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아홉, 작은 화랑에 발을 내디딘 뒤 불가능에만 도전했다. 한국 미술이 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때 해외시장을 찾았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표 값을 청하는 화가에게 조건 없이 돈을 내줬다. 외환위기 때 오히려 멋들어진 화랑을 지었다. ‘미술은 사회 공헌’이라는 일념으로 달려온 미술 인생.
이호재(李皓宰)란 이가 화랑계의 신화라는 건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신화란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룬 이에게 붙여지는 수사다. 1983년 인사동에 가나화랑을 처음 연 이래 그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가나화랑의 25년 역사는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진다. 전시실 하나짜리 화랑도 꾸려 나가기 벅찬 한국 미술계 현실에서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장흥아트파크를(서울, 뉴욕, 파리의 작가 아틀리에는 빼고라도) 거느린 가나의 약진은 실로 눈부신 감이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화랑계에 뛰어들었다. 모험적으로 시도하는 일 투성이였으나 그가 한 국내 최초 기획은 죄다 전례 없는 성공을 거뒀다.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는 건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작가들 중엔 그의 광팬이 수두룩하다는 소문이었다. 신화가 탄생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신화의 속살
1983년 이후 지금까지 그는 국내외에서 400회 이상의 진지하고 참신한 기획 전시를 개최했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아트페어 피악(FIAC)에 참석한 것은 1985년이다. 88서울올림픽 이전이라 한국 작가의 작품을 세계시장에서 판매하기란 하늘에 별 붙이기(하늘에 별을 붙이는 건, 장대를 이용할 수 있는 별따기보다 몇 배 더 어려운 일임을 아는 사람은 알리라)였다.
무엇보다 코리아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기 이전이었다. 국제 미술시장에 우리 작가의 그림을 들고 나가도 팔릴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호재 회장은 서둘렀다.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한국작가가 해외 미술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후 20여 년간 그는 우리 작가의 작품을 들고 대규모 국제아트 페어에 80여 차례 넘게 쫓아다녔다. 정열과 수월찮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세월을 지난 결과는? 국제 미술시장에서 한국 미술은 이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일부 작가의 작품들은 전람회 기간 내에 동이 날 정도다.
“1996년과 1997년 바젤과 피악에서 우리 화랑 출품작들이 ‘솔드 아웃(sold out)’됐어요. 그게 아마 한국 미술 약진의 시작이었을 겁니다”라고 말할 때, 그의 얼굴엔 한 점도 팔지 못하고 철수하던 아픔까지를 품은 자랑스러움이 넘쳐 난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신화를 좋아한다. 역사 너머의 신화를 사랑하는 만큼 살아 있는 신화를 동경하고 주목한다. 그렇지만 그 선망과 찬탄 뒤엔 얼마간의 질시가 따르는 것 또한 세상의 법칙이다. 악의 없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도 흔하다.
가나화랑과 이호재 회장은 외로운 선두에 섰던 까닭에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안아야 했다. 그 모든 것에 나는 관심이 있었다. 신화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코앞에 북악산을 마주한 방에서 이호재 회장과 마주앉았을 때 나로서는 당연히 질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 매출액 수백억을 올리는 미술품 경매회사와, 거기서 단 한 번 전시회를 여는 게 꿈인 화가가 줄 서 있는 최상급 화랑과, 수십명 작가를 지원하는 아틀리에를 가진 이의 이미지가 어때야 한다는 공식 같은 건 물론 없다. 그 모습이 얼마간 노회하거나 권태롭거나 권위적이라도, 대개 우리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뭐랄까, 소년 같았다.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솔직한 눈과 맑은 호기심, 낯선 사람의 방문이 어색해 다소 허둥지둥하는 태도, 자신에게 붙여지는 거창한 단어들을 거북해 하는 담백한 몸짓이 두루 그랬다.
일단 나가자, 그리고 보자
소속 작가의 그림 앞에 선 이호재 회장. 이 회장은 “해외 거물 화상과 교류하면서 세계시장 진출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고려화랑에서 그의 임무는 고객을 직접 방문해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말이 판로개척이지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으니 문전박대가 일상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재계 인명록을 구해 그걸 동네별로 정리하는 일, 요즘말로 하자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다. 차츰 어느 동네 어느 모퉁이에 어느 회장 집이 있는지를 훤히 꿰게 됐다. 이른 새벽 그 집 앞에서 주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일주일쯤 기다리면 회장님과 대면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특유의 친화력과 성실함으로 한두 점씩 그림을 팔았다.
그러면서 재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혔다. 신뢰도 생겼다. 오히려 고객을 통해 그림 보는 안목도 늘어갔다. 성실하고 유능하고 정직한 이호재를 찾는 고객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동업하던 친구 염기설(현 예원화랑 사장)과 걸핏하면 화랑의 미래를 설계하곤 했다. 요즘 표현으로 둘은 젊은 벤처기업인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건 국내시장에서의 성공이었다.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국내시장에서는 이미 궤도에 오른 화랑이 여럿이고 유명 화가는 전속화랑이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해외시장이 궁금했다. 바깥 구경이 하고 싶었다. “기왕에 힘들 거라면 큰물에서 힘들자” 싶었다.
마침 세계를 돌 수 있는 1999달러짜리 티켓이 있었다. 고려화랑을 퇴직했다. 퇴직금으로 북반구 일주 비행기 티켓 두 장을 샀다. 일단 두 번을 돌자. 그러면 뭔가 보이겠지! 파리, 런던, 뉴욕, 도쿄로 일정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첫 번째 도착지인 파리에서 그는 두 번 놀란다. 미술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르누아르, 세잔 같은 거장의 작품들이 화랑에 버젓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거래도 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놀란 건 파리에 상상보다 많은 우리나라 작가가 작업하면서 살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100명 이상의 재불 작가가 작업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림만 그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에겐 작품 판매는 고사하고 전시회 참여의 기회조차 없었다.
훗날 (1990년대 후반) 해외 아틀리에 를 뉴욕에 둘까 파리에 둘까 고민할 때 파리를 선택한 것도 이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화가들이 최소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세계를 돌며 해외 미술시장의 가능성을 직감한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의 화랑을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그게 1983년이다. 가나화랑이라고 인사동 모퉁이에 자신만의 간판을 걸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한다는 의미로 가나라고 이름지었다.
해외 거물 畵商과의 우정
가나화랑은 지금 세계적 규모의 화랑으로 성장했다. 직원이 100명을 넘는 화랑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 처음에 이호재 회장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한창 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니 고객에게 피해를 줘서도 안 되고 사생활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화랑주의 삶의 핵심은 작가들과의 관계이니 작가에 관한 얘기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개인적 삶에 관한 부분은 한 10년 후에나 털어놓겠다고 했고 나는 동의했다. 권위적이지도 음흉하지도 않은 성격이라 인터뷰 도중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는 일단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그의 성공비밀은 막강한 해외 네트워크에 있는 것 같다. 세계 여행에서 돌아와 가나화랑을 설립해놓고도 그는 대부분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다니엘 말링규(Daniel Malingue),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부르노 비쇼버거(Bruno Bisoburger), 바이엘러(Beyeler) 등 거물 화상(畵商)들과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들은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눈빛을 가진, 수줍지만 열정적인 이 동양 청년에게 호감을 가졌다. 무엇이든 도와주지 못해 애를 썼다.
그중 다니엘 말링규는 인상파 작품을 거래하는 화상으로 이호재 회장이 만난 최초의 국제적 미술계 인사였다. 그는 부르델, 로댕, 샤갈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제 미술시장의 큰 고객이던 일본 컬렉터들에 대한 비즈니스를 이 회장이 맡아주기를 기대했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사업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록 한국에서는 국제 미술시장 정보가 없어 말링규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의 판로를 구축할 수 없었지만.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FIAC에서 세계적 작가 자오우지와 함께했다.
매그(Maeght)재단과의 인연도 이 회장에게는 의미가 깊다. 가나화랑이 안정기에 들어선 1991년쯤 그는 해마다 여름이면 남프랑스에 위치한 매그재단을 방문했다.
“매그는 세계적 미술관과 문화재단을 가진 화상으로 남프랑스 방스에 별장이 있었어요. 그의 선친은 1930년대부터 2차대전 전후까지 칸딘스키, 샤갈, 미로, 자코메티, 레제 등 서양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관리하고 소장했던 인물이죠. 아들 애드리앙 매그가 내게 여름이면 방스에 레오 카스텔리가 찾아온다고 말해요. 그를 만나기 위해 유명 화랑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온다고도 하고….”
레오 카스텔리야말로 미술계의 큰손이었다.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프랭크 스텔라,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탐 웨셀만 같은 굵직한 작가들이 다 그에게 작품을 줬다. 이호재 회장에겐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그해 여름 방스에서 레오 카스텔리와 만난 이호재는 이들 작품을 국내에서 전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1995년 즈음부터 가나화랑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짐 다인,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전시는 방스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 만난 유명 화상 중 부르노 비쇼버거도 있다. 그 역시 앤디 워홀, 바스키아, 바르셀로, 엔조 쿠키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이 회장은 바르셀로와 엔조 쿠키의 국내 전시를 추진했고 비쇼버거는 흔쾌히 수락했다. 바르셀로는 화폭의 새로움을 보여줬는데, 소말리아의 움막에 아틀리에를 두고 캔버스에 비도 맞히고 행인의 발자국도 찍어가며 학대하는 과정을 작업에 포함시켰다. 그의 그림을 나는 이 회장과 동행한 장흥아트파크 전시장에서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인간에겐 의식과 무의식이 있지요. 그린다는 의식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려진 그림이 더 강렬하고 매력 있다는 걸 바르셀로에게서 느껴요. 여기 원숭이 형상이 보이지요. 이 작가에게 동양식으로 치면 원숭이띠라고 말해줬더니 내 말대로 여기다 원숭이 한 마리를 그려놨네요.”
“작가에 투자하라”
초창기 가나의 힘은 그런 큼직한 국제 전시에서 비롯됐다. 일련의 국제전이 가나화랑에서 개최된다. 부르노 비쇼버거의 협력으로 열린 1993년 바르셀로전, 매그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열릴 수 있었던 1994년의 미로전, 그리고 이 회장의 큰 조언자인 바이엘러의 컬렉션을 통해 개최된 1995년의 추상표현주의전과 자코메티와 현대조각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안젤름 키퍼를 후원하고 있던 바이엘러는 이 회장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당신이 가진 작품들을 팔아서 작가를 지원하라. 작품을 소장하기보다는 작가에 투자하는 것이 화랑 본연의 임무다. 만약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돈을 잃더라도 당신은 명예를 얻을 것이다.”
국제적인 화상뿐 아니라 해외 작가와의 만남도 빈번했다. 그중에서도 이 회장에겐 1980년대 중반 중국계 프랑스 작가인 자오우지(趙無極)와의 만남이 가장 인상 깊었다. 자오우지는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국제무대에서 성공한 작가였다. 그런 자오우지가 첫 만남에서 “동양인으로서 해외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가나 같은 화랑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며 “대만이나 중국에선 언제 ‘무슈 리’ 같은 화랑주가 나타날까”라며 끌어안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
자오우지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국내에서 외국작가 작품 거래 시장이 막 태동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 2만~3만달러에 팔리던 자오우지의 그림이 지금 100만달러를 호가하고 있어요. 우리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어야 합니다. 살아서 100만달러를 받는 화가가 5명 정도는 있어야…그래야 우리 미술계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어요.”
카라라의 결심
인사동에 화랑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종로경찰서의 형사가 그를 찾아온다. 뜻밖에 그 형사는 이 회장에게 작가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종로 제주은행 2층에 조그마한 화실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전병현이란 작가를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20대 후반이던 그보다 나이가 어린 작가였다.
전병현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싶은데 비행기 삯을 지원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호재는 기꺼이 지원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다른 약속도 계약도 없었다. 이 회장의 첫 번째 작가 지원이었다. 그리고 전병현과의 인연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회장의 화랑계 생활은 ‘올 오어 낫싱’, 즉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의 남은 꿈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후 현대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자코모 만주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출장을 갔을 때 또 다른 경험을 한다. 통역을 구하기 위해 작가 한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바로 조각가 한진섭이었다. “이탈리아 공항에 도착한 직후 한진섭과 차를 마시게 됐는데 주변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잔뜩 있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한진섭이 ‘티날리아 카라라는 대리석 산지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곳에서 조각을 하는 한국 작가가 많다’고 해요. 그때 8명의 작가가 카라라에 있었는데 조각가 유영교 외에는 국내 화랑에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였죠. 한진섭을 통해서 유형택을 만나게 됐는데 그는 한국화랑에서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워하더군요.”
유형택의 화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 회장이 그곳을 방문했다는 소식은 한인 작가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날 저녁 김동우, 현혜성, 박은상, 이양자 등의 작가들이 찾아왔고, 이 회장은 밤을 새워 그들의 작업실을 돌았다. 집도 없이 한국 돈으로 월세 3만~7만원짜리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창작에만 몰두하는 그들에게 이 회장은 감명받았다. 화랑 창업 초기 뉴욕에서 한국 인기 작가들에게 받았던 설움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유명 작가만 좇는 것이 화랑의 일은 아니다. 화랑의 역할을 내가 새롭게 만들어 보자.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작가가 크면 화랑이 크고 화랑이 크면 작가를 더 많이 지원할 수 있다. 작가와 화랑은 경쟁관계다. 서로 간의 긴장이 나라 전체의 예술 수준을 높여간다.”
그날 카라라에서 이 회장은 가나화랑의 운명을 깨닫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해외미술뿐 아니라 한국 작가를 육성해 세계적인 작가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첫 번째 선택은 한국화가 박대성이었다. 그에게 한 달 30만원씩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30만원이면 당시 어지간한 샐러리맨의 월급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전에 박대성 선생을 만났을 때 자신이 가족의 생계에 상관없이 평생 작품에 전념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가나화랑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뉴욕에 살면서 가나의 지원금을 받았던 박영남 선생과도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유학자금을 마련하러 선친이 모은 작품을 들고 이 회장을 찾았던 사람이다. 이 회장은 그림을 한 기업의 고문에게 팔아 판매금 2000만원을 쥐어줬다.
“어느 해 파리를 거쳐 뉴욕에 가서 곰탕집에 들렀는데 거기서 영남이 형과 딱 마주친 거예요. 아틀리에에 따라가 보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 그림 한 점을 샀지요.”
그 만남 이후 작가 박영남도 가나의 전속작가 리스트에 올랐다. 박영남 작가에게 이 회장이 오늘에 이르게 된 비결을 짚어보라고 했더니 그는 “건망증”이라고 말한다. 작가에게 지원금을 보내면서 가나가 특별히 요구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계약서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매달 정해진 액수를 입금하되 3년이 지나도 5년이 지나도 가타부타 아무런 요구도 독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건망증 아니면 그게 될 일입니까. 작가들이 대개 예민하고 자존심 센 사람들인데 그런 태도를 잊을 리 없지요. 더욱 치열하게 작업할 수밖에요. 작품이 엔간해지면 다들 싸들고 가나화랑으로 찾아오는 거지요.”
건망증은 바꿔 말하면 자존심일 수도 있겠다. 이호재는 작가들과 오랫동안 더불어 살아 이제 반쯤은 작가가 됐다. 아니 기질 자체가 창조적 성향이 강하다. 지금껏 해온 일을 보면 알 만하다. 말없이 지원금을 거르지 않고 보내는 것, 그건 건망증을 빙자한 자존심이고, 그 자존심에 작가는 작품으로 대답하는 아름다운 길항작용을 반복한다. 그게 가나 발전의 원동력이다. 들여다보면 사실 신화도 뭣도 아니다. 오랫동안 공들이고 정성을 바친 결과가 있을 뿐이다.
성공 비결은 ‘건망증’
현재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작가들 중에는 가나가, 그리고 이 회장이 10년 혹은 20년 전부터 지원해온 이가 많다. 그간 말없이, 건망증 걸린 듯 푹 잊고 작가의 생산물을 기다려온 결과가 이즈음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날 가나에 전속된 뜨는 작가들, 사석원, 전병현, 권순철, 고영훈, 배병우의 약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아직 별 반응을 얻지 못한 작가도 많다.
시장의 관심이 곧 작품의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래서 결과에 상관없이 더 오래 기다려줄 작정이다. 화랑 규모가 커지는 게 다행인 건 그런 뱃심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화랑에 전시해도 몇 점 팔리지 않던 권순철의 그림이 올해 미술품 경매에서 부상한 것은 정말 충격적이에요. 시꺼먼 얼굴을 그려대는 권순철의 작품을 전시했더니 딱 두 점이 팔립디다. 하도 미안해서 할 수 없이 내가 대작 몇 점을 샀지요. 그게 몇 배로 올랐으니 안 팔린 게 차라리 복이라고 할까요?”
그럼 이 회장은 어떻게 작가를 고를까. 그 대답이 절묘하다. “나라면 어떤 그림을 그릴까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작가 박영남씨는 “이 회장의 성공 비결은 작가를 후원하고 까맣게 잊는 ‘건망증’ ”이라고 말했다.
좋은 작가는 누굴까. 당장 대답이 나왔다. ‘그의 방에 걸린 그림이 누구 것일까’는 내 최대 관심사였다. 첫날은 오수환이 세워져 있다가 다음날은 유영국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물론 그 방은 몇 년 동안 한 그림을 걸어두는 우리 집과 달리 수시로 그림이 바뀌어 걸린다.
“유영국 선생은 경복고등학교 선배예요. ‘자네 어려우면 내 그림 가져가게’하시며 내가 가장 힘들 때 도와주셨던 분이에요. 그림이 정말 좋지요?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는 고영훈과 오치균이고 내게 충격을 준 이로는 파리에서 개념미술을 하는 안종대와 바르셀로를 꼽을 수 있습니다.”
최근 호황을 맞고 있는 미술시장과 작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작품이 안 팔리던 시대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좋은 작품이 미술계에 남겨져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세상은 참 공평합니다. 그래서 재미있어요. 한 작가의 작품이라도 미술계가 어려울 때와 여유로울 때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떤 게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을까요? 시장이 좋을수록 작가에겐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작가가 중심을 잡아야 해요.”
고속도로 비유도 재미있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를 놓는다고 해보죠. 단순하게 요약하면 전체 거리를 측량하고 자갈 깔고 아스팔트 깔고 마무리 작업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작가는 서울에서 수원까지 당장 고속철을 놔버려요. 그래서는 부산까지 못 가요. 천천히 자갈을 까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1996년 여름, 파리로 이응로 선생을 찾아간 것은 그의 삶 가운데 중요한 대목이다. 서울에서 온 화랑 주인이라고 소개하고 1985년 가나화랑에서 전시했던 샤갈전 포스터를 보여드렸다. 그러나 이응로 선생은 영 불안해했다.
한국 거장과의 만남, 그리고 인연
“나를 중앙정보부에서 그림을 뺏으러 온 사람인 줄 아시더라고요. 작품이 남게 되면 이응로라는 이름도 따라 남을 테니 정부가 자신의 작품을 몽땅 빼앗아 폐기하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계셨죠. 그림을 보고 싶다고 청했더니 이층에 올라가셔서 두루마리로 말아놓았던 그림들을 펼쳐 보여주시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끈해지데요. 낯선 땅에서 혼자 매달렸을 먹 작업들, 광주를 상징하는 군상…. 좀 울먹거리고 있었더니 나중에 선생이 그러시대요. ‘콜라주’라는 말과 눈이 벌게지는 걸 보고 정보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다고. 집 앞에서 스파게티를 사주셔서 얻어먹었지요.”
하지만 당시는 한 화랑의 힘만으로는 이 선생 작품을 국내로 가져올 수 없을 만큼 경직된 시절이었다. 그래서 호암미술관에 의뢰해 대대적인 회고전을 개최했다. 이응로라는 화가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최근 대전 이응로미술관 설립에도 참여해 선생 작품을 100여 점 이상 한국에다 남기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 미술가 중 제일 저평가된 사람으로 그는 이응로와 문신을 꼽는다.
“문신 선생님이 프랑스에 남아 작업하셨더라면 더 큰, 세계적 예술가가 됐을 겁니다. 저는 선생의 열정적 컬렉터예요. 장흥아트파크 내에 문신의 불빛조각뿐 아니라 아예 갤러리 한 동을 통째로 문신조각 전시장으로 꾸몄습니다.”
이중섭의 친구였던 김병기 선생은 이 회장이 그의 인품을 흠모해 가까워진 사이다.
“당신의 그림을 두고 이론이 가장 정확한 분입니다. 이우환 선생이 추상에서 이론가라면 김병기 선생은 구상에서 탁월한 이론을 구축하셨죠.”
최종태 선생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작가다.
“당시 최종태 선생과 유영국 선생의 작품은 화랑가에서 도대체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객이 원해서 최종태 선생을 찾아갔죠. 그런데 최 선생이 선뜻 ‘나, 자네하고 일하겠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작품값을 얼마나 드릴까요’하니까 ‘그걸 자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하시며 관리를 일임하셨어요. 하루는 네덜란드 컬렉터인 쉘턴 부부가 한국을 방문해 문예진흥원 앞에 있는 최종태 선생의 작품을 사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마침 피악(FIAC)에 제출할 작품을 포장 중이었는데, 이건 피악에 나갈 거라고 했더니 이 부부가 피악 오픈날 와서 대작 다섯 점을 모두 사가는 겁니다.”
지금도 그의 방으로 가는 길 한켠에 최종태 선생의 꿈꾸듯 고요한 조각이 서있다.
내가 선택한 미술
1984년 즈음 일이다. 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새로운 기획으로 젊은 작가들의 성지였던 구기동 서울미술관에 임옥상 전시를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프랑스 유학 중이던 작가가 생활고를 겪고 있으니 작품 한 점 사달라는 게 본론이었다. 그리고 둘둘 말려 있던 그림 한 점이 펼쳐졌다.
“잠깐 숨이 막히더군요. 정말 흥분됐어요. 그렇게 강렬하고 힘찬 그림은 자주 만날 수가 없지요.”
그날 한 점이 아니라 세 점을 샀다. 값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고. 300만원 정도 준 것 같다. 한꺼번에 여러 점을 구입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이후 인사동 덕원미술관에서 ‘그림마당민’ 설립기금을 위한 민중작가전이 개최됐다. 역시 유홍준 청장과 함께 전시를 구경 갔다가 신학철을 비롯한 작가 20여 명의 작품을 보게 된다. 당시 소품 기준으로 30만원(전시가는 50만원)이었는데 한 자리에서 600만원을 주고 20점을 몽땅 구매한다.
“화상의 처지에서 보면 우선 남이 관심을 갖지 않던 미술이라 찬스가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대개 새로운 화풍은 역사적인 고난을 당할 때 생겨납니다. 민중봉기가 미학의 흐름을 바꿔놓죠. 민중미술은 우리 미술사상 보기 드물게 외래 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장르입니다. 우리 미술을 세계시장에 내놓을 때 가장 뚜렷한 특징이 민중미술에 있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해요. 요즘은 민중미술이란 이름 대신 ‘1980년대 리얼리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그 시절 ‘현실과 발언’ 동인 작가들은 그림을 통해 정말 치열하게 사회와 싸웠거든요.”
민중미술 작품 숫자가 많아지면서 하나의 컬렉션이 형성됐다. 이즈음 서울시립미술관이 작품 구입의사를 전해왔다. 이 회장의 컬렉션 중 7점을 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화상으로서는 절호의 판매 기회였다. 20년 가까이 구입만 했지 한 번도 유통 기회가 없었다는 건 화상의 처지에서만 보자면 잘못된 투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토록 정성껏 모아온 컬렉션에서 7점이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게 열정을 바쳐 수집한 민중미술 200점을 그는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 임옥상, 신학철뿐 아니라 강요배, 김정헌, 오윤, 이종구, 박불똥, 민정기, 오치균, 전수천, 황재형, 홍성담을 비롯 이응로와 박생광까지 아우르는 최고의 컬렉션이었다.
“그림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은 공공미술관에 기증하는 겁니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자산입니다. 미래에 남겨야 할 유산이죠. 수집가가 그림을 모으는 것은 개인 기호를 넘어 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혼자 감춰두고 보자고 그림을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국 컬렉터는 예술품을 보존했다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되돌려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미술품 거래에 세금감면 혜택은 필수입니다.”
역발상으로 돌파하다
자본주의의 첨단인 미술품을 사고팔아 이윤을 남기는 화랑이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보존해서 다시 사회에 돌려준 사건은 당연한 순서 같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엔 1980년대 대표적 민중미술 작품들이 가나아트 컬렉션이라는 라벨을 부착한 채 전시돼 있다.
2003년 가나화랑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그는 또 한 번 의미 깊은 기증을 한다.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이 원화(原畵) 한 점 없는 속 빈 강정이란 말을 들었어요. 서귀포시가 마티스나 샤걀미술관 덕분에 세계적 문화휴양도시가 된 니스처럼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동안 모은 이중섭 유화 2점과 드로잉 1점, 은지화 2점, 엽서화 2점을 기증한다. 가격으로 따지면 엄청난 규모다. 이중섭의 남은 그림이 많지 않으니 박수근,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이응로, 하인두, 김병기, 한묵 같은 이중섭 친구들 작품 40여 점까지 함께 기증해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컬렉션이 전시돼 있다.
그는 연신 새로운 일을 벌여갔다. 전 재산을 털어 번번이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의 정신으로 도전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1997년 말 찾아온 외환위기는 이 회장에게도 시련이었다. 국제아트페어에 10여 년 동안 꾸준히 참여하면서 쌓아온 공이 한순간에 스러질지도 모를 위기가 엄습했다. 이미 판매한 작품을 되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한국에 소장된 해외 작품을 헐값에 사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비참했다. 게다가 파리 가나보부르갤러리를 정리한다는 낭설도 퍼져 작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도 거꾸로 치고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역발상! 거꾸로 생각하면 늘 길이 열렸다. 참신한 돌파구가 보였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지탱해줬다.
어려운 시기에 우린 거꾸로 모양새를 갖추자, 가나의 중심을 새롭게 만들자! 밀린 그림값 대신 평창동 산자락의 허름한 땅을 돌려받았다. 원래는 조형물을 보관할 창고를 지을 예정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프랑스 건축가 빌모트가 서울에 왔길래 땅을 보여줬다. 그가 대강 긁적거린 크로키가 몹시 맘에 들었다. 집은 외환위기 기간에 지어졌다. 가장 단순하게, 가장 아름답게, 가장 쓸모있게!
주변에선 어려운 시기에 화랑이 이렇게 클 필요가 있느냐고 난리였지만, 고깃집이나 예식장은 이보다 큰 게 얼마나 많은데 화랑은 크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느냐며 정면 돌파했다. 그동안 국제 미술시장에서 받은 설움과 억울함을 제대로 갚고 싶었다.
과연 가나는 머잖아 국내외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가 이 회장과 가나아트센터를 대서특필했고, 이후 한국을 방문하는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은 반드시 가나아트센터에 들렀다
2003년은 가나가 출범한 지 딱 2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그는 한불 문화교류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가 주는 예술문화훈장을 받았고, 동시에 이중섭 작품을 기증받은 서귀포시민이 주는 명예 서귀포 시민증을 받았다. 20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이 회장이 이뤄낸 일들을 상징하는 증서들이었다.
2004년 말, 더 정확히는 12월31일 그는 다시 한번 거대한 일을 벌였다. 이전과는 규모가 다른 놀라운 프로젝트였다. 경기도 장흥에 복합문화단지 장흥아트파크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립 미술관은 장흥토탈미술관이다. 그 자리를 대규모 문화단지로 만드는 일이 요즘 이 회장의 큰 과제다. 장흥아트파크는 지금 착착 진행 중이다.
이호재 회장을 따라 장흥에 가던 날, 나는 실재하는 조물주를 봤다. 그의 구상에 따라 한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늦게 얻은 예쁜 딸 상미와 온 세상의 어여쁜 상미 친구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 세계적 거장의 작품들을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 인접 문화 장르들이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여유로운 별천지였다.
그는 인부들 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림들을 옮겼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주저앉아서도 보고 엎드려서도 봤다. 박영남 선생과 나는 뒤에 서서 흉을 봤다.
“저 짓 하는 게 좋아서 평생 화랑을 해왔을 거야.”
“마지막 꿈은 작가”
작가창작 아틀리에를 시작하게 된 데는 숨은 사연이 있었다. 1988년 창간한 ‘가나아트’는 민중미술작가 소개와 함께 진보적인 필자들의 예리한 텍스트를 실어 2000년 폐간하기까지 12년 동안 성격 있는 미술잡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미술계의 전문인력으로 키우던 기자들이 3~4년 지나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1년에 1억원씩 고스란히 적자가 누적됐다. 미술잡지 발행은 갤러리 운영과는 또 다르게 미술문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 적자 대신 시작한 것이 작가창작 아틀리에다. 장흥엔 러브호텔을 개조해 40명이 입주 가능한 아틀리에가 지어지고 있다.
오는 9월 그는 코엑스몰에서 옥션쇼(Art Auction Show in Seoul)를 개최할 계획이다. 옥션은 침체된 미술시장의 돌파구다. 작품이 전혀 팔리지 않던 1990년대 후반, 작가들에게 그리고 컬렉터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까가 그의 큰 고민이었다. 문득 해외출장 때면 빠지지 않고 들렀던 미술품 경매장이 떠올랐다. 뉴욕과 런던에서 개최되는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는 화랑을 통한 미술품 유통과는 규모와 수준이 달랐다.
가격이 소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도 매력이었다. 뭔가 묘책이 될 것 같다는 판단으로 그는 1998년 서울옥션을 창립한다. 미술품 가격의 투명성과 객관성을 확립하고 그림 거래의 선진화를 이뤄내려는 목적이었다. 역시 모험에 속하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수요는 엄청났다. 그동안 서울옥션은 100여 차례의 경매를 치렀다. 차츰 고객들이 몰려들었고 거래액의 증가는 물론 최근엔 매번 낙찰률이 80%를 넘고 있다. 그간 2만점 이상의 작품 가격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고 그걸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중이다. 10년이 채 안 된 현재, 미술품 경매는 미술품 유통의 중심이 됐다. 그에게 두 가지만 더 묻기로 한다. 한국 미술의 미래와 그의 남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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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달러에 거래되는 생존작가가 늘어나는 것은 해외 미술관에 소장되는 작가가 늘어난다는 바로미터다. 요즘 같은 추세라면 예상보다 빨리 그런 날이 올 것 같다. 이호재 회장이 그 일에 힘을 보탤 것이고 그건 한국 미술의 자존심이다. 그리고 그의 꿈은, 아아, 자신도 붓을 들어 자신이 지원했던 숱한 작가처럼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 날이 올까. 그는 화상이 아니라 컬렉터이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보다 더 깊은 속마음은 미술관 주인이 아니라 작가라는 고백. 그게 싱그러워 나는 이호재 사장을 눈부시게 바라봤다.
“내가 판매한 명작 100점. 나중엔 내 손을 거쳐간 그림 얘기도 꼭 한번 해볼 겁니다. 진짜 흥미진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