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 정몽헌에게 “DJ, 김정일 만나게 해 북한 인프라 건설하자” ● 정몽헌의 카지노 허가 청탁과 박지원의 정상회담 밀사 발탁 ● 김정일 “산만 보러오나, 술집도 있고 여자도 있어야지” ● 정몽헌 죽음으로 파묻힌 3000만달러 미스터리 ● “정몽헌이 왜 김영완 감추려 했는지 의문” ●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몽준이가 어려워지면 안 되니 자네가 대신…” ● “정주영, 2000년 4월 변호사 사무실에서 ‘후계자는 정몽헌’ 유언장 작성” ● 말년의 정주영, YTN 보면서 “내가 잘못 산 것 같아, 내 자식들이…” ● “위증, 소환 불응, 엉터리 판결…한국 재벌은 ‘언터처블’” |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작은 키의 노신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호텔 커피숍에 나타났다. 200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 비자금 사건의 한 주역. 바로 이익치(李益治·63) 전 현대증권 회장이다. 그의 손엔 두툼한 서류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현대 비자금 사건 이후 은둔하다시피 살아온 이씨는 몇 년째 법적 분쟁에 휘말려 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1999년)과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2000년) 때문이다. 앞의 것은 1998년 이씨가 회장이던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자금 2134억원을 끌어들여 인위적 시세조종으로 현대전자 주가를 끌어올린 사건이다. 형사소송은 대법원에서 이씨의 유죄가 확정돼(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마무리됐고, 현재 그 사건으로 피해를 봤다는 투자자들이 낸 민사소송(손해배상청구소송)이 진행 중이다.
뒤의 것은 현대전자와 현대중공업, 현대증권이 얽혀 있는 사건이다. 1997년 현대전자는 캐나다 금융기관에 현대투자신탁증권 주식을 팔면서 3년 후 적정 주가 이하로 떨어지면 되산다는 주식환매계약을 맺었다. 이때 현대증권의 주선으로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을 섰다.
3년 후 2460억원의 손실을 입은 현대중공업은 현대증권, 현대전자,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지급보증을 설 당시 이 전 회장이 ‘현대중공업에 손해가 날 경우 현대증권 등이 책임진다’는 내용의 각서를 현대중공업에 써준 걸 문제 삼아서다. 현대전자 대납금 반환 소송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1·2심에선 원고 일부승소판결이 나왔고,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앞두고 있다.
2004년엔 현대증권이 이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현대중공업에 지급보증각서를 써줬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이씨의 유죄를 인정,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이씨는 “두 사건 다 정씨 일가가 책임질 일이지 나는 죄가 없다”며 억울해하고 있다. 현대 비자금 사건 이후 그가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송 얘기부터 하기엔 현대가(家)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때마침 그를 만나기 하루 전인 8월8일, 평양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기에 그것부터 화제로 삼았다. 그는 2000년 현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때 북한과의 막후 접촉 과정에 참여했다.
“마지막으로 할 일 있다”
▼ 2차 정상회담 발표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좋은 일 아니에요? 만남은 좋은 겁니다. 대장끼리 만나야 해요. 그래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야죠. 핵은 왜 갖냐, 왜 우리끼리 싸워야 하냐…. 2000년에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은 금강산 사업에 대한 정주영 회장님의 의지 덕분이었지요. 정 회장께서 1997년 대선을 포기하고 난 직후 정몽헌 회장과 저를 불러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고 말씀했어요. ‘금강산이 내 고향’이라고 하시면서.”
정주영 회장의 고향은 금강산이 걸쳐 있는 강원도 통천이다. 당시 정 회장은 금강산사업의 당위성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전쟁 나면 다 끝이다. 우리가 이뤄놓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 지금 북한은 무인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련도 중국도 다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미국과 친구가 되지 않았나. 어차피 남과 북은 같이 살아야 한다. 북한에 진출하는 것은 평화도 가져오지만 경쟁력이 떨어진 남한의 제조업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금강산이 그 첫 번째 길이다.”
2000년 8월 방북일정을 마친 현대 정몽헌 회장(가운데) 일행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정 회장 오른쪽 옆이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그런데 금강산을 뭘로 가요? (휴전선이 막고 있으니) 육로는 안 되잖아요. 그때 정몽헌 회장이 배를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항구는 우리가 건설하면 된다면서. 그 아이디어를 김정일한테 그대로 전했죠. 그렇게 해서 성사된 겁니다. 그런데 금강산 관광은 단순한 사업이잖아요. 정주영 회장님은 ‘북한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 사회적 생산기반)를 우리가 해야겠다’고 욕심을 냈죠. 그런 일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정주영 회장님이 정몽헌 회장에게 ‘야, 우리 대통령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만나서 그 일에 합의하게 하면 어떨까’ 하고 말씀했지요. 그게 출발점이었습니다. 요시다라는 사람이 중간에 나서서 북한의 문을 열었죠.”
재일동포인 요시다 다케시는 일본에서 대북 로비스트로 통하는 인물.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신일본산업 사장이던 그는 현대가 북한과 비밀접촉을 할 때 창구 노릇을 했다. 정몽헌 회장의 검찰 진술에 따르면 이익치씨는 현대와 요시다 사이에서 메신저 노릇을 했다.
▼ 이 회장께서 요시다와 특별한 친분이 있었습니까.
“그게 아니고요. 정주영 회장님이 금강산을 열라고 하는데, 제가 뭘 알아야죠. 정몽헌 회장도 그렇고. 그래서 일본 쪽을 알아봤지요. 김영삼 대통령과 오랫동안 민주화투쟁을 같이 했던 박정두 고문(당시 현대증권 고문)이라고 있는데, 그 분이 고바야시 게이지라는 일본인 교수와 친했습니다.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을 지낸 고바야시는 북한 김용순(노동당 대남담당비서, 아태평화위원장 역임)과 통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김영삼 정부의 대북 비선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박 고문에게 부탁해 고바야시에게 편지를 썼죠. 그런데 고바야시도 하다가 막혔어요. 요시다 외에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바야시의 소개로 정몽헌 회장이 요시다와 연결된 겁니다. 내가 나중에 확인해보니 요시다 라인 아니면 북측이 인정을 안 해요. 만나보니 사람이 아주 반듯하더라고요.”
정몽헌의 카지노 청탁
▼ 정몽헌 회장의 검찰 진술서에는 “이익치를 통해 요시다에게 정부측 협상대표가 박지원 장관이라는 것을 알려줬다”는 등 뭐든지 이 회장을 통해 추진한 걸로 돼 있던데요.
“그건 아니고요. 정상회담을 준비하려면 누군가 정부대표단을 이끌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정몽헌 회장이 요시다를 통해 북측과 접촉했는데, 그쪽에서 국정원 쪽은 싫다고 한 모양이에요. 정몽헌 회장이 정부 쪽에는 나름대로 라인을 갖고 있었잖아요. 여러 여건상, 박지원 장관이 적임자였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정몽헌 회장이 박 장관을 많이 쫓아다녔대요. 선상 카지노 문제로. 그래서 잘 아는 사이인데다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박 장관이) 비선 책임자로 확정됐다고 정몽헌 회장한테 들었습니다.”
정몽헌 회장은 죽기 이틀 전인 2003년 8월2일 검찰에서 카지노와 관련된 진술을 남겼다. 진술서에 따르면, 정 회장은 1999년에 무기중개상 김영완씨의 주선으로 박지원 장관을 두 차례 만나 금강산 유람선에 카지노 허가가 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탁했다. 처음엔 1999년 5월경 프라자호텔 객실에서, 두 번째는 그해 11월 하순 또는 12월 초순 롯데호텔 객실에서 만났다. 정 회장에 따르면 두 번 모두 김영완씨가 동석했다.
특검 조사가 시작되기 직전 출국한 김씨가 변호인을 통해 검찰에 제출한 자술서 내용도 정 회장의 진술을 뒷받침한다. 김씨는 정 회장이 자신의 소개로 박 장관을 만나 카지노 허가 청탁을 했으며 자신도 박 장관에게 “현대에서 카지노 허가를 받으면 내가 카지노 사업을 하기로 했으니 도와달라”며 정 회장의 청탁을 거들었다고 진술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현대는 북한에 5억달러를 건넸다. 대북송금 특검에 따르면 그중 4억달러(이중 5000만달러는 현물)는 경협자금이고 1억달러는 정상회담 대가였다.
▼ 일종의 권리금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죠. 정주영·정몽헌 회장에게 공짜라는 건 없죠.”
▼ 다른 기업이 현대가 선점한 대북사업에 참여하려면 돈을 내야겠군요.
“그럼요. 로열티를 내야겠지요.”
이씨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일본의 청구권자금을 거론하며 남쪽 기업의 북한 진출을 권유했다고 한다.
▼ 하나만 더 여쭤보죠. 200억원 전달과정을 보면 아주 복잡해요. 김충식-전동수-이익치-김영완, 이렇게 4단계를 거쳐 권노갑씨에게 전달됩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유가 어디 있어요. ‘이렇게 하라’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는 거죠.”
▼ 박지원씨는 무죄를 선고받았고요. 권노갑씨는 200억원 부분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지금도 부인하고 있어요. 3000만달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두 사람에게 어떤 얘기를 하고 싶습니까.
“무슨 할 얘기가 있겠어요.”
▼ 박지원씨의 경우 특검 조사 때 이 회장을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고소했잖아요. 어떻게 됐나요.
“무혐의죠.”
▼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나서 이 회장께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없어요.”
▼ 무죄가 선고됐는데, 다시 이 회장을 고소하지 않았나요?
“그분도 뭐 세상을 나름대로 산 분인데…. 그리고 정몽헌 회장이 돌아가셨잖아요. 이게 다 정 회장을 가운데 놓고 벌어진 일이잖아요. 무슨 얘기를 더 하겠어요.”
▼ 정몽헌 회장이 작고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 뒷말이 있었죠.
“제가 그때 검찰에 매일 불려가 조사받았어요. 나중에 산소에 찾아갔어요.”
▼ 지금도 많은 사람이 정 회장의 자살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참 끔찍한 일이었죠.”
▼ 검찰에서 강압적이고 모욕적인 조사를 받은 게 자살의 한 원인이라는 소문도 있었지요.
“제가 있는 그대로 다 밝혀서 그런지, 저한테는 매우 예의를 갖춰 조사하더라고요. 또 정 회장 같은 오너들에겐 각별하게 대하던데요.”
이씨는 검찰 조사실에서 대기하다가 수사관을 통해 정 회장이 자살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이상했죠, 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
▼ 왜 자살했을까, 생각해보셨을 것 아닙니까. 자살한 방법도 특이했고.
“그렇죠. 그분이 1992년인가에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거든요. (자살할 만큼) 약한 분이 아니에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렇게 돌아가실 이유가 없잖아요.”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났지만, 현대 비자금 사건 질문은 이쯤에서 거둬들이기로 했다.
“자네는 죄 지은 게 없으니…”
한때 현대가 최고의 가신이던 이씨는 언제부터인가 현대가 최대의 공적(公敵)으로 불린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후계구도 분쟁인 ‘왕자의 난’, 그리고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 등에 휘말리면서 정씨 일가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현대 관련 소송으로 8년 가까이 법정에 서고 있는 이씨는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지시에 따랐다”라거나 “정몽준 고문이 주도한 일”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씨는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사실 그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현대중공업 정몽준 고문과 박세용 종합기획실장이거든요. 나중에 정몽헌 회장한테 들은 얘기인데, 누군가가 정주영 회장한테 찾아가 ‘이익치가 들어가면 사태가 쉽게 수습되고 정씨 일가가 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정주영 회장이 그 얘기를 듣고 새벽에 저를 불렀어요. 하는 말씀이, ‘우리 몽준이가 어려워지면 안 되지 않느냐. 자네는 죄 지은 게 없으니 하루 이틀만 고생하고 나오면 된다’고. 그래서 제가, ‘예. 알았습니다. (검찰에) 가서 그냥 제가 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 거죠.”
▼ 2000년 봄 후계구도 문제로 정씨 형제들 간에 분란이 일었을 때, 정주영 회장의 최측근이던 이 회장과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위원장 이른바 가신 3인방이 모두 정몽헌 회장 쪽에 섰는데요. 이유가 뭡니까.
“전 원래 그쪽이에요. 현대증권의 대주주가 현대상선이에요. 현대상선 대주주가 바로 정몽헌 회장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정몽헌 회장 계열이죠. 현대건설도 마찬가지고.”
널리 알려졌다시피 ‘왕자의 난’은 2000년 3월 장남인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뜻’을 내세워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 조치한 게 발단이다.
“정몽헌 회장과 제가 3월12일부터 17일까지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싱가포르엔가 가 있는 사이에 그런 인사를 냈죠. 현대 인사는 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정주영 회장의 지시를 받아 연말에 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인사였죠.
아마 그때 정주영 회장께서 후계자 문제를 거론했던 것 같아요. 2000년 4월17일인가 유언장을 만드셨죠.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서초동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본인이 직접 작성하셨어요. 제가 정몽헌 회장 계열이니 정 회장을 모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몽구 회장이 저를….”
▼ 2000년 9월 현대를 완전히 떠나셨는데요.
“아니, 그건 정몽준 고문의 (현대)중공업 쪽에서 저를 쫓아낸 거죠.”
▼ 정주영 회장이나 정몽헌 회장이 왜 보호하지 못했나요.
“제가 떠난다고 했어요. 형제간 싸움이 결국 송사로 이어졌잖아요. 그러면 망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 제가 떠나야죠.”
금융감독원장의 압박
▼ 당시 금융감독원에서 현대측에 이 회장을 해임하라고 압박했다면서요?
“정몽헌 회장이 펄쩍 뛰셨죠. 그래서 금감원이 뜻대로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저에게 은밀하게 연락이 왔어요.”
이씨는 그와 친하게 지내던 모 언론사 편집국장의 주선으로 금융감독원장을 만났다고 한다.
“금융감독원장이 ‘세상이 좀 시끄러우니 한두 달만 해외에 나가 쉬었다가 연말쯤 복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더라고요. 아, 이게 정부의 뜻이구나 싶었죠. 그래서 더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사직서를 냈어요.”
이씨는 “9월3일 사표를 냈는데 일주일 뒤인 9월10일 ‘느닷없이’ 해임을 당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금융감독위원회에서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을 문제 삼아 해임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당시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이던 금융감독위원회 모 위원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는 게 이씨 주장이다.
이씨는 또 현대중공업이 2000년 7월 현대증권과 현대전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낸 배경에 “정몽헌 회장과 정몽준 고문의 재산 다툼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보니, 그때 벌써 정몽헌과 정몽준이 원수야. 아주 원수더라고, 형제간에.”
▼ 왜 그렇게 됐나요.
“재산 싸움이라니까.”
▼ 후계구도 지분 때문에?
“그렇죠.”
▼ 그때 정주영 회장은요?
“병원에 누워계셨죠.”
이씨는 “정주영 회장 집안에서 형제간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아들들이 정주영 회장 앞에선 말도 잘 못할 정도였어요. 무서워서. 차렷 자세로. 그러니 정주영 회장님이 받은 충격이 더 컸죠. 그전까지는 상당히 건강하셨잖아요. 어느날 누워서 YTN 방송을 보면서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이 비서, 내가 참 잘못 산 것 같아. 내 자식들이 말이야….’ 그때 YTN에서 (현대 내분사태를) 계속 보도하고 있었거든요. 정 회장님이 보기에 기가 막힌 거죠. 형제간에 싸우니 멀쩡한 회사가 막 넘어지는 겁니다. 1등으로 잘나가던 현대투신이 거덜 나고. 건설도 등급 떨어지고. 전자도 그렇고. 그리고 증권에서 제가 쫓겨나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어요. 제가 떠난 다음 이듬해 3월인가 돌아가셨죠.”
▼ 현대와 삼성의 후계자 선정과정이 크게 다르죠?
“정주영 회장이 한 2년만 앞당겨 하셨으면…. 그러면 깨끗이 끝났을 거예요. 어디 감히…. 내가 정주영 회장 아들로 안 태어난 게 천만다행이라니까. 무서워요.”
▼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로 정한 건 자기를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그러니 대북사업을 시켰지요.”
▼ 정몽구 회장이 장남인데….
“정몽구 회장은 술도 잘하시고 호탕하잖아요. 그런 스타일은 자칫 실수하게 되죠. 정주영 회장이 정몽헌 회장한테는 ‘네가 잘해서 형을 도와라’ 하고, 정몽구 회장한테는―저도 자식을 키워보니 이해가 되는데―‘몽구야, 너 국회의원 해라’하셨어요.”
“범죄 안 했다고 불법이라니…”
이씨는 민·형사소송이 진행 중인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논란의 핵심은 각서의 성격. 1997년 현대전자가 캐나다 은행과 주식환매계약을 맺을 당시 지급보증을 섰던 현대중공업은 그로 인해 2460억원의 손실을 입게 되자 보증계약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씨가 중공업측에 써준 각서가 ‘손실보전’ 지급보증서라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이씨의 반박이다.
“세상에 각서라는 형태의 지급보증서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업무협조 문서였어요. 정주영 회장과 그 아들들이 1992년 대선 때 혼나고 난 뒤로는 문서에 사인을 안 합니다. 일절 안 해요. 그러니 공문이 필요한 실무자들은 답답하죠. 당시 현대중공업 실무자가 현대전자에 공문을 요구했는데, 제게 협조를 요청해 중개인으로서 연대서명한 겁니다. 아니, 제가 한글을 몰라 지급보증서가 뭔지 모르겠습니까. 민사소송 1심 재판부도 지급보증서가 아니라고 판결했어요. 무효라고. 그전에 공정거래위원회도 같은 결론을 내렸고. 그런데 판결문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불법행위를 했다는 거예요. 왜 불법인지 아세요? 이게 참 웃겨요. 그 각서가 중공업이 주장하는 대로 지급보증서라면 이사회 결의를 거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지급보증서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법원은 이씨의 각서가 지급보증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급보증서로서 법적 효력이 없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이씨에게는 지급보증을 하는 내용으로 문서(각서)를 써주면서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다시 이씨의 주장이다.
“증권회사는 증권거래법상 지급보증서를 발급할 수 없어요. 만약 이사회 결의를 거쳤다면 저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진짜 범죄야. 진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불법이다? 이사회 결의서가 없기 때문에 각서가 무효라면 그걸로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라니. 대한민국이 이러고도 법치국가라 하겠습니까.”
이씨는 2003년 현대중공업측에 맞소송을 냈다. 사건 당시 김정국 현대중공업 사장과 이영기 부사장이 옵션 계약 체결로 현대중공업에 손해를 입혔다며 두 사람을 업무상 배임죄로 고발한 것.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또 지난해 9월엔 이영기씨를 위증죄로 고소했다. 이씨가 법정에 나와 24개 항목에 대해 위증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현대중공업측이 주요 증인의 법정 출두를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압력을 넣어서 못 나오게 하는 거예요. 재판장이 그걸 알고 구인장을 발부했어요. ‘언터처블(The Untouchables)’이라는 영화 보셨죠? 지금 우리 재벌 수준이 그래요.”
“불러도 안 나와요”
이씨는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의원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형사재판 1심에서 정 의원을 증인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재판부가 희한해요. ‘정몽준이 나오겠어요?’ 그러고는 그냥 재판 종결한 거예요. 반면 민사재판에서는 재판장이 정몽준을 세 번이나 불렀습니다. 안 나와요. 얼마 후 재판장이 바뀌었어요.”
이씨는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에게 보낸 자필 문서에서 “그 계약은 절대권력자인 정주영 회장의 지시로 정몽준과 현대중공업 임원들이 집행한 것으로, 실무자가 (내게) 경위설명서 내지 업무협조문서를 요구한 것이다. 뒤늦게 허위각본을 짜서 생사람 잡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중공업 임원들에게 허위진술을 시키고 재벌의 금력으로 (재판을) 진행해 왔지만, 진실은 속일 수 없고 결국 밝혀진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제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진실을 찾기 위한 투쟁을 할 것입니다. ‘언터처블’에서 알 카포네는 지방의 경찰, 검사, 판사 등 권력기관을 매수해서 수족처럼 부렸지만 결국 잡혀서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1월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과 관련해 이씨를 업무상 배임죄로 고발한 소송에서 이씨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양측의 공방을 이렇게 정리했다.
▼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에 대한 판단’
주장
이 사건 주식환매계약은 현대그룹의 소유주라 할 수 있는 정주영, 정몽준 등이 결정, 지시한 것으로서, 위 1997년 7월1일자 각서는 자금조달에 관한 업무협조문서에 불과할 뿐 현대중공업의 손실보전을 책임지겠다는 의미의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가 아니므로, 피고인(이익치)이 현대증권에 손해를 가하였음을 전제로 하는 업무상 배임죄는 성립할 수 없어 피고인은 무죄다.
판단
배임죄에서… 재산상 손해의 유무에 대한 판단은 본인의 전 재산 상태를 고려해 경제적 관점에서 해야 하므로, 법률적 판단에 의해 당해 배임 행위가 무효라 하더라도 경제적 관점에서 파악해 본인에게 현실적인 손해를 가하였거나 재산상 실해(實害)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에는 재산상의 손해를 가한 때에 해당한다. …이에 의하면 현대증권이 사용자 책임이나 법인의 불법행위 책임 등에 따른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할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현대증권에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다거나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볼 수 있어 피고인 및 변호인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2003년 10월 대검찰청에 대한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 현대 비자금 사건 증인으로 출석한 이익치, 박지원, 권노갑씨(왼쪽부터).
이씨는 서해교전 당시의 일화도 들려줬다.
“통치자의 가장 큰 덕목은 전쟁예방이라고 봐요. 서해교전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금강산에 있었거든요. 그때 북한군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래서 북한 해군이 육군에 SOS를 쳤다고 해요. 미사일 쏴달라고. 그럼 전쟁이지요. 김용순 아태평화위원장 말로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한테 해군의 지원 요청을 보고했더니 ‘해군은 해군끼리 하라’며 들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거, 엄청 중요한 얘깁니다.
정주영 회장 말씀대로 양쪽이 자주 만나야 해요. 자주 보면 오해가 없어져요. 정주영 회장 덕에 금강산에 갔다 온 사람이 벌써 100만명이 넘고 개성공단도 금년에만 10만명이 넘어요. 독일도 그렇게 해서 평화통일 이룬 것 아닙니까.”
“심부름할 사람이 없으니…”
이씨는 “정몽헌 회장이 철저하게 기업적 개념으로 북한에 접근한 것과 달리 정주영 회장은 북에 대해 시혜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죽기 전에 내가 번 돈의 일부로 내 고향에 좀 베풀겠다’는 생각이셨죠. 금강산사업도 그런 개념이었고. 김정일 위원장이 거기에 감복한 거지요. 당시 김 위원장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아니, 산만 보러 오나. 술집도 있고 여자도 있어야지.’ 사실 금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한두 번 보면 싫증나지 않겠어요. 김정일 위원장이 그런 사람이에요.”
이씨는 정주영, 정몽헌 부자(父子)의 스타일 차이에 대해 이런 비유를 들었다.
“아마도 정주영 회장은, 보고를 받지 않아서 그렇지 애초 북한측에서 10억달러를 요구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거 줘!’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정몽헌 회장이 좀 짭니까. 제가 30여 년 근무하고 그만두면서 퇴직금으로 달랑 5300만원 받았어요. 정몽헌 회장이 그토록 사무적인 사람입니다. 하긴 그렇게 했으니 현대가 오늘날 이 정도로 탄탄해진 거죠.”
▼ 당시 현대가 5억달러 마련하느라 골병들었잖아요.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세 군데서 무리하게 대출해서 자금을 마련했잖습니까.
“제가 그 부분은 잘 몰라요. 감옥 갔다 온 다음에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게 뭔지 아세요? 정부 관리를 일절 못 만난다는 겁니다. 19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당시 정주영 회장 말씀 듣고 감옥에 들어갈 때부터 이익치는 없어진 겁니다. 그 후에 심부름(정상회담 준비)한 것은 심부름 할 사람이 없으니까 한 거고….”
▼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특검 진술에 따르면, 자신은 처음에 정몽헌 회장의 산업은행 대출 지시를 거부했다가….
“감히 정몽헌 회장 앞에서?”
말을 자른 이씨가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몽헌 회장이 정주영 회장보다 더 무서웠어요. 솔직한 얘기로 당시 정주영 회장님은 연세가 드셨잖아요. 예전엔 대단했지만. 그 앞에서 토 달면 그냥 끝이야. 정몽헌 회장이 똑같았어요. 어디 그 앞에서 토를 답니까. 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만 아세요. 정몽헌 회장은 칼이야. 그 앞에서 숨도 못 쉬어요. 정주영 회장은 외강내강(外剛內剛), 정몽헌 회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에요. 정몽헌 회장이 화내는 것 못 보셨죠? 저는 여러 차례 봤어요. 아버지가 그런 걸 좋아한 거예요.”
▼ 하여간 김충식씨는, 대출 지시를 거부하다가 “(2000년) 6월3일 이익치한테 ‘청와대에서 산업은행에 조치를 다 취했으니 가면 달라는 대로 줄 것이다. 상선 명의만 빌리면 된다’는 말을 듣고 이근영 산은 총재를 찾아가 대출을 요청했다”고 진술했거든요.
“특검 조사에서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졌어요. 정몽헌 회장 지시로 김윤규(현대건설 사장)가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났어요.”
▼ 이 회장이 아니고요?
“제가 아니에요.”
▼ 김충식씨가 왜 그런 진술을 했을까요.
“몰라요. 지금까지 죽 지켜보면 하여튼 저를 어렵게 만들려 애들을 쓰시더라고.”
이씨의 주장은 특검 수사결과와 차이가 있다. 특검에 따르면 이씨는 정상회담 준비와 관련된 대북협상은 물론 대북송금 과정에도 개입했다.
▼ 대북송금 당시 현대가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 불법대출, 분식회계가 있었는데요. 이 회장께서는 그걸 몰랐습니까.
“나중에 신문 보고 그런 게 있었다는 걸 알았죠.”
“이익치 진술, 믿기 어렵다”
갑과 을이 있다. 갑은 을을 만나 돈을 줬다는데 을은 돈을 받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다고 펄쩍 뛴다. 숱한 화제를 뿌린 박지원 비자금 사건이 그렇다. 2003년 이익치씨는 특검과 검찰(대검 중수부) 조사에서 ‘2000년 4월 정몽헌 회장의 지시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150억원을 무기명 CD(양도성예금증서)로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정 회장도 죽기 전 같은 진술을 남겼다.
김영완씨의 자술서도 박지원씨를 포위했다. 자술서에 따르면, 당시 김씨는 박 장관한테 ‘돈 문제로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정 회장을 찾아가 ‘박 장관을 도와주라’고 권유했다(150억원이라고 액수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 장관이 ‘현대에서 받은 것’이라며 1억원권 CD 150매가 든 봉투를 자신에게 건네 관리하게 했다는 게 김씨 주장이다. 김씨는 자술서에서 150억원 중 쓰다 남은 40억원은 국민주택채권으로 바꿔 보관했다고 주장했다.
1심과 2심은 박씨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핵심 증인인 김영완씨와 이익치씨의 진술을 유죄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였다. 김씨의 자술서에 대해서는 “외국에서 보낸 것이라 증거가 안 된다”고 했고, 이씨 진술의 경우 “진술과 관련된 여러 정황이 사리에 맞지 않고 주차장소나 전달시간 등 신빙성과 관련해서도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유죄증거의 2대 축이 다 무너진 것이다.
이후 검찰은 해외 영사관에서 작성됐다는 김영완씨의 진술서를 추가로 제출했다. 법정에 증인으로 불려나온 이익치씨는 박지원씨 변호인의 거센 공격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지난해 5월 박씨는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그해 9월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박지원씨와 이해관계가 상반된 김영완씨의 영사신문 진술서는 반대신문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뤄져 실체적 진실 발견에 미흡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전혀 없는 등 진술서가 작성된 시점과 시기, 내용 등을 볼 때 증거능력을 배척한 것은 타당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은 믿기 어렵고, 숨진 정몽헌 회장의 진술만으로는 이씨가 양도성예금증서를 박씨에게 전달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3년간의 진실게임이 막을 내리자 의혹의 눈길은 이익치씨로 향했다. 이씨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거짓말이라면 왜 그랬을까. 김영완씨는 왜 해외로 달아나 귀국하지 않을까. ‘이익치▼ 김영완 공모설’이 그럴 듯하게 나돌았다. 게다가 일부 언론에 의해 이씨가 150억원을 중간에서 빼돌려 해외 비밀계좌에 넣어뒀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제 안개 자욱한 이씨의 입으로 들어가보자.
LA은행에 개설된 계좌 없어
▼ 박지원씨의 무죄 판결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저는 제가 했던 일, 심부름했던 일을 사실대로 얘기했을 뿐입니다. 중간에 관여했던 사람(김영완)이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결과가 나온 데 대해 제가 특별히 생각하거나 무슨 코멘트를 하는 것은…. 저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제가 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얘기했고….”
▼ 지금도 변함없다는 거죠?
“그럼요. 그대로지요.”
▼ 어쨌든 재판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이 회장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됐는데요.
“그래서 그걸 핑계 삼아 ‘월간조선’에서 뭘 (보도)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정정보도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쪽에서 패소한 거죠.”
▼ 횡령 또는 배달사고 의혹도 제기됐죠?
“그런 얘기도 있었죠.”
이씨는 2005년 자신의 ‘해외비자금’을 거론한 ‘월간조선’과 ‘오마이뉴스’에 대해 민·형사소송을 냈다. ‘월간조선’ 보도의 요지는 이씨 부자가 2001년 LA 한미은행 등에 100억원대를 예치했는데, 그 돈이 박지원씨에게 전달됐다는 150억원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울러 이씨가 그 돈으로 미국 뉴욕에서 부동산 투자를 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오마이뉴스’는 LA 한미은행에 개설된 이씨 큰아들(이태홍·영문명 데이비드 리)의 비밀계좌로 스위스연방은행에서 1900만달러가 송금됐다고 보도했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이 돈은 2005년 9월 LA 한미은행 웨스턴 지점에서 뉴욕 인베스트뱅크에 개설된 다니엘 리 명의 계좌로 이체됐는데, 다니엘 리는 이익치씨의 대리인이거나 이씨 아들의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월간조선’은 2007년 8월호에서 정정보도를 내면서 이례적으로 ‘정정보도 경위’까지 밝혔다. 요지는 LA 한미은행 등에 이익치씨나 이씨 아들 명의로 개설된 계좌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에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이씨는 정정보도가 나온 후 민·형사소송을 취하했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형사소송은 ‘참고인 중지’로 수사가 중단된 상태이고, 민사소송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검찰이 ‘참고인 중지’ 처분을 한 것은 기사의 핵심 제보자인 오모씨 증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외 체류 중인 오씨는 김영완씨의 측근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월간조선’도 손을 들었기 때문에 ‘오마이뉴스’도 곧 정정보도를 낼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는 “얼마 전 이익치씨 변호인이 우리측 변호인을 통해 ‘정정보도를 내면 민·형사소송을 취소하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정정보도는 곤란하고 반론보도는 실어줄 수 있다고 답변했다. 그후 더 연락이 없다”고 밝혔다.
“다니엘 리가 누구냐?”
▼ 해당 언론사에서 보도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한 거지요?
“아니, 제가 입증을 했어요.”
▼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요?
“LA 한미은행에 저나 아들 이름으로 통장이 개설된 게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죠. 그 결과를 통보받은 후 곧바로 민·형사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이씨는 “운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미국 은행이 어떤 곳입니까. 계좌도 없는 외국인이 찾아가 ‘당신네 은행에 내 계좌가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하면 확인해줍니까. 안 되죠. 그것을 노린 거예요. 확인이 안 될 것이라고. 그럼 의혹만 남는 거죠. 나는 아주 쳐 죽일 놈 되고.”
▼ 파렴치범이지요.
“그렇죠. 운이 좋았다는 게, 제가 미국 변호사 한 분을 알아요. 한국 사람인데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요. LA에 오래 거주해서 그런지 한미은행장과 잘 알더라고요. 그 분이 행장한테 사실 확인을 요청한 겁니다. 은행에서 확인해 보니 그런 비슷한 계좌도 발견되지 않았던 거죠.”
▼ 계좌가 아예 없다는 건가요?
“없어요.”
▼ 보도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는데요.
“예, 아주 큰일 날 뻔했지요. 인생 끝날 뻔했어. 그런데 하늘이 도운 거죠.”
▼ 기사에 거론된 아드님 이태홍씨는 지금 LA에 살고 있습니까.
“걔는 왔다갔다 해요.”
▼ 무슨 사업을 합니까.
“걔가 ‘파슨’을 나왔어요. 미술학교 말이죠. 요새 가짜 학위 어쩌구 하는데 얘는 진짜예요. 국내에서 자기 친구하고 애니메이션 쪽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요.”
2001년 3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빈소에서 헌화하는 이익치씨.
▼ 미국에도 회사를 차렸나요?
“아니죠. 국내에만. 미국은 일 때문에….”
▼ 영주권자는 아니고요?
“아니에요, 아직. 뭐 오래 있었으니 자기가 원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겠죠.”
특검 수사 막판에 드러난 김영완
▼ ‘다니엘 리’라는 사람은 아십니까.
“몰라요.”
▼ 아드님도 그런 사람을 모릅니까.
“알 필요도 없죠. 얘는 외국에서 공부해 외국 회사에서 일하다 국내에 들어와 상암동인가 목동인가에 사무실을 냈어요. 문화관광부인가 문예진흥원인가 정부측 지원을 받아 싼 값에 얻었어요.”
다시 사건 얘기로 돌아갔다.
▼ 박지원 비자금 사건은 2000년 4월3일 오전 10시, 김영완씨가 정몽헌 회장을 찾아와 박지원 장관의 심부름이라면서 “남북정상회담 준비에 필요하니 150억원을 CD로 달라”고 요청했다는 게 출발점이지요?
“그렇죠.”
▼ 김영완씨 진술은 조금 다르죠? 자기는 150억원이니 CD니 하는 얘기를 꺼낸 적이 없고 ‘도와달라고’만 했다고.
“정 회장의 진술이 정확할 겁니다.”
▼ 정 회장한테 그런 얘기를 직접 들었나요.
“아뇨. 일절 얘기하지 않았어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 ‘150억원을 전달하라’는 얘기만 들었다는 거죠?
“그렇죠. 저는 특검 수사 막판에야 김영완이 관련된 사실을 알았어요. 특검이 박지원 장관을 구속하기 전 150억 CD의 행방을 추적했습니다. 사채업자들이 와서 조사를 받더라고요. 그날 박 장관에 대해 구속영장이 떨어졌죠. 그런데 사채업자들을 조사하고 수표를 추적하는 과정에 김영완이 관련된 사실이 드러난 겁니다. 당시 특검에 파견 나와 있던 부장검사와 검사가 저한테 굉장히 화를 내더라고요. 왜 그리 화를 내나 했더니, ‘김영완’이 나왔는데 그 전까지 정 회장이 김영완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던 겁니다.”
“150억 CD, 어디서 나왔나”
▼ 정 회장이 진술을 안 했단 말이죠?
“안 했죠. 검사가 (김영완이 관련된 사실을 알고 나서) 곧바로 정 회장한테 확인했는데, 정 회장이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셨대요. 그런데 누군가는 김영완을 알 것 아니에요. 그래서 검사가 저한테 난리를 친 거죠. 김영완을 잘 아냐고 묻기에 안다고 했더니, 종이와 연필을 주면서 쓰래. 그래서 김영완을 만나게 된 경위를 적었죠.
1980년대 후반 현대전자가 방산업체 등록을 못해 여기저기 알아보니 청와대 국방비서관한테 부탁해야 한다는 거예요. 신양호 비서관이었는데,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최경원 청와대 법무비서관이었어요. 그런데 최 비서관이 경기고 59회로 저와 동창입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정몽헌 회장이 저를 불러 최 비서관한테 부탁해 신 비서관과 식사자리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정 회장과 함께 약속장소에 가보니 모르는 사람이 보이더라고요. 젊은 친구인데 키가 크고 인상이 좋았습니다. 신 비서관 얘기가 ‘앞으로 방산업을 하려면 이 친구 도움을 받으라’는 겁니다. 보잉사 한국 담당 사장이라는 거예요. 그때 처음 만난 거지요.”
▼ 정 회장이 왜 특검 조사에서 김영완씨 얘기를 안 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아마도 제가 사실대로 얘기해서 정몽헌 회장도 나중엔 사실대로 진술했던 것 같아요.”
▼ 대법원은 이 회장님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시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죠?
“몰라요. 법정에 세 번인가 증인으로 나갔는데, 다 사실대로 얘기했어요.”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김영완씨의 부탁을 받은 정몽헌 회장은 김재수 당시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장에게 150억원을 CD로 마련하라는 지시를 했고, 이익치씨를 불러서는 김 위원장에게 CD를 받아 박지원 장관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김재수 위원장은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에게 정 회장의 지시내용을 전달했다. 현대건설은 9개 당좌계좌에서 현금 150억원을 인출해 농협중앙회 종로지점에서 발행한 1억원권 무기명 CD 150장을 구입했다. ‘4월 중순 어느 날’ 오후 8시경 집 앞 산책로에서 김재수씨로부터 이 CD를 넘겨받은 이익치씨는 오후 9시30분경 프라자호텔 내 술집 ‘토파즈’에서 박지원씨를 만나 건넸다.
▼ 재판부는 우선 이 회장께서 다른 건 다 잘 기억하면서 유독 박지원씨한테 CD를 전달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습니다.
“앞뒤 날들은 행사(남북정상회담 준비)가 있었기에 기억하는 겁니다. 당시 현대아산에서 작성한 일지가 있거든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150억 CD, 어디서 나왔습니까.”
▼ 현대건설에서 마련했지요.
“아니, 최종적으로 누가 갖고 있었냐고요?”
▼ 김영완씨요.
“그럼 됐지요, 뭘. 그리로 갔잖아요.”
이씨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김영완이 그걸 어떻게 썼다고 다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는 (박지원씨에게) 현금으로 주고, 얼마는 채권으로 갖고 있었고…. 거기(김영완 자술서)에 다 나와 있어요.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요. 그 돈이 혹시 내 계좌에서 나왔다면 또 모르죠. 하지만 김영완이라는 사람한테서 나왔잖아요. 그 돈이 날아갔습니까, 그럼?”
백지에 적힌 ‘150억’
▼ 판결문대로라면, 그 돈(150억 CD)이 박지원씨를 안 거치고 이 회장으로부터 김영완씨에게 곧바로 건네졌다는 의심도 하게 됩니다.
“그게 아니지요. 그건 아니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김영완이 거기에 관련된 것조차 몰랐어요.”
▼ 그 사건 전에 정몽헌 회장이 박지원 장관과 만나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정몽헌 회장이 인사 한번 하라고 해서 같이 한 번 만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남북정상회담 준비한다고 싱가포르, 베이징 등지에서 몇 번 만났잖아요. 그것(150억 CD) 때문에 박 장관과 정 회장 사이에 어떤 비밀스러운 관계가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 중요한 심부름을 할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저한테 시킨 거예요. 알다시피 제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정씨들을 위해 감옥에 가 줬잖아요. 당시 집행유예 기간이라, 무슨 일 생기면 안 된다며 저를 끔찍하게 생각해줬어요.”
▼ 그런데 그런 범죄가 되는 일을 시켰단 말입니까.
“제가 그 사건으로 국회 법사위에 불려갔잖아요. 그때 민주당 의원이 저를 몰아세우니까 홍준표 의원이 딱 그러더라고. ‘당신들, 퀵서비스한 사람 처벌해요? 백화점에서 물건 보냈는데, 그 물건에 문제 있다고 배달원을 처벌합니까?’.”
▼ 특검 조사 때 처음엔 왜 그렇게 강력히 부인했습니까.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해 제가 한 일을 정리해서 특검 조사를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검사가 들어오더니 백지에 ‘150억’이라고 써놓고 나가더라고. 기절했지요. 아….”
▼ 큰일 났다 싶었겠네요.
“그렇죠.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싶어 일단 부인했죠. 김재수가 뭐라 했는지도 알아야겠고, 상황판단을 해야 하잖아요.”
▼ 수사기록을 보니, 김재수씨와 대질조사받고 나서 곧바로 시인하셨던데요.
“그렇죠. 정몽헌 회장이 벌써 다 (진술)하셨더라고. 정 회장이 인정했다면 나야 오케이지. 그래서 내 역할만 정확하게 쓰자….”
▼ 당시 이 회장께서 검사에게 했던 말, “나는 CD가 뭔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중에 유명해졌지요. 진짜 몰라서 그랬던 겁니까.
“아, 무기명 CD. 무기명 채권은 알았는데, CD가 무기명이 있는지는 진짜 몰랐어요.”
이익치씨는 그날 박지원씨와 만날 약속을 한 다음 손수 차를 몰고 프라자호텔로 갔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주차 장소에 관한 진술이 또 논란이 됐다.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나”
▼ 주차 장소에 대해 몇 번 말을 바꾸셨지요?
“안 바꿨어요. 똑같아요. 현장검증도 했는데.”
▼ 대법원 판결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김영완씨와의 친분관계를 애써 축소하려 한 점도 지적됐죠.
“축소할 게 뭐 있어요. 있는 대로 얘기했지.”
▼ 예를 들면 같이 골프 친 횟수도….
“얘기했잖아요. 태릉에서 쳤다고.”
▼ 한 번 쳤다고 진술하셨죠?
“….”
▼ 기록에는, 여섯 번 같이 쳤네요.
“그래요? 그거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어요. 그리고 그 사람도 오너 아닙니까. 오너는 오너끼리 만나지…. 저하고 관련된 일이 아니라니까요. 정몽헌 회장 방에 가보면 가끔 그 양반이 와 있더라고요. 그럴 때나 보는 거지. 저는 오너와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늘 적당한 거리를 뒀어요.”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그와 김영완씨는 1998~1999년 태릉골프장에서 2회, 남부골프장에서는 1999년에만 4회 골프를 함께 쳤다.
▼ 현대증권 회장에서 물러나기 직전인 2000년 8월, 김영완씨가 최대주주인 제이엔시(J·C)캐피탈과 현대증권이 리스크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지요? 이 회장과 김영완씨의 친분이 작용한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현대증권의 이상기 전무라고, 그 사람이 관리본부장이었는데, 그쪽 회사 사장과 잘 아는 사이였대요. 저도 나중에 들어서 알았어요.”
▼ 김영완씨와는 언제 연락이 끊겼습니까.
“한참 됐지요. 회사(현대증권) 떠나기 전에 벌써 (관계가) 끝났어요.”
▼ 2003년 특검 조사가 시작된 다음에도 서로 연락한 적이 없나요?
“없어요.”
▼ 그 사건 때문에 세상이 그토록 시끄러워졌는데도?
“그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 김영완씨가 왜 출국했다고 봅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뭐 짚이는 게 없습니까.
“자기는 그게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 나갔겠죠.”
▼ 항간에는 이 회장님과 김영완씨가 공모해 정몽헌 회장의 비자금을 빼돌리지 않았느냐는….
“에이… 이번에 그런 게 다 정리됐잖아요. ‘월간조선’ 정정보도로.”
“검찰에서 아주 지겹게 했다”
이익치씨가 관련된 또 하나의 현대 비자금 사건은 이른바 권노갑 비자금 사건이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2000년 2월과 3월에 당시 민주당 고문이던 권씨에게 각각 3000만달러와 200억원을 건넸다. 정 회장 진술에 따르면, 권씨는 총선지원자금 명목으로 요청했고, 정 회장은 카지노 허가 청탁 목적으로 전달했다.
20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 확정판결로 권씨의 유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에도 김영완씨가 등장한다. 김씨는 자술서에서 현대측에서 전달한 현금상자들을 자신의 집에 쌓아두고 권씨가 요구할 때마다 갖다 줬고, 쓰고 남은 50억원은 ‘박지원 비자금’과 마찬가지로 채권으로 관리했다고 밝혔다.
반면 3000만달러 수수혐의는 검찰이 수사는 해놓고 기소하지 않아 현대 비자금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았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2000년 2월말 권노갑씨의 요청에 따라 3000만달러를 해외계좌로 송금했다. 계좌번호는 이익치씨가 김영완씨한테 받아 정 회장에게 건넨 것이었다. 정 회장은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에게 그 계좌번호를 주면서 송금을 지시했고, 김 사장은 현대상선 미국 현지법인을 이용해 정 회장의 지시대로 했다.
▼ 3000만달러 해외송금과 관련해 정몽헌 회장과 이 회장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더군요.
“몰라요. 나는 내가 한 일만 얘기했으니.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 묻힌 거지요.”
▼ 정 회장 진술에 따르면, (2000년 1월, 혹은 2월에) 신라호텔에서 네 사람(권노갑, 정몽헌, 이익치, 김영완)이 만난 이후 이 회장께서 정 회장을 찾아가 “권노갑 쪽에서 3000만달러를 요구한다”면서 해외 계좌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다는데요.
“아니죠. 월급쟁이인 저하고 무슨 돈 얘기를 하겠습니까.”
▼ 수사기록에는, 검사가 정 회장에게 “3000만달러를 달라고 한 사람이 이익치냐, 김영완이냐”고 추궁하자 정 회장이 두 번이나 “이익치”라고 분명하게 답했더군요.
“검찰에서 아주 지겹게 했어요. 저는 있는 그대로 얘기했어요.”
수사기록에 따르면, 이씨는 “정몽헌은 진술인(이익치)으로부터 ‘김영완이 3000만달러를 준비하라고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가”라는 검찰 신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분명히 정몽헌이 저를 불러서 ‘김영완이 3000만달러를 해달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인가”
▼ 정몽헌 회장이 150억 CD에 대해 특검에서 조사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김영완씨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특검 때도 처음부터 사실대로 얘기했다면 조사가 훨씬 쉬웠을 거예요. 길게 가지도 않았을 테고. 정 회장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 검찰 수사에 따르면, 정 회장은 2000년 2월말 3000만달러를 권노갑씨에게 (해외계좌로) 송금하고, 3월 중순엔 역시 권씨에게 200억원을 건네고, 4월 중순엔 박지원씨에게 150억원을 전달했거든요.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입니다. 다 사실입니까.
“당연하지요. 저는 사실 그대로…. 당시 남북정상회담 준비도 하고 총선도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냥 시키니까 ‘예’ 하고 따랐던 거죠.”
정 회장 진술에 따르면 권노갑씨가 200억원을 요구한 것은 2000년 2월말이다. 당시 권씨는 신라호텔 4인 회동에서 “저번에는 고마웠다”면서 추가로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 회장의 지시에 따라 현대상선이 ‘권씨의 해외계좌’에 3000만달러를 송금한 날짜는 2월26일(토요일)이다. 따라서 권씨는 3000만달러를 받은 지 이틀이 지나지 않아(2월27일이나 28일에) 또다시 200억원이라는 거액을 요청한 셈이다.
▼ 3000만달러 의혹은 결국 검찰도 못 밝혔는데요.
“(정 회장이) 돌아가셨으니…. 사실 지금 우리가 이런 얘기하는 것도 그분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검찰 수사 당시 김충식씨가 3000만달러 송금영수증을 찾아오겠다며 미국으로 출국한 후 돌아오지 않아 논란이 됐지요?
“몰라요. 저는 매일 아침 일찍 (검찰에) 가서 밤 12시까지 조사실에서 항상 대기했어요. 하도 지겨워서 TV도 안 보고 신문도 안 봤어요.”
당시 김충식씨의 미국행에 동행한 김·장 소속 조준형 변호사가 검찰에 밝힌 바로는 실제 송금액은 3000만달러가 아니라 2500만달러다. 조 변호사는 이에 대해 “2500만달러가 한화로 약 300억원이므로 당사자들이 3000만달러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 김충식씨 얘기를 왜 하느냐면요. 김충식씨가 2003년 7월31일에 출국했잖아요.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사흘 뒤인 8월3일 오후 4시(한국시각)에 조 변호사가 미국에서 유재만 대검 중수2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송금영수증을 확보했다”면서 “2000년 2월26일 현대상선에서 2500만달러를 스위스연방은행(UBS)에 송금했다”고 알려줬습니다. 이에 검사가 계좌번호와 송·수신인을 묻자 조 변호사는 다음날인 8월4일(월요일) 오전 9시10분께 유 검사와 통화한 후 팩스로 송금영수증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6시경 정몽헌 회장이 투신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거든요. 공교롭게도 날짜가 일치합니다. 그걸 두고 정 회장의 죽음이 3000만달러 미스터리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요.
“아, 그랬나요. 저는 당시엔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 주제에 뭐 다른 얘기를….”
“백 번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
정 회장이 자살한 후 김충식씨는 변호인을 통해 “송금영수증을 제출할 경우 현대상선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영수증 제출을 거부했고, 검찰 수사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와 관련, 항간에는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그 돈이 북한 쪽이나 전직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송금됐다는 뜬구름 잡는 얘기에서부터 그 문제로 정 회장이 죽기 전날 밤 김충식씨와 국제전화로 말다툼을 벌였다는 괴담까지 돌았다.
▼ 김영완씨가 쪽지에 적어줬다는 계좌번호를 보지는 않았나요.
“안 봤어요. 봉투에 든 채로 (정 회장에게) 전달했어요.”
▼ 3000만달러 송금에 대해선 이 회장께서 정 회장이나 김충식씨보다 먼저 검찰에 얘기했지요?
“예?”
▼ 왜 그랬나요.
“아니, 다 벌써…. 검찰이라는 데가 굉장히 무서운 데라는 것만 알고 계시면 돼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요.”
▼ 현대가에서 그런 것 때문에 ‘배신자’라고 비난한다던데요. 검찰에 많은 걸 얘기했다고.
“무슨 소리하고 있어요? 검찰이 현대상선 장부를 다 갖고 있었는데. 그게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돈입니까.”
▼ 장부를 들이댔나요?
“아니요, 그런 건 얘기하실 것 없고. 하여튼 저는 제가 한 행위에 대해서만 사실대로….”
▼ 이 회장께서는 3000만달러가 권노갑씨에게 전달됐다고 보십니까.
“모르죠, 뭐. 저는 심부름만 했으니.”
▼ 혹시 그게 정몽헌 회장의 해외 비자금은 아닙니까.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 검찰이 못 밝힌 건지, 안 밝히는 건지…. 다른 건 다 밝히지 않았습니까.
“당사자가 돌아가셨으니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 아니, 이 회장께서는 거기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없습니까.
“저는 그냥 제 할 일만 합니다. 백 번을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일 겁니다.”
“평생 몸종으로 살았다”
▼ 검찰이 공범에 해당되는 이 회장을 기소하지 않은 데 대해 말이 많았지요. 150억원과 200억원을 전달하는 데 깊이 개입하지 않았습니까.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나요.
“전혀 안 된대요. 우리 변호사 말로는.”
▼ 검찰과 유죄협상(plea bargaining)을 하지는 않았나요.
“에이, 감히….”
▼ 그런 심부름을 하면서 범죄라는 의식은 전혀 없었습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백화점에서 뭐…. 더욱이 저는 평생 몸종으로 살았어요. 정주영 회장님 비서로.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