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음식물 처리기 업계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주)루펜리 이희자(李熙子·53) 대표는 20년 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아왔다. 아내와 어머니로만 살아오던 그의 인생이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97년. 대기오염 측정기 등 친환경 제품을 제조하던 남편의 사업이 외환위기를 맞아 난관에 처한 것. 집안 곳곳에 경매 딱지가 붙고 사채업자들이 쳐들어와 난동을 부렸다. 그는 앞으로의 삶이 암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아이들(2남1녀)을 위해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은 그는 사채업자들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험악한 사채업자들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돈을 못 갚는다. 나눠서 갚을 테니 지금 우리집에 죽치고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달라. 저들이 집에서 나가야 남편과 내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올 것 아니냐.”
다행히 사채업자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그와 남편은 재기를 꿈꿀 수 있었다.
생활 속 아이디어에서 힌트
그는 여직원들을 내보내면서 일손이 부족해진 남편 회사에 나가 일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편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종의 ‘대리만족’으로 사업가 남편을 만났다고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
“1999년, 우연히 뉴스를 보다가 제 인생을 모두 걸 만한 것을 발견했어요. 2005년부터 음식물 쓰레기 직매립을 금지하는 법률이 시행된다는 소식이었죠.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일이 얼마나 고역인지, 살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거예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가 냄새나는 수거함에 집어넣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에요? 게다가 일반주택에서는 음식물 쓰레기 전용봉투가 다 찰 때까지 악취를 참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사업이야말로 앞으로 블루오션 시장이 될 것이라 확신했어요.”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남편은 극력 반대했다. 주부로서 집안일에만 전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남편 몰래 친구들로부터 돈을 빌려 자본금을 마련하고 전기기술자 한 명을 고용해 전화기와 컴퓨터 한 대를 들여놓고 제품개발에 나섰다. 그것도 남편 회사 한구석에 숨어 시작했다. 그것이 사업가로서의 첫걸음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남편이 결국 눈치를 채고 말았어요. 남편은 ‘이혼서류에 도장 찍자’며 으름장을 놓았죠. 하지만 그런 협박(?)도 제겐 통하지 않았어요. 제가 사업계획서를 들이대며 사업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니까 결국 체념하고 허락하더군요.”
처음 해보는 사업이라 힘들기는 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라 재미있고 행복했다. 하지만 자본금도 충분히 확보하지 않고 마이너스 상태에서 시작한 일이라 여기저기 빚도 많이 지고,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더구나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고 결혼 이후 살림만 하던 그였기에 기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더 이상 사업을 미룰 수 없겠다 싶어 음식물 처리기 업계의 성공모델인 일본 마루이치사의 기술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무작정 혼자 일본으로 갔죠. 수십 번을 찾아간 끝에 마루이치사 회장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거듭된 설득 끝에 어렵게 기술을 도입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물기가 적은 일본 음식문화에 맞게 만들어진 마루이치사의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는 국물이 많은 우리의 음식문화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몇 년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공기순환 건조방식’을 개발해 특허까지 냈다. 이 방식은 무를 말려 무말랭이를 만들고, 나물을 말려 보관하는 생활 속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렵사리 건조 기술을 개발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요. 악취가 더 큰 문제였죠.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수소문해 방법을 찾아봤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어요.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하고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일본의 한 회사가 냄새제거 기술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살았다’ 하면서 또다시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죠. 몇 번이고 계속된 협상 끝에 겨우 냄새제거 기술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49세, ‘딱 좋은 나이’
이희자 대표는 음식물 처리기로 국내외 각종 상을 수상하고 사업적으로 성공도 거두었지만 가족한테 인정을 받을 때가 더 기쁘고 행복하다고 했다.
200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음식물 처리기를 개발했다. 하지만 사무실을 얻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자 모두가 그를 만류했다.
“그때 제 나이가 마흔아홉이었어요. 주변에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에는 늦은 나이 아니냐고 걱정을 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가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아들이 군에 가 있고 딸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거죠. 더구나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어졌잖아요. 쉰 살이라고 해도 30~40년은 더 살 수 있을 테니 마흔아홉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품이 본격적으로 팔려 나간 것은 2년 뒤인 2005년부터였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입소문을 통해 루펜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판매실적을 올릴 때마다 그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통장을 보여주면서 “봐라, 할 수 있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러자 가족들도 그를 믿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소문을 통해 매출이 늘어가는 만큼 여기저기서 유사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OEM) 계약을 한 대기업에서 1년이 지나도록 물건을 가져가지 않은 채 시간을 끌다가 유사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은 일도 있었다. ‘대기업의 횡포’를 실감했다.
“직원들 월급을 제때 못 주는 상황까지 몰린 적도 있어요. 그렇게 되자 좋은 조건을 내세우며 사업을 넘기라는 곳도 있었어요.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았고 제 사업과 직원들을 지켜냈어요.”
그는 판로를 넓히기 위해 고심 끝에 건설사 대표들에게 편지를 썼다. 루펜을 만들게 된 계기와 루펜의 효용성을 설명하고, 주방 옵션으로 루펜을 채택하면 아파트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건설사 담당자들의 집을 찾아가 루펜을 무료로 설치해주면서 직접 사용해보고 결정해달라고 설득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사업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방식대로 한 것이 효과를 거뒀죠. 얼마 후 유수의 건설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사에서 짓는 아파트에 루펜을 설치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렇게 첫 판매가 이뤄진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신규 건설 아파트들이 앞 다투어 루펜을 빌트인(built-in)으로 채택한 것이다. 덕분에 루펜은 아파트 빌트인 음식물 처리기 시장에서 점유율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빌트인 시장 장악
지난해부터는 건설회사뿐 아니라 음식점이나 공공기관에서도 계약 요청이 줄을 잇고 있다. 삼성전자 디지털프라자에도 입점하게 됐고, 일본 캐나다 미국 스위스 싱가포르 등 해외 진출도 본격화했다. 해외 영업조직이 전무한 상태에서 따낸 해외계약들은 그가 직접 발로 뛰어 얻은 성과물이다. 덕분에 지난해에는 판매 2년 만에 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중동으로도 진출할 예정이다. 그는 “음식물 쓰레기를 사막에 매립하고 있는 중동은 우리에게 거대한 황금시장”이라며,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7월부터는 홈쇼핑으로도 시장을 넓혔다. 첫선을 보이던 날 방송 1시간 만에 2000대를 판매하는 등 7월 한 달 동안 3차례 방송을 통해 5000대가 팔려 나갔다. 그는 “목표를 훨씬 넘어섰다”며 “가격을 10만원대로 낮추고 디자인에 특별히 신경을 쓴 전략이 적중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30만~70만원대의 비싼 가격 때문에 소비자가 음식물 처리기 구입을 망설였던 모양이에요. 가격을 낮추니까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된 거죠. 또한 작은 크기와 화이트, 핑크, 블랙, 라이트그린 등의 세련된 컬러, 그리고 아이팟을 연상시키는 독특하고 심플한 디자인도 소비자에게 어필한 것 같고요.”
루펜은 냄새는 물론 소음 걱정도 없고, 전기료도 적게 든다. 매일 사용한다 해도 한 달 전기료가 2000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 설치와 사용이 간편하다는 점 또한 루펜의 인기 요인이라고 한다.
“루펜은 싱크대 내장 등 복잡한 설치 과정이 필요 없고 그냥 어디서든 전원만 연결하면 돼요.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를 넣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이죠. 주부들은 기능이나 조작이 복잡한 가전제품은 꺼리잖아요. 그래서 무엇보다 주부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제가 20년을 살림만 하던 주부였기에 누구보다 주부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었죠.”
건조식인 루펜은 분쇄식과 달리 뼈조각 등 딱딱한 것을 분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150℃ 이상의 열풍 건조로 음식물 쓰레기 부피를 평균 5분의 1 정도로 압축해주기 때문에 월 2~3회만 배출바구니를 비워주면 된다.
잇달아 터진 상복
지난해 그는 발명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상을, 독일 국제발명품 전시회에서 은상과 특별상을, 올해에는 제네바 국제발명·신기술 및 신제품 전시회에서 금상과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상복이 터졌다. 하지만 그는 갖가지 상을 받은 것보다, 그리고 사업이 성공한 것보다 가족들로부터 진정으로 인정받은 것이 더 기쁜 일이라고 말한다. 특히 딸은 “엄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해 그를 더없이 행복하게 했다.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아내와 어머니로서 사는 것도 행복했지만, 그때는 2% 부족한 게 있었어요. 지금 비로소 ‘완전한 나’를 찾은 것 같아요.”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건조된 음식물 쓰레기를 연료로 전환하는 사업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그리고 루펜리를 최고급 오디오의 대명사 뱅앤올룹슨 같은 명품 브랜드로 키워내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통이 크면서도 섬세하고, 이성적이고 판단이 빠르면서도 더없이 감성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춘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