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미래에셋 10년’, 빛과 그림자

자기자본 225배 초고속 성장… ‘연못 속 고래’ 운명 피할까?

  • 홍찬선 머니투데이 경제부장 hcs@moneytoday.co.kr

    입력2007-09-10 2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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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외환위기의 숨가쁜 한계상황에서 첫발을 내디딘 미래에셋은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왔다. 전체 개인금융자산의 5%, 주식형 펀드의 30%를 오로지하는 눈부신 성과를 일굴 수 있었던 것은 박현주 회장의 공격형 경영전략과 상황대응방식 덕분. 그러나 위상과 규모가 커질수록 그간의 성공비결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은데….
    ‘미래에셋 10년’,  빛과 그림자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남이 가지 않는 곳을 뚫어 성공한 무서운 아이들(enfant terrible)이다.”(40대 직장인)

    “펀드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결과가 말해주지 않는가. 미래에셋의 경쟁력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

    “이제 미래에셋 주식형 펀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가구 1펀드 시대를 앞당긴 것도 미래에셋이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곳도 미래에셋이다.” (시중은행 펀드판매 담당자)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언뜻 낯간지러울 수 있는 이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은 그 주인공이 미래에셋이기 때문이다. 은행을 중심으로 한 간접금융 시대에서 자본시장을 뼈대로 하는 직접금융시대로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의 주역이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1997년 7월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한지 10년. 그간 미래에셋은 계열사를 8개나 거느린 금융그룹으로 가파른 성장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왔다. 자산운용사, 증권회사, 캐피탈은 직접 설립해 업계 선두그룹으로 끌어올렸다. 생명보험 분야에서는 SK생명을 인수해 변액보험시장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 인도에는 현지 자산운용회사를 설립했다. 창립자인 박현주 회장은 증권회사 샐러리맨 브로커에서 아이디어와 추진력만으로 금융계의 기린아로 부상하는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재벌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산운용, 증권, 벤처캐피탈, 생명보험 등을 아우르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이룩함으로써 자산운용업계는 물론 자본시장을 리드하는 구실까지 하고 있다.



    창업 10년 만에 한국 자본시장에서 선두로 뛰어오른 미래에셋그룹의 경영지표는 눈부시다. 미래에셋그룹 8개 계열사의 자기자본은 2조2564억원(2007년 6월말 현재). 불과 10년 만에 창업 당시(미래에셋캐피탈의 100억원)보다 225배로 키운 것이다. 미래에셋 금융계열사가 갖고 있는 고객자산은 7월13일 현재 71조4171억원에 이른다. 전체 개인금융자산(약 1400조원)의 5%가 넘는 규모다. 미래에셋의 주식형 펀드 설정잔고는 20조6050억원(7월13일 기준)으로 전체 주식형 펀드의 30.8%나 된다. 이쯤 되면 미래에셋을 제외하고 한국의 자본시장을 얘기하기는 어려울 지경이다.

    이뿐만 아니라 미래에셋증권의 주가는 8만1000원(8월10일 종가)으로 증권회사 가운데 가장 높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상장회사는 무려 31개(2007년 6월말 현재). 수탁고가 1조원이 넘는 펀드만 해도 10개나 된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2004년 1월2일에 선보인 미래에셋3억좋은기업주식K-1. 순자산액은 2조5260억원(7월13일 기준)이며 설정일 이후 누적수익률은 136.7%다. 2001년 2월에 선보인 미래에셋인디펜던스주식형(순자산액 1조5481억원)의 누적수익률은 683.1%, 같은 해 7월에 판매된 미래에셋디스커버리주식형(순자산액 1조1516억원)의 누적수익률은 무려 712.4%나 된다.

    성공의 방정식

    미래에셋의 성공요인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운(運)이고, 둘째가 미래의 변화흐름을 정확히 내다보고 대응해온 CEO, 즉 박현주(朴炫柱·49) 회장의 능력이다. 셋째는 로열티(loyalty) 강한 인재들, 넷째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도전정신(animal spirits)이다.

    우선 운부터 짚어보자. 미래에셋의 빠른 성장에는 확실히 운의 요소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정권교체를 들 수 있다. 199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야당이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196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부터 40년 가까이 유지되던 영남권 보수정권은 호남권 진보정권으로 교체됐다. 이에 따라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파워 엘리트의 재편이 이뤄졌고, 금융감독원과 금융감독위원회에도 호남 출신이 대거 요직에 등용되어 미래에셋의 활동공간이 넓어졌다.

    또 하나의 운은 경쟁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3대 투신’으로 자산운용시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한국-대한-국민투자신탁이 사실상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업계 1위로 부상한 삼성투신운용도 리스크 관리 등 ‘몸조심’에 바빴다. 경쟁자는 있으나 경쟁은 없는 상황이다 보니 미래에셋의 독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박 회장 본인도 미래에셋의 성공이 100% 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농담이 섞인 말이지만, 30년 전에 창업했더라면 100% 실패했으리라는 것이다. 부동산 중심의 가계 자산이 주식시장으로 이동해 자산운용 중심의 미래에셋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다.

    ‘미래에셋 10년’,  빛과 그림자

    ‘좌 재상 우 현만’. 미래에셋 10년 성공신화를 이끌며 박현주 회장의 양팔 노릇을 해온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왼쪽)과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

    하지만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건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호조건은 다른 자산운용회사나 증권회사에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온라인 증권회사 가운데 키움증권이 2위와의 격차를 벌이며 크게 앞서 나간 것은 키움만의 독특한 성장 DNA가 있었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미래에셋이 다른 자산운용회사나 증권사보다 빠르게 성장한 것을 운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 3인방’ 중 한 명으로 ‘박현주펀드’를 운용한 이병익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는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이 운이 좋아서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너의 열정과 ‘승부근성(killer instinct)’, 고객을 중시하는 운용시스템 구축 등이 더 큰 성공 요인이었다는 설명이다.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지르는 킬러 본능은 아무나 갖고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박 회장은 의사결정을 즉흥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일단 결론이 나면 과감하게 실행한다. 지금 미래에셋그룹 본사 건물로 쓰고 있는 한국유리빌딩을 매입하던 2000년 당시를 돌아보자. 주위에서는 모두 부동산 경기가 어렵다며 말렸지만 박 회장은 수개월 고민한 뒤 단안을 내렸다. 나중에 보니 당시 매입가격은 최저가였고, 잔금을 치를 때는 이미 많이 올랐으며, 지금은 매입금액의 3~4배 이상으로 올라 있다.”

    ‘군주론’과 ‘제3의 물결’

    미래의 변화흐름을 정확히 내다보고 대응하는 CEO 박현주 회장의 능력에 관한 ‘신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미래에셋캐피탈은 1999년 여름 코스닥의 다음커뮤니케이션에 24억원을 투자해 그해 겨울 1000억원가량의 ‘대박’을 터뜨렸다. 이 자금은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증권 설립은 물론 미래에셋그룹의 급속한 발전을 위한 종자돈으로 쓰였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1998년말 국내 처음으로 뮤추얼펀드를 선보였다. 지금은 박 회장이 로비를 해서 뮤추얼펀드 인가를 받았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당시에는 뮤추얼펀드가 잘 안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펀드에 가입한 뒤 1년 동안 돈을 찾을 수 없는 폐쇄형 뮤추얼펀드는 단기 투자에 익숙한 고객들의 니즈(needs)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박 회장은 “당시 주가지수가 충분히 낮고 운용시스템을 잘 짜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고, 결국 성공시켰다.

    국내 최초로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한 과정도 마찬가지다. 자산운용업은 한국 회사들이 선진 외국회사들의 운용 노하우를 배워 한국에서 영위하는 ‘내수산업’이라는 인식을, 해외로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산업’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2005년 6월에는 SK생명보험도 인수했다. 생명보험이라는 업종 자체를 단순히 보험료를 받아 사고를 당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에서 벗어나 투자회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시각에 바탕을 둔 결정이다. 변액보험과 퇴직연금 등에서 우수한 투자성과를 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는 것이다.

    미래에셋의 모기업인 미래에셋캐피탈 설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던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은 “박 회장은 창업하기 5년 전부터 착실히 준비했다”며 “남이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박 회장의 능력이야말로 미래에셋 고속성장의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박 회장 자신은 이런 능력의 원천이 독서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건강하던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삶과 학과 공부에 회의를 느낀 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케네디와 키신저의 자서전을 대여섯 차례 읽으며 전략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십 수 차례 읽으며 미래 흐름을 읽어내는 눈을 키웠다는 것이다.

    ‘左재상 右현만’

    박 회장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주식투자에 눈을 돌렸다. 모친이 1년 생활비를 한꺼번에 보내주면 그 돈으로 명동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주식투자를 익혔다. 26세이던 1984년에는 사설 투자자문회사인 ‘내외증권연구소’를 설립했다. 남보다 일찍 주식투자를 시작했고 누구보다 먼저 주식투자에 분석을 도입했던 박 회장은 동양증권과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업실력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많은 인재를 이끄는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능력이 있으면서 로열티도 강한 인재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선보인 뮤추얼펀드를 운용하기 시작했을 때 미래에셋의 인력 구성을 보면 박현주 회장의 성공에 인재가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박 회장은 33세의 나이에 동원증권 중앙지점 최연소 지점장,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등을 거치며 전국 증권사 중 약정 1위를 기록한 신화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다. 여기에 박 회장의 오른팔로 불리는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전 동원증권 서초지점장)은 증권영업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능력을 발휘했다. 박 회장의 왼팔로 통하는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전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은 펀드 운용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여기에 정상기 맵스자산운용 사장을 포함한 세 사람은 박 회장에 대한 신뢰가 높아 박 회장의 꿈과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삼각편대의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게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금은 미래에셋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는 송상종 피데스투자자문 사장, 김영일 한화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이병익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 선경래 GNG인베스트 대표 등은 한국 자산운용업계를 대표하는 펀드매니저들이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을 창업했을 당시에는 ‘박 회장보다 한참 앞섰다’고 한 김형진 전 세종증권 회장은 “박 회장은 사람을 잘 써서 성공한 반면 나는 유능하고 로열티 강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인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미래에셋 안팎에서는 박 회장의 ‘사람 욕심’에 관한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송상종 대표는 “박 회장은 꼭 필요한 인재라고 여기는 사람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스카우트해온다”고 말한다. 평상시에 접촉하면서 일을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공을 들여 언젠가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인다는 것.

    김영일 펀드매니저를 한국투자신탁에서 스카우트해 ‘박현주펀드’를 운용하는 대표 펀드매니저로 발탁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김영일 매니저는 당시 한국투신에서 박종규 매니저(현 현대해상투자자문 대표)와 함께 ‘드림팀’을 이뤄 높은 수익률을 내던 대표 펀드매니저였다. 박 회장은 “새로 선보이는 뮤추얼펀드가 조기에 정착되려면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내는 게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김영일 매니저가 최고”라는 평가를 내려 과감하게 스카우트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영일 매니저는 스카우트를 제의한 박 회장에게 ‘펀드운용의 자율성 보장과 펀드의 적정규모 확보’를 요청했다. 김영일 본부장은 “목표로 하는 펀드규모가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1000억원이라고 하길래 그 정도면 괜찮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합류를 결정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박현주펀드는 500억원 규모의 1호 펀드가 2시간30분 만에 매진되고 5호까지 3500억원어치가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병익 대표도 “박 회장은 평상시에는 냉정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후배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꼼꼼하게 챙겨준다”며 “대우증권 투자분석부 대리 시절 아버지가 전신마비로 쓰러지셔서 고향에 내려가 근무하던 중에 한남투자신탁에서 운용역(과장)을 모집했다. 이때 박 회장이 추천장을 써줘서 펀드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 인연으로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뮤추얼펀드를 처음 선보였을 때 이 대표도 합류해 박현주펀드를 운용했다.

    현재 미래에셋증권의 인사 및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변재상 이사도 박 회장이 투자자문 시절 거래하던 삼성증권 과장이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도전정신도 성장을 이끈 주요인으로 꼽힌다. 첫걸음부터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 그간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1998년 9월 뮤추얼펀드가 허용되자마자 3개월도 지나지 않아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인 ‘박현주펀드1호’를 내놨다.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한 뒤 수수료율을 대폭 인하했고, 증권회사로서는 처음으로 자산종합관리계좌(Wrap Account)를 선보였다. 자산운용회사로서는 처음으로 리서치팀(In House Research)을 만들었고,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했다.

    올바른 투자문화를 정착시키고 확산하기 위해 투자교육연구소를 설립했고, 적립식 펀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증권사들이 비용을 축소하기 위해 지점을 줄여 나가는 동안 지점 수를 확대하는 차별화 전략도 추진했다. 앞으로도 현재 82개 수준인 증권지점을 200개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도전정신과 함께 후발주자인 미래에셋을 업계 선두로 끌어올린 힘으로는 철저한 일등주의 경영전략과 기업문화를 들 수 있다. 과거 미래에셋에 몸담았던 한 임원은 “외부에서 볼 때나 새로 입사한 직원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놀랍게도 미래에셋 내부에는 ‘1등은 당연한 것이고 2, 3등을 하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돼 있다”고 회고했다. 한동안 미래에셋의 광고카피로 사용되던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라는 문장도 수익률 1등에 대한 자신감과 1등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담고 있다.

    1조원 이상 미래에셋 주식형 펀드 (2007년 7월13일 현재)
    펀드 설정일 순자산총액(억원) 설정일 이후 누적수익률(%)
    3억좋은기업주식K-1 2004년 1월2일 25260136.7
    3억만들기솔로몬C-A 2003년 12월31일 23451172.7
    3억인디주식K-1 2005년 1월18일 19206146.6
    디스커버리주식형2호 2005년 11월1일 1686892.8
    인디펜던스주식형 2001년 2월14일 15481683.1
    차이나솔로몬주식C-A 2006년 3월20일 1473598.6
    인디펜던스주식형2호 2005년 1월17일 12911150.3
    솔로몬AP컨슈머주식 2006년 6월1일 1229343.0
    디스커버리주식형 2001년 7월16일 11516712.4
    솔로몬AP인프라섹터주식2007년 2월23일 1013432.7
    *자료 : 미래에셋자산운용


    고속성장 후유증 우려

    미래에셋이 창업 후 10년 동안 이룬 성과는 엄청나다. 누가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 임직원들이 아니었더라도 그런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미래에셋의 고속성장 에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성공 DNA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증권사 사장은 “지금 추세대로 나가면 미래에셋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금융그룹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도 “재벌이나 은행의 후광 없이 자생적으로 급성장했다는 점에서 박수받을 만하다”며 “생명보험회사를 인수해 증권-자산운용-생명보험-캐피탈로 연결되는 비즈니스 포트폴리오를 완성한 것은 획기적”이라고 평했다.

    여기에 국내 주식형 펀드로의 쏠림 현상에 따른 후유증에 대비하기 위해 해외펀드로 돈의 물꼬를 튼 것도 새로운 블루오션의 창출과 리스크 분산을 함께 추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이렇듯 미래에셋의 성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이를 시샘하는 경쟁사들조차 미래에셋의 성공 DNA를 치밀하게 연구해 벤치마킹에 나설 정도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별도의 팀을 구성해 미래에셋의 성장과정과 펀드운용 노하우 등을 장시간 연구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제 미래에셋을 무시하고서는 한국 자산운용 업계를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셋의 성장속도가 빨라질수록, 웃자란 벼가 비바람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처럼 ‘고속성장 후유증’에 시달릴 우려도 적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판매·운용 전략과 박현주 회장에게 집중된 1인 경영체제 등은 경영환경이 변할 때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미래에셋의 ‘공격적인 운용 및 판매전략’은 자주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수탁고 확대와 수익률 올리기에 급급해 단기 매매 등 대형 기관투자자답지 않은 운용전략을 구사한다는 것. 강세장에서는 수익률 상승효과를 보지만 하락장을 만나면 타격이 불가피할 수 있다는 우려다. 1998년 선보인 박현주펀드 1호는 100% 안팎의 높은 수익률을 올렸지만, 박현주펀드 2호는 2000년에 통신주와 IT주 버블이 꺼지면서 30~40%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런 아픔이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자산운용회사 대표는 “리딩 기업에 대한 단순한 질시라고 생각하지 말아달라”며 “미래에셋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지속될 경우 현재와 같은 고속성장이 오히려 덫이 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도 “미래에셋 주식형 펀드가 22조원을 넘어서고 지분율이 5%를 넘는 종목이 31개나 될 정도로 증시 영향력이 커졌는데도 운용전략은 여전히 과거처럼 공격적”이라고 지적했다. 운용규모가 커질수록 수익률 극대화보다는 수익률 변동성 최소화에 중점을 두어야 증시 안정에 도움이 되는데, 아직도 수익률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증시 변동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국준 대한생명 부사장(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거론하는 ‘연못 속 고래’ 이론과 연결된다. 고래가 작을 때는 연못에 미치는 영향이 작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지만, 고래가 커짐에 따라 더는 그 연못에서 살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펀드 규모가 작을 때는 주가가 오르면서 수익률도 높아지고 다시 자금 유입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나타나지만, 펀드 규모가 커질수록 투자대상도 줄어들고 수익률을 실현하기 위해 주식을 팔 경우 주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날의 칼, 1인 체제

    강점으로 통하는 박현주 회장의 1인 중심 경영 시스템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래에셋 10년의 성공 = 박현주 회장의 능력과 리더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박 회장은 미래에셋의 초고속 성장을 가능케 한 엔진이었다. 그만큼 미래에셋에서 박 회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박 회장은 지금까지 중요한 고비마다 탁월한 선택으로 미래에셋의 급성장을 일궜다. 하지만 박 회장 한 사람에게 집중된 과도한 영향력은 자칫 화를 부를 수 있다. 1999년 하반기부터 2000년 상반기에 걸쳐 미래에셋이 통신주와 IT주식에 과감하게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박현주펀드를 운용했던 김영일 한화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이 이에 대해 어렵게 입을 뗐다.

    “1999년 12월 박현주펀드 2호를 모집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펀드운용을 맡지 못하겠다고 했다. 통신주와 IT주식 등의 주가가 너무 올라 추격매수하기에 부담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표 펀드매니저가 펀드를 안 맡겠다고 하니 회사 내부에서 난리가 났다. 결국 최현만 사장과 박현주 회장의 설득으로 펀드운용을 맡기로 했지만,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게 사실이다.”

    당시는 김 본부장이 시장을 보수적으로 보고 주식투자를 자제하던 시기였다.

    펀드시장에서 미래에셋의 비중 (단위 : 10억원, %, 2007년 7월말 기준)
    구분 미래에셋(A) 자산운용업계 전체(B) 미래에셋 비중(A/B)
    전체 펀드 27630 263252 10.5
    전체 주식형 22275 74613 29.9
    전체 적립식 펀드 9964 32606 30.6
    전체 주식형 적립식9778 25872 37.8
    *자료 : 자산운용협회


    “박현주펀드 1호를 운용할 때 만기 2개월 전에 주식편입비율을 20%까지 줄였다. 그 덕에 종합주가지수가 1000에서 600까지 빠지는 동안 펀드는 종합주가지수보다 한때 15%포인트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주가가 너무 빠져 반등할 것에 대비해 콜옵션을 10% 샀다. 만기 때 주가지수가 800까지 오르면서 추가수익률이 8%포인트로 줄었지만 보수적으로 본 덕분에 추가수익을 낼 수 있었다.”

    만일 이 무렵 박 회장이 김 매니저의 의견을 받아들여 펀드 판매를 늦추거나 판매규모를 줄였더라면 2000년 말 박현주펀드 2호를 결산하면서 마이너스 30~40% 수익률 때문에 투자자의 항의를 받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 된다’고 말하지 못하는

    미래에셋은 2000년 IT 버블 당시 라이코스코리아와 인젠 등에 투자해서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이 결정도 다음커뮤니케이션에 투자했다가 1000억원대의 이익을 올렸던 박 회장의 결정에 대해 아무도 ‘안 된다’는 의견을 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한 적이 있다.

    “포털이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다음을 팔아 차익을 남긴 뒤 라이코스에 투자했다. 포털에서 철수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CEO인 정문술씨를 보고 투자결정을 내렸는데 그가 중도에 그만두는 바람에 손실을 입게 됐다.”

    박 회장의 인재등용 방식에도 빛만 있을 수는 없다. 창업 동지인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사장과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창업한 지 얼마 안 돼 합류한 정상기 맵스자산운용 대표 등은 박 회장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는다. 그들이 이런 대우을 받는 것은 박 회장의 말이라면 그대로 믿고 따르는 충성심 덕분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짐을 싸서 미래에셋을 떠났다. 송상종 대표는 공동 창업한 지 6개월여 만에 자기 사업을 위해 이별했다. 김영일 매니저는 선진운용 노하우를 더 배우기 위해 KB자산운용으로 옮겼다. 이병익 매니저는 독자사업을 위해 짐을 쌌다. 선경래 매니저는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김영일 본부장은 “미래에셋을 떠난 것은 ING가 대주주로 있는 KB자산운용으로 옮겨 운용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일화도 어렵사리 들려줬다.

    “창업 때 함께한 사람들처럼 이너서클(inner circle)에 포함되지는 않더라도 특별한 차별은 없었다. 부부동반 야유회를 가거나, 회식도 바를 전세 내어 모두 한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2000년말에 자산운용회사 대표를 맡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운용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대표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 ‘No’한 것에 대해 섭섭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1999년 말 부부동반으로 제주도에 갔다. 그때 집사람이 박 회장에게 ‘이 사람이 지금 잘 하지만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박 회장은 이에 대해 ‘쉬게 해주고 유학도 보내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2000년에 펀드 수익률이 마이너스 30%를 넘자(이것도 종합주가지수 하락률에 비해선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유학을 6개월만 보내준다고 하길래 가지 않았다. 2001년에는 임원 연봉도 50% 삭감했다. 박 회장은 그렇게 비즈니스맨으로서 철저한 사람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 매니저들은 휴일이 거의 없다. 박 회장이 휴일에 수시로 회사에 나와 증시 동향과 향후 전망 및 투자전략 등에 대해 물어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일등 자산운용회사로서 22조원이 넘는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을 업계 선두수준으로 유지하려면 휴일도 쉬지 않고 연구해야 한다’는 박 회장의 원칙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휴식 없이 이어지는 과중한 업무는 과로를 유발하고 과로는 자산운용의 안정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분위기가 못 되는 것이다.

    펀드운용과 지배구조의 투명성

    ‘참외밭에서는 신발 끈을 고쳐 매지 않고, 배나무 밭에서는 갓끈을 다시 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으로 공연한 시비에 휩싸이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도덕수준이나 책임은 훨씬 높아지고 커진다. 이른바 ‘보복폭행’으로 과중한 벌을 받고 있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해도, 재벌회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국민정서법’에 따라 무거운 벌을 받는 것이다.

    미래에셋이 자산운용과 관련해 심심치 않게 시비에 휘말리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지분율 5%가 넘는 기업이 31개나 되고 주식형 펀드 수탁고가 22조원에 이르는 업계 최고의 현금동원력을 무기로 브로커와 애널리스트들에게 자사의 펀드 수익률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지적이다. 미래에셋이 산 종목에 대해 유리한 분석보고서를 내도록 종용한다는 의혹도 자주 제기된다. 펀드매니저들 사이에서는 ‘미래에셋이 사면 주가가 오른다’거나 ‘미래에셋이 어느 종목의 주가를 관리한다’는 소문이 빈번하게 흘러 다닌다.

    이런 의혹과 소문은 그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래에셋의 성공을 시기해 나오는 ‘유명세’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셋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래에셋의 지배구조가 박현주 회장 1인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지적도 무시하기 어렵다. 현재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지분율 65.22%)과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79.81%)의 최대주주다. 또 미래에셋캐피탈 지분도 34.77% 보유하고 있다. 미래에셋캐피탈은 미래에셋증권(39.74%)과 미래에셋생명(59.67%)의 대주주다. 결국 박 회장은 의결권(주식)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하게 미래에셋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박 회장이 미래에셋캐피탈 및 증권과 자산운용을 창업했고 생명보험 등을 인수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미래에셋의 급속한 성장에는 박 회장과 미래에셋의 노력 외에도 고객과 한국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래에셋 성장의 과실과 미래의 추가적인 성장의 리스크는 박 회장 혼자가 아니라 사회와 고객이 함께 나눠야 한다는 지적에는 분명 타당성이 있다. 다음은 금융 애널리스트 출신의 한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가 소개한 미래에셋증권의 공모가에 관한 일화다.

    “2006년 2월에 상장된 미래에셋증권 공모가는 4만8000원으로 결정됐다. 당시 공모가 산정을 위해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기업설명회(IR)를 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미래에셋증권 적정주가가 적어도 8만원은 넘어야 한다고 분석하던 때였다. 하지만 나는 공모주 청약을 하지 않았다. 미래에셋증권이 갖고 있던 미래에셋자산운용 주식을 모두 박현주 회장에게 넘긴 것은 미래에셋증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아시아 대표 자산운용회사’

    사람과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에 대한 평가도 각도에 따라 크게 다르다.

    현재로선 긍정적인 평가가 부정적인 평가보다 훨씬 강하다. 박현주 회장과 미래에셋그룹은 한국 자본시장 역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빛이 강할 때는 그림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빛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그림자는 점점 커지고 짙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빛이 약해질 때 그림자를 짧고 옅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하우다. 박현주 회장이 그런 교훈을 잊지 않는다면 미래에셋의 지속적 발전은 이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박 회장은 “한국에서 자산운용회사의 리더가 되겠다”는 꿈을 지난 10년 동안 이뤘다. 이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산운용업계를 이끄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1년 중에 절반은 중국 홍콩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외로운 밤’을 보내고 있다. 이렇다 할 술집이 없는 인도에서는 공항 면세점에서 산 양주로 호텔 방에 혼자 앉아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며 ‘왜 이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조건

    박 회장이 고된 과정을 거쳐 아시아를 대표하는 자산운용회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과거의 성공 경험이 미래의 실패 원인으로 작용하는 오만(hubris)과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신이 불가피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다.”

    카네기 자서전에 나오는 이 글귀는 박 회장이 동원증권 중앙지점장 시절 지점훈(訓)으로 내건 말이다. 박 회장은 이 교훈에 따라 지금까지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해 앞으로만 달려왔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도록 계속 페달을 밟은 셈이다.

    양(量)과 질(質)은 대체관계이면서도 보완관계다. 질이 뒷받침되지 않는 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고, 양이 따라 붙지 못하는 질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양과 질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박 회장의 꿈이 실현되는 것은 단순히 미래에셋이 성공하는 것뿐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박 회장과 미래에셋이 자꾸 구설에 오르는 것에 대해 박 회장은 몇 안 되는 세 가지 실패 중 하나라고 밝힌 적이 있다. 젊을 때는 이런 구설에 발끈했지만 요즘은 그런 견제와 감시가 오히려 약이 된다고도 했다. 박 회장이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과 미래에셋에 제시되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아시아 대표 자산운용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액션플랜을 세워 실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창업 후 10년의 성공을 앞으로도 10년, 100년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는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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