도 했다. DJ에 대해서는 “이제 현실 정치에서 손을 떼고 국가원로로서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박씨에게 “기사에 실명을 넣어도 괜찮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내가 못할 말 했느냐, 틀린 말 했느냐”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이 더 이상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거듭 목소리를 높였다.
박씨의 얘기를 듣더니 주변에 있던 50~60대 남성 두 명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들의 생각도 박씨와 다르지 않았다. 여야 할 것 없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먹고살기 편한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들은 “대선주자와 정치인들이 지금의 광주시민을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할 당시의 광주시민으로 여기면 큰코다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광주에 득 된 게 무엇이냐. 오히려 배신을 당했으면 당했지 도움 받은 일이 뭐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광주시민은 김대중(97.3%)-이회창(1.7%)-이인제(0.7%) 순으로 지지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는 이회창(3.58%) 후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무현(95·18%)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취재 중 열다섯 차례 택시를 타면서 민심의 흐름을 가장 잘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진 택시기사들에게 정치와 대선에 쏠린 광주시민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이들의 얘기는 한결같았다.
“예전엔 택시 안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은지 의견을 나누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어요. 뉴스에서 정치인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 돌리라’는 손님도 많아요. 대다수 시민이 먹고살기에 급급해 정치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옛날 광주로 생각지 말라”
한때 젊음의 거리였던 충장로. 옛 명성을 잃은 이곳은 최근 도로포장공사까지 겹쳐 어수선하다.
한 전 총리는 김홍업 의원, 박광태 광주시장, 박준영 전남지사 등 김대중 전 대통령측 인사들을, 천 전 장관은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인사들과 팬클럽회원을 동반했다. 범여권 인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5·18을 상기시키는 이 영화를 통해 범여권의 ‘표밭’인 광주의 표심에 호소하는 것이 연말 대선에 득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들은 이들의 행동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마디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는 것. 일부 시민은 “옛날의 광주로 생각하지 말라”고 대놓고 거부감을 드러냈다. 5·18민주화운동이 또다시 대선 및 총선에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도 했다.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정치인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5·18 당시 MBC 기자이던 정 전 의장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며 “제가 그날 도청 앞에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우리는 더 이상 5·18 광주정신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결코 1980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광주정신은 광주를 털어버리고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갈 때 더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의 발언은 범여권 대선후보들의 집중공격을 촉발했다. 정 전 의장은 “광주는 덮어야 하는 과거가 아니라 진행돼야 하는 현재”라고 맞받아쳤다. 이해찬 전 총리는 손 전 지사의 발언에 대해 “민주화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온 말”이라고 일침을 가했고, 한 전 총리측은 “스스로 민주화운동 부분에서 떳떳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질세라 천정배 의원은 “정말 털어버리고 싶은 것은 지난 14년간 수구기득권 세력의 하수인이 돼 광주를 공격했던 자신의 과거가 아니냐”고 비난했다.
‘화려한 휴가’는 한국 영화로는 대작급인 100억원대 제작비를 들인 상업영화다. 5·18 당시의 비극을 택시기사, 간호사, 퇴역군인 등 지식인이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그렸다. 눈물과 웃음을 고루 등장시킨 전형적 대중영화 한 편에 대한 ‘영화 관람평’ 한마디를 놓고 대선주자들이 설전을 주고받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필자와 만난 40여 명의 광주시민 중 상당수는 정치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끄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했다. 지지하는 후보를 묻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손을 들어준 사람이 4명,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정동영 전 의장이 출마할 경우 찍어주겠다는 사람이 각 1명이었다. 또 7월26일 “총체적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통합민주당 조순형 의원에게 지지를 표명한 사람이 4명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거나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명박 전 시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경제를 살릴 것 같기 때문”이라고 지지 이유를 밝혔다. 조순형 의원을 지지한 4명은 “‘미스터 쓴소리’인 조 의원이 당 간판을 떠나 할 말은 하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할 만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을 듣다 보니 ‘민주당’이라는 ‘당 간판’이 조 의원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과 조순형의 인기
무작위로 만난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이명박 전 시장과 함께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인 조순형 의원을 8월9일 낮 광주시 서구 치평동 중도통합민주당 광주시당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대선출마 선언 이후 첫 지방 순회지로 광주를 택했다. 조 의원은 이날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5·18 영령의 명복을 비오며 5·18 정신을 계승해 자유민주 선진국 건설에 매진하겠다. 광주·전남은 민주화의 성지이자 민주당의 정치적 고향”이라고 적었다.
조 의원은 이날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를 방문, 민주당 전남도당 전진대회에 참석했다. 그에게 가장 먼저 광주를 찾은 이유를 묻자 “민주당의 뿌리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조 의원은 “광주시민들이 나를 어느 정도 지지하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광주시민들의 정치적 불신이 예상보다 훨씬 심하고 골이 깊다고 지적하자, 조 의원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한 행동을 한 데다 직업선호도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데 대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반성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고 정도를 지키는 정치도의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첫 지방 방문지로 호남을 선택한 것이 민주당의 전통적 텃밭인 호남에서 상승기류를 일으켜 지지율 도약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구상에 따른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여주인공 신애의 호소에 가장 귀기울인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이 정치적인 목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전남도청 이전 후 도심공동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금남로. 영화 ‘화려한 휴가’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광주시는 10여 년 전 서구 광천동 소재 전남중학교 이전 부지에 특급호텔을 지으려 했으나,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포기했다. 2005년 2월 옛 광주고속 부지에 추진되던 사업도 같은 이유로 투자자의 외자 유치가 이뤄지지 않는 바람에 실패했다.
아파트, 투자 아닌 주거 개념
2005년 6월 중앙공원 일대 개발사업이 환경단체의 반대로 중단되는 등 여러 차례 뼈아픈 경험을 한 광주시는 지난해 8월17일 시청 상황실에서 AMJ개발주식회사(대표이사 임광택)와 숙원사업인 특1급 호텔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 조인식을 가졌다.
광주 지역 중견 건설사 진흥건설의 자회사인 AMJ개발은 1000억원 이상의 사업비를 들여 200실 규모의 특급 비즈니스호텔을 김대중컨벤션센터 인근 6600여㎡(2000여 평) 부지에 건립할 예정이다. 광주시는 이 특급호텔을 추진하는 과정에 사업자가 공동주택 건립사업을 병행하게 해줘 특혜논란이 일고 있다.
광주시가 호텔과 인근 부지에 공동주택 건립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면서까지 특급호텔 건립을 추진하는 이유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국제회의도시’로 지정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특급호텔 등 국제회의 참가자를 위한 편의시설 부족’이 꼽혔기 때문이다.
“기업이 돈 되는 일에 왜 투자를 안 하겠습니까. 특급호텔을 지어봐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 안 짓는 것이지요. 호텔을 지어놓으면 그것을 이용할 사람이 있어야죠. 광주 사람이 이용하지 않으면 타 지역 사람이라도 와서 이용해야 할 텐데, 광주에 출장을 와서 호텔에 묵는 기업인이 많기를 하나, 그렇다고 특급호텔에 투숙할 관광객이 많기를 하나. 기존 특2급 호텔들도 죄다 부도나거나 운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누가 나서서 특1급 호텔을 지어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겠느냐는 겁니다. 특1급 호텔 하나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광주의 경제는 열악한 실정입니다.”
모 증권사 직원 김모(42)씨의 말이다. 광주시에는 타 광역시에 비해 없는 게 또 있다. 바로 주상복합아파트. 건설업체들이 주상복합아파트를 짓지 않는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주상복합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충분치 않은데다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광주 부동산 업계에서는 남구 봉선동 포스코더샵과 쌍용스윗닷홈을 이 지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로 손꼽는다. 건설교통부 아파트 실거래 가격에 따르면 봉선동 포스코더샵 126㎡(46평형)는 2분기에 두 채의 아파트가 거래됐는데, 거래가는 각각 3억6800만원(18층)과 3억8200만원(18층)이었다. 포스코더샵과 더불어 최고가 아파트로 이름 높은 쌍용스윗닷홈은 2분기에 156㎡(58평형)의 경우 4억3000만원(4층), 170㎡(64평형)는 4억7000만원(10층)에 거래됐다.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와 비교하면 주민들 말마따나 ‘껌값’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값이 급등하자 이 지역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극에 달했다.
시내 어디든 30분이면 충분
광주시민이 선호하는 택지지구인 상무지구와 풍암지구 32평형의 올해 2분기 아파트 실거래가는 1억1000만~1억5000만원. 전세가는 매매가의 70~80%다. 광주시민의 특징 중 하나는 집을 투자가 아닌 주거의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전세금과 매매가의 차이가 크지 않아 내 집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자 하는 실수요자의 구매율이 높은 편이다.
“대출을 무리하게 받아 집을 사거나 넓혀가는 현상이 거의 없어요. 집에 투자해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고요. 집값이 제자리걸음을 하는데다 대출이자보다 오름폭이 적으니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거죠. 집값이 오르지 않은 데는 공급이 수요보다 넘친 탓도 있지만, 대출받아 집을 산 다음 그 이자를 감당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도 집값 안정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초등학교 교사 김민아(34)씨의 말이다. 김씨는 서울의 집값이 ‘억’ 소리가 날 만큼 뛴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마치 딴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남편 따라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온 동료 교사가 ‘서울에서는 사람이 모였다 하면 집값과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데, 이곳에서는 아파트 값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며 의아해 하더라고요. 집값이 형편없는 데다 집에 투자해 큰돈을 벌거나 벌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화젯거리에서 빠진 지 오래됐는데, 그 교사가 광주사람들의 그런 정서를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일부 시민은 광주를 살기 좋은 도시로 치켜세우면서 ‘싼 집값’과 ‘교통 체증 없음’을 그 이유로 꼽았다. 매매가가 서울과 수도권의 전세금보다 싸 상대적으로 주거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삶의 질이 오히려 높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월급이 같은 공무원의 경우 서울보다 광주에서 사는 사람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유지한다는 얘기다.
광주시의 교통망은 타 광역시에 비해 월등히 좋은 편이다. 출·퇴근시간대에도 교통체증이 없을 만큼 도로망이 잘 갖춰져 있다. 취재를 위해 택시를 타고 아침, 낮, 저녁 할 것 없이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정체되는 구간을 거의 보지 못했다.
1971~89년 시내권을 순환하는 제1순환도로가 건설된 데 이어 광주 외곽을 연결하는 제2순환도로(37.66㎞)가 착공 15년 만에 완공돼 지난 5월15일 개통됐다. 이 순환도로가 뚫리면서 신창·수완·첨단·상무·풍암·지원·봉선·각화·두암·용봉 등지의 교통난이 개선됐다.
제2순환도로 4구간인 서창IC∼산월IC 6.5㎞ 구간. 이 구간의 통행료는 1000원이다. 8월9일 낮. 교통량이 적은 시간대이기는 하지만 이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교사 김씨는 “순환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도심을 관통해도 그리 차가 막히지 않아 순환도로를 이용할 때보다 겨우 5~10분 더 걸린다. 굳이 통행료를 내고 이용할 만한 가치가 없어 개통 석 달째 접어들고 있는 제2순환도로 일부 구간이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다고 있다”고 전했다.
“지역 대학보다 서울 3류 대학 선호”
한가한 곳은 제2순환도로만이 아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도 많지 않았다. 8월8일 오후 5시. 문화전당(옛 전남도청 앞)에서 상무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는 곳곳에 빈자리가 있었다. 승객은 주로 노인과 학생들.
평소 지하철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는 임소연(43)씨는 “광주는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아 시내 어디든 승용차로 30분 이내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주로 승용차를 이용한다. 차 있는 사람은 대부분 지하철 이용을 꺼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을지는 학부모들의 공통된 관심사다. 자녀교육 열풍은 광주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시 동구 장동. 학원가가 밀집한 이곳에는 중·고등학생의 발길이 잦다. 중·고등학생의 수학과 영어 단과학원비는 주중 3회의 경우 25만~30만원, 주말 2회는 20만~25만원이다.
고교 1학년과 2학년생 남매를 둔 장길순(43)씨는 한 달에 학원비로 100여만원을 지출한다. 용돈과 급식비 등을 포함하면 한 달 평균 150여만원이 자녀교육비로 들어간다. 장씨의 두 자녀는 영어와 수학 외 과목은 구청 등에서 운영하는 무료 인터넷 강의를 통해 공부한다. 대다수 친구가 ‘인강’이라 하는 인터넷 강의의 도움을 받는다.
“두 아이 모두 광주에 있는 대학엔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요. 성적에 맞춰 서울의 3류 대학이라도 가겠다고 해요. 386세대인 우리 때만 해도 전남대와 조선대는 4년제 대학으로 꽤 쳐줬는데, 요즘 애들은 지방대학을 나오면 취직하기 어렵다면서 아예 서울로 갈 생각을 하더라고요.”
김현정(22·대학 3학년)씨와 선혜림(22· 대학 2학년)씨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광주를 떠날 계획이다. 두 사람이 부모형제가 사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먹고살’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두 여대생의 한 달 용돈은 25만~30만원. 둘 다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 광주에서는 중산층에 속하지만 서울로 올라갈 경우 비싼 방값을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김양은 지난해 1년 동안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체류비용은 500여 만원.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행기 삯 100여만원을 마련했고 나머지 400만원은 부모의 도움을 받았다. 뉴질랜드에 정착한 지 5개월 후부터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는 그는 “친구 열 명 중 다섯 명은 3개월이나 6개월, 1년 등 형편에 따라 외국에 어학연수를 갔다 온다”고 귀띔했다.
“전혀 낯설지 않은 영화”
이들에게 “광주의 좋은 점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동시에 “뭐가 있지?” 하면서 상대방을 쳐다봤다. 김양이 “공기가 맑아서 좋다. 인심도 좋고. 그리고 무등산이 가깝고 집값도 싸다. 서울에 비해 생활비도 적게 든다”고 대답하고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멋쩍게 웃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봤느냐”고 묻자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어머니들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했다. 김양은 “어릴 때부터 ‘광주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전혀 낯설지 않은 영화였다”면서 “이 영화를 본 서울과 수도권 지역 젊은이들의 반응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했다.
광주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자리 없음’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다. 안정된 직장이 많고 일거리가 있으면 굳이 광주를 떠나 복잡한 서울 등지로 가서 살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일자리만 넉넉하다면 살기 참 좋은 곳이 광주”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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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부족은 인재 부족으로 이어졌고 결혼에도 영향을 끼쳤다. 광주·전남 지역의 여교사 중에는 유난히 노처녀가 많다고 한다. 교사는 남성이 결혼상대로 선호하는 직군 중 하나지만 이 지역에서는 제때 결혼하는 여교사가 많지 않다는 것. 여교사가 원하는 수준의 신랑감이 ‘씨’가 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역 여교사들이 선호하는 직종은 공무원과 공기업 종사자, 아니면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금호그룹 같은 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거든요. 서울과 수도권의 7급 이상 공무원, 또는 은행, 공기업, 대기업 등에 근무하는 남자와 결혼해 주말부부로 살아가는 여교사가 많아요.”
중학교 교사 박모(46)씨는 “그만큼 광주에 쓸 만한 인재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런 점이 광주 지역의 경제와 위상을 나타내는 바로미터 같다”며 씁쓸해했다.
“만만한 게 술집, 노래방”
경기가 시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광주시내에 산재해 있다. 광주의 오래된 재래시장 중 하나인 양동시장도 그 중 하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뜨거운 여름날임을 감안하더라도 시장을 찾는 손님이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장사 안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라우. 2002년까진 그래도 먹고살 만했는디 이후부터는 시장 경기가 영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요. 다들 주차하기 편한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지 않소. 재래시장 상인이 젤 먹고살기 힘들제. 대형 마트에 가보쇼,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 전 뉴스에서 보니께 광주가 인구 대비 대형 할인매장이 가장 많은 소비도시라고 합디다. 생산시설은 턱없이 부족한께 생기는 거라고는 마트밖에 더 있것소.”
썰렁하기만 한 금남로, 예전엔 젊은이들의 거리였으나 지금은 활기를 잃은 충장로, 사람들로 북적이던 대인과 양동시장, 첨단산업도시를 지향하며 만든 광산구 쌍암동 일대 첨단지구 등의 조용한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른 곳이 있었다. 광주시청과 KBS 등 관공서가 위치한 서구 치평동 상무지구 내 상업지구. 각종 술집과 모텔 등의 간판이 즐비한 이곳은 과연 광주 경기가 침체된 게 맞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8월9일 밤 10시경. 상무지구 내 상업지역에 있는 G룸살롱에는 8개의 방 중 6곳에 손님이 찬 상태였다. 4인 기준으로 술값은 80만~100만원(‘임페리얼’ 3병과 과일 안주). 룸살롱 주인 김모(38)씨는 “5~6년 전만 해도 공무원이나 힘깨나 쓰는 사람에게 접대하기 위해 술집을 찾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엔 그런 접대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맘에 맞는 친구끼리 즐기기 위해 술집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먹고살 만한 게 없으니 만만한 게 술집이고 노래방입니다. 이 동네가 화려해 보이기는 해도 문 열었다가 몇 달 못 가 업종 변경하는 가게들이 허다해요.”
광주의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는 마치 ‘화려한 휴가’를 마친 이후 피로에 잔뜩 지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긴 여행에서 오는 여독이랄까. 삶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광주시민들의 땀이 알찬 열매를 맺을 날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