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집단 납치사건 초기, 세계적 통신사와 함께 현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한 곳은 일본 언론밖에 없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일본 언론의 막대한 현지 취재지원 시스템과 전세계에 그물처럼 엮어놓은 취재망이었다. 피해 당사국 언론매체조차 무색케 한 일본 언론의 힘.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이 그 실체를 분석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중심가에 위치한 ‘카불 세레나 호텔’의 한 객실. 기타가와 마나부(北川學·38) 아사히신문 카불 특파원이 현지 취재보조원에게 지시한다. 아프가니스탄인인 취재보조원(조수)은 2001년부터 아사히신문에 고용된 인물. 현지어인 다리어와 영어를 구사한다.
아사히신문 카불 임시 사무실 격인 이곳 업무는 세 가지 언어를 거쳐 이뤄진다. 기타가와 특파원이 영어로 취재 지시를 하면 조수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다리어로 취재하고 그 내용을 영어로 설명한다. 그러면 기타가와 특파원은 이를 일본어 기사로 정리해 본사에 송고하는 식이다.
취재에 이 조수의 정보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사히신문에 고용된 4명의 통신원이 각기 취재원들을 통해 확보한 정보를 전해오면 이를 종합해 정리한다. 파키스탄에 있는 통신원이 아프간 현지에 있는 이들보다 사건의 핵심에 더 근접한 정보를 전해오는 일도 적지 않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인 20여 명이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이슬람 반군세력인 탈레반에게 납치됐다’는 1보가 전해진 것은 지난 7월20일. 첫날부터 주 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과 탈레반이 발표한 인질의 숫자와 성비(性比)조차 제각각일 정도로 혼선이 이어졌다.
기타가와 특파원은 아사히신문 본사의 지시에 따라 안전 확보를 위한 확인절차 등을 거쳐 7월25일 카불에 들어갔다. 평소 월 1회 정도는 아프간을 오가던 터라 비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이날 23명의 인질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탈레반이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다고 발표한 게 바로 그날이다.
이후 그는 호텔에 갇힌 생활을 이어갔다. 탈레반측이 “전략적 차원에서 외국인을 납치하겠다”고 발표한 마당이라 신변안전에 유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취재는 휴대전화로 이뤄졌다. 그는 한시도 전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23명 납치소식이 전해진 뒤 온 국민의 눈과 귀는 아프간에 쏠렸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처음엔 외신을 통하는 게 당연했다. 간간이 한국 정부의 발표도 나왔지만 만족스러운 정보는 별로 없었다.
막강한 현지 취재력
그러나 이후로도 한국 언론은 당사국임에도 외신에만 의존하는 답답한 시간이 이어졌다. 한국 정부가 아프간 입국 금지령을 내려 현지 접근이 아예 차단됐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피랍사건 발생 이후 주한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측에 요청해 한국민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전면 중단시키는 한편,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의 철수를 강력히 권유했다. 반면 로이터, AP, AFP 등 외신들은 물론 NHK를 비롯해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일본 언론들은 오히려 생생한 현지발(發) 기사들을 쏟아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일본 특파원들이 카불에 들어간 것은 사건이 터진 며칠 뒤다. 주로 파키스탄과 인도 주재 특파원들이 현지로 달려갔다. 일본은 위험지역이라 해도 ‘취재보도’가 목적이고 본인과 소속사가 책임진다는 전제만 있으면 정부가 취재기자의 해당지역 입국을 가로막는 일은 없다.
8월13일 현재 아프간에 들어가 있는 일본 언론은 공영방송 NHK와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마이니치신문, 교도통신 등 5개사. 나머지 언론사는 이슬라마바드, 뉴델리 등에서 관련기사를 송고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과 교도통신은 한때 카불에 일본인 특파원을 두 명이나 두기도 했다.
이들의 취재 방식은 앞서 소개한 아사히신문과 유사하다. 언어의 장벽은 현지에서 고용한 통신원과 취재보조원을 통해 뛰어넘는다. 평소 정비해놓은 취재망이기 때문에 즉각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오노 히로히토 아사히신문 외보 에디터는 “이웃나라인 한국이 관련된 사건이니 당연히 큰 관심을 갖고 취재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기자들이 현지에 못 들어가고 있다니 더욱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고 했다. 이웃국가 언론으로서 일종의 동료의식이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다만 그는 “현지에 가면 훨씬 나은 취재환경을 누릴 수 있는데, 한국 정부가 취재를 막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라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았다. 한국 언론은 그 뒤로도 각기 외국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을 통해 카불 입성의 길을 모색했지만 비자 발급 단계에서 모두 실패했다.
자국민의 납치관련 뉴스를 외신보도로 접해야 하는 한국 시청자는 슬프다.
지한파(知韓派)인 그와는 3년 전 도쿄에서 몇 번 술자리를 함께한 사이. 겨우 통화가 됐을 때 그는 당장 “왜 한국 기자들은 취재하러 오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래는 여름방학을 맞아 가족을 도쿄로 보내고 자신도 7월말에 여름휴가를 내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사태가 길어지면서 포기했다고 한다.
“빨리 끝나길 기대했는데, 마음을 비웠습니다. 휴가는 사태가 마무리된 뒤에 가야죠.”
가능한 ‘현장’에서
임시 사무실인 세레나 호텔은 카불에서도 최고급 호텔이다. 아침 8시(한국시간 12시 반)에 기상해 외신을 확인하고 나면 9시경. 조수가 출근하면 호텔방에서 종일 취재하고 본국의 마감이 모두 끝난 밤 9시경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데 질려, 가끔 호텔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때는 안전을 위해 반드시 조수를 대동하고,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차를 타고 간다.
“생활은 괜찮은데, 낙이 없네요. 가져온 책을 읽는 게 전부입니다.”
본사와 통화할 때마다 몸조심 당부부터 듣는다. 가족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위험지역 취재에 대해 “당연한 일”이란 반응이다.
“기자는 가능한 현장 가까이에서 취재하는 게 원칙이니까요. 분쟁지라도 접근이 가능한 데까지는 들어가야죠. 비록 지금은 탈레반의 납치 위협 때문에 호텔방에 갇힌 신세지만요.”
‘직접 취재’도 또 하나의 원칙이다. 이번처럼 설령 전화만으로 취재가 이뤄지더라도 자기 매체의 이름으로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요즘은 납치사건이 일어난 가즈니 주 당국자나 교섭 관계자, 탈레반 관계자를 대상으로 직접 취재하고 있습니다.”
문득 무장단체에 의한 외국인 납치사건이 잇달았던 2004년 이라크가 떠올랐다. 당시 미국인, 독일인이 연달아 참수당한 시체로 발견됐고, 한국인 김선일씨에 이어 일본인 배낭여행객도 희생양이 되었다. 도처에서 폭탄이 터지고 무장단체가 외국 기자들을 타깃으로 노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일본 언론사들은 정상적인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대부분 철수했다. 그러나 NHK는 끝내 바그다드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사 호텔방에서 취재한 내용들을 보도하는 데 불과하더라도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기자를 둔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NHK는 아직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두고 있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일본 언론은 전세계에 취재망을 갖추고 있다.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같은 대형 언론사들은 50명이 넘는 특파원망을 꾸리고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국을 개설할 후보지를 찾는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5월 쿠바에 지국을 신설하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 쿠바 대통령의 사망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또 NHK나 통신사는 이보다 더 많은 특파원을 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아사히는 전세계 34개 지국에 53명의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다. 워싱턴 지국 6명, 뉴욕 지국 5명, LA 지국 1명 등 미국에만 12명이 주재한다. 베이징 5명, 상하이 2명, 선양·홍콩·광저우에 각 1명, 타이베이 1명 등 범(汎)중국권도 11명이다. 심지어 아프리카 나이로비, 브라질 상파울루, 필리핀 마닐라에도 상근 특파원이 나가 있다.
중동권의 경우 이집트 카이로에 3명을 비롯, 이란 테헤란, 파키스탄의 이슬라마바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인도 뉴델리에도 1명씩 특파원이 상주한다. 특파원이 1명이라고 혼자 일하는 게 아니다. 한국 특파원들은 대부분 그날그날의 신문, 방송, 통신, 잡지 기사 챙기기에서 취재, 기사 작성, 잡무까지 자기 손으로 다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일본 특파원들은 현지 고용인을 대거 활용한다.
세계적인 거미줄 취재망
우선 특파원마다 현지 취재보조원 1명씩이 기본적으로 따라붙는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처럼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영어가 가능한 인력을 고용해 커버한다. 통상 ‘조수’라 부르는 이들 취재보조원은 매일 사무실에 출근하며 현지에서는 아사히신문 기자 직함을 들고 활동한다. 기명 기사를 쓰지 않을 뿐이다.
사실 2~3년마다 바뀌는 특파원에 비해, 현지에 밀착한 이들 취재보조원이 특종을 건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이 물어온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책임은 물론 특파원에게 있다. 그래서 유능한 취재보조원을 확보하는 것이 특파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정보원 개념의 ‘스트링거(stringer)’는 외국 매체와는 몰라도 일본 언론사끼리는 겹치지 않게 하는 게 철칙. 가령 아사히신문의 스트링거가 미국의 주간지나 방송의 스트링거를 겸직할 수는 있어도 NHK나 요미우리신문의 스트링거를 맡지는 못한다.
“가명을 써 가장하더라도 기사를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는 발견 즉시 해고합니다.”
일본 언론의 보도가 제각각 다른 정보를 전달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례로 기타가와 특파원은 운전기사 1명, 청소부 1명, 이슬라마바드 취재조수 1명, 카불 취재조수 1명 등 모두 4명을 상근인력으로 고용하고 있다. 이 밖에도 현지 스트링거 4명에게 매달 정액을 지급하며 정보를 취합한다.
사쿠라이 이즈미 아사히신문 외보부(국제부) 기자는 “이렇게 평소 검증을 거친 네트워크가 이번과 같은 비상시에 힘을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그 비용 규모는 ‘천문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뿐 아니다. 도쿄 본사 외보부에는 그들을 지원하는 내근 기자가 40여 명 포진해 있다. 8명의 데스크는 지역별로 전문성을 갖춘 중견기자들이 맡는다. 그 밑에 내근기자 30여 명이 언어권별로 새로 생산된 뉴스를 따라가며 분석한다.
일본 보도 기사는 정확성과 균형감각으로 정평이 높은 편이다. 그 비결은 거듭되는 확인과 크로스 체크에 있다. 가령 베이징에서 6자회담이 열리면 일본 유수 언론사의 경우 6개국 특파원 기자가 함께 움직인다. 베이징 특파원은 현지에서, 미국·한국·러시아 특파원은 자신이 주재하는 국가 대표단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가는 것. 필요에 따라 취재보조원까지 데려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에서는 외무성 출입기자가 출동한다.
현장에서 한국 주재 특파원은 한국 대표단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중국 특파원은 중국 대표단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면, 본부에서 이를 종합 점검해 기사를 작성하는 식이다. 그러니 대표단이 머무는 호텔 앞은 취재경쟁을 벌이는 기자들로 북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원칙 아래 일하기 때문에 간혹 ‘속도전’에서 늦는 일도 있지만 한번 기사화한 뉴스의 무게는 각별하다. ‘신문에 난 것=진실’이란 생각이 통용되고, 독자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사고라도 생기면 사장을 갈아치울 만큼 철저하게 책임을 진다.
그러나 외국 기자의 눈으로 보자면 일본 언론의 취재 방식은 불필요한 취재의 중복을 낳기도 한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가령 지방에서 대형사건이 터지면 한 신문사에서 사회부 기자, 지방주재기자, 기획팀 기자, 주간지 기자, 해당 사설을 쓸 논설위원까지 모두 현장으로 출동한다. 언론사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결국 수백 명이 현장 주변에 진을 치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비용과 에너지의 ‘낭비’를 감내하며 쌓는 일상의 노력들이 매체의 성가를 높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번 피랍사건과 관련한 일본 언론의 보도는 한국에선 요긴했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다. 당연히 나오는 기사 정도로 여긴다. 기사도 국제면 구석에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결론은 ‘국력’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한국에서도 각사별로 현지 통신원들을 접촉해 간접 취재하는 매체가 늘었다. 다만 평소 준비 없이 사건이 터진 뒤 통신원을 구하려다 보니 갖가지 혼선이 빚어졌다는 후문이다. 탈레반과 매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으면서 영어도 구사하는 현지 인물이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혼란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기자에게 ‘한국과 일본의 취재력에 왜 차이가 있는지를 논하라’고 한다면 ‘취재기자 개인과 언론사의 성의, 능력을 따지기 전에 그러한 비용을 감당케 하는 국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언뜻 봐선 낭비에 가까운 언론사의 막대한 투자도 결국 일본 사회의 전폭적 지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본에는 월 4000엔(약 3만2000원)에 가까운 구독료를 내고 신문을 봐주는 수천만의 독자와 이들 독자의 눈을 끌기 위해 광고를 싣는 기업들이 있다.
사실 일본의 언론시장은 세계에서도 특수하다. 일본의 신문판매 부수는 세계에서도 수위를 자랑한다. 요미우리신문 1000만, 아사히신문 800만, 마이니치신문 400만 등 전국에서 하루 5000만부가 넘는 신문이 유가로 팔린다. NHK로 대표되는 방송의 경우도 최근 말이 많긴 해도 수신료 수입 등으로 방대한 취재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 대형 신문사의 연간수입은 4000억엔 규모. 요즘 엔화 환율로 계산해도 3조원대다. 대형 신문사들이 각기 자사의 지면을 운용하기 위해 보유한 취재기자만 전국에 걸쳐 2500여 명에 달한다.
올해 1월1일 일본 신문을 받아들고는 부러운 마음에 통째로 보관해둔 기억이 있다. 100면에 이르는 지면이 온통 세계를 리드하는 초일류기업의 광고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도 하나하나가 ‘작품’인 이 광고들은 일본 사회에서 차지하는 신문의 위상을 그대로 웅변하고 있었다. 이들 기업이 모두 이 신문을 받쳐주는데(정확하게 말하면 그 신문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면을 거액에 사주는데) 신문이 어떻게 힘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하긴 일본의 신문업계도 요즘 ‘활자이탈’ 현상을 맞아 경비절감 바람이 불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웬만한 신문은 다른 경비는 줄이더라도 취재와 관련한 비용은 손대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외국 기자의 눈에는 비록 낭비로 비칠지언정 취재에 대한 철저하고도 성의 넘치는 투자는 결국 일본 언론이 신뢰를 지켜나가는 비결이 되고 있다.
“최악의 경우도 배제 못해”
기타가와 특파원은 8월9일 카불을 떠나 이슬라마바드로 돌아갔다. 파키스탄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카불은 싱가포르에서 날아온 특파원에게 잠시 맡겼지만, 파키스탄에 별일이 없는 한 며칠 뒤 다시 카불로 복귀할 예정이다.
기타가와 특파원은 1997년 9월부터 1년간 한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는 ‘친한파’이자 서울 근무 지망자이기도 하다. 그는 “파키스탄 부임 전까지는 이슬람 사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현지에 온 뒤 시야가 넓어졌다”고 자부한다. 이번 사태에 대한 그의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탈레반은 완전한 테러리스트 집단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간 것이니 살려달라’는 식의 주장은 통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탈레반에게는 ‘아프간인들을 돕는다’는 게 ‘카르자이 정권을 지원한다’는, 즉 ‘적(敵)’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빨리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라지만, 최악의 경우도 배제하지 않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과 아프간 정부, 반군 탈레반, 이웃나라 파키스탄까지 얽히고설킨 이번 사건은 과거 한국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중동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 계기가 된 듯하다. 무엇보다 납치된 사람들의 전원석방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지만, 사태가 해결된 뒤 점검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우선은 위험지역 취재 활동에 대한 정부와 언론 간 원칙을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새 여권법에 따르더라도 취재활동은 예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정부가 이를 애써 무시했다는 지적이 많기 때문이다. 또 중동에 대한 네트워크 구성이 시급하다.
중동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취재력은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3년 전 김선일씨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중동 전문가를 육성하고 인맥을 만들자는 의견이 무성했지만 별 진척이 없다고 한다.
기타가와 특파원은 한국 기자가 여권법 때문에 카불에 가기 어렵다면 한국 내에서 아프간 현지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아 국제전화로 취재할 것을 권했지만, 그런 인물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언론도 악조건 아래서 열심히, 고생하며 일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달라고 독자에게 강조하고 싶다. 아프간 피랍 사태에 올여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있는 한국의 동료들에게 “힘내라”는 독자의 격려가 전해지는 장면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그것이 한국 언론을 키워주는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