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플로전’ 라다 차다·폴 허즈번드 지음, 김지애 옮김, 가야북스 448쪽, 2만원
‘럭스플로전’은 가장 좋고 진귀한 것이 유럽을 떠나 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는 2007년 현재에 주목한다. 홍콩에 기반을 둔 브랜드 컨설팅 회사의 라다 차다와 아시아에 정통한 마케팅 매니저 폴 허즈번드는 유독 아시아에서 가속화한 새로운 소비 형태를 책의 전제로 삼았다. 명품 브랜드에 관한 마케팅 보고서가 이렇게까지 아시아를 콕 집어 운운하는 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아시아의 경제력과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진 자금력 때문이다. “부(富)를 이루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주창한 덩샤오핑의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동양에서 부란 물질적 성공을 향한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을 신의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묘한 문화적 페이소스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동조화’ 단계에 접어든 한국
흥미로운 건, 바로 이 부분에서 저자들의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경제 침체기에도 개인의 경제적 능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명품 소비를 포기할 수 없는 일본’이라든가 ‘서로 뛰어나 보이기를 원하는 경쟁 심리 때문에 점점 더 높은 명품 소비를 유발하는 한국’ 등의 절묘한 관찰기가 그렇다. 각 브랜드가 내놓은 통계 수치를 제시하기에 앞서 저자들은 문화에 대한,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배경을 살펴본다. 이러한 대목은 동양권 독자에게 자기 문화에 대해 이해 내지 공감할 수 있게 하고, 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루이비통 매장과 로마 비아 콘도티의 불가리 매장에서 무시무시한 ‘지름신(신이 내린 듯 겁 없이 쇼핑하는 것을 빗댄 은어)’ 파워를 보이는 동양인을 보면서 놀라움과 질시와 경멸의 카오스에 빠지곤 하는 서양인 독자에겐 속성 정리된 아시아문화 입문서와 같다.
친절하게도 한 장(章)이 끝날 때마다 아시아에서 명품 브랜드가 성장한 과정을 핵심적으로 훑은 패션 연대기나 일본, 중국, 한국 등의 명품 쇼퍼와 나눈 진솔한 대담이 단순한 마케팅 보고서 이상의 감성적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아마도 한국의 꽤 많은 이가 동양에 대한 이들의 탐구 정신에 대해 보드랍고 통통한 살 속에 날카로운 손톱을 감춘 이중성을 느낄지 모른다. 저자들이 입을 모았듯, 이러한 거부반응은 유독 한국 소비자에게 두드러지는 게 사실이다.
세계 마케팅 분야에서 한국을 명품 유행의 5단계 중 네 번째 ‘동조화’에 접어들었다고 분류할 만큼 한국의 명품 소비는 빠르게 성장했다. 필자가 얼마 전 프랑스 론 알프스 지방 관광청 초청 미디어 투어에 참석했을 때도 이를 실감했다. 한국 기자만을 대상으로 한 투어의 목적은 에비앙(Evian) 같은 고급 온천 휴양지와 고가의 멤버십 골프 투어, 미식가의 천국 프랑스에서도 유달리 뛰어난 스타 쉐프(Chief)를 많이 배출한 고급 식도락 등의 관광 상품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선진국형 관광 아이템이니만큼 관광청에서는 수많은 데이터를 비교 분석 후 대상국을 심사숙고해 선정했는데, 올해 한국이 처음으로 명단에 들었단다. 10년째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홍보 담당자는 “이미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삶의 질을 높이고 고급스러움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쪽으로 바뀐 지 오래”라고 확신했다. 그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도 한국인의 여행 취향에 대해 “신흥 부자들의 과시적 여행이 주도적인 중국이나 쇼핑 외에 문화적 호기심이 크지 않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들과는 또 다른 독자적 범주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소비는 욕망의 방향 읽어야
‘럭스플로전’은 분명히 개인의 사적인 옷장 사연을 둘러싼 다분히 선정적인 폭로전이다. 아시아 명품의 막강한 주 소비층을 나라별로 적나라하게 조사해, 조목조목 분석한 부분은 애초부터 페미니스트들의 맹비난을 감수하기로 작정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이를테면 명품 구매력의 규모와 패턴에 따라 최상층을 유명 인사로, 바로 그 다음을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 이른바 ‘첩’을 뜻하는 ‘타이-타이’로, 그리고 비즈니스 피플, 일반 직장 여성, ‘통 큰’ 십대 순으로 구분한 것이 대표적이다. 저자들은 한국의 호스티스를 별도의 부류로 본다. 그런데 아시아의 명품 파워와 ‘첩’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책은 이들을 ‘남자의 부를 택해 결혼한 교만한 영혼들’이라고 규정한다. 지성을 겸비한 타이-타이도 있는데 ‘자신의 부티크나 스파 혹은 클럽’을 운영하며, 선호하는 브랜드도 단연 샤넬과 에르메스, 까르띠에란다.
서울의 명품 애호가들을 관찰한 내용 또한 매우 흥미롭다. 국내에 진출한 첫 라이선스 패션 매거진인 ‘엘르(Elle)’의 편집상무를 비롯해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발행인이자 CEO인 김영철 회장 등과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적 명품 소비의 특수성에 대한 리서치가 완료된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IMF 이후 서로 맞붙은 채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 미에 대한 갈망과 명품 열풍과 성형 수술 시장의 상승 곡선, 이것은 분명 아시아 특유의 ‘욕망의 코드’인 것이다.
10년 넘게 패션 잡지에 몸담았고, 현재 소위 ‘럭셔리 쇼핑 ·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 몸담고 있는 필자는 긴 한숨부터 나온다. 저자들이 지적한 대로, ‘뿌리 깊은 신유교 사상에 의해 소비는 아름다울 수 없으며, 안빈낙도의 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한국인 특유의 심리기저’ 때문일 것이다. 즉 한국적 명품 소비 패턴의 특징은 ‘유교적 가치의 국부론’에 의해 심화된 이중성이랄까? 패션이란, 아니 소비란 단순히 지갑을 여는 행위가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적 욕망이 향하는 방향점’을 제대로 짚어내야 하는 것일진대, 우리 사회에선 아직 이 모든 것을 드러내 해체와 통합을 통한 발전된 이슈로 나갈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나름의 결론 때문이다. 기껏해야 경제 지표에 따른 스커트 길이 따위가 아직도 기삿거리가 되는 마당에, 명품 때문에 횡령까지 불사하며 악마에게 영혼을 판 어느 젊은 여자 얘기에 흥분부터 하고 보는 마당에, 과연 어느 누가 소비문화의 실체에 대해 침착하게 논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바는, 다름 아닌 명품 열풍 이면에 숨겨진 무수한 욕망의 코드를 전면에 끌어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100년 전에는 그 존재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아시아 사람의, 아시아 사람만을 위한 욕망을 말이다. 비록 한국 여성의 필수 명품 아이템 중 하나가 살바토레 페라가모 구두라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도출했지만 말이다.
인간의 욕망에 현미경을 들이댄 책치고 아우성 같은 찬반논쟁을 피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1948년 킨제이 박사가 ‘인간 남성의 성적 행위’를 출간했을 때도 종교박해 못지않은 비난이 따랐다. 그러나 이 책을 시작으로 사랑과 결혼, 연애를 유전적·심리적으로 ‘크로스 오버’하며 연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성 혁명의 이론적 지침서가 된 킨제이 보고서는 인간 성행위를 현상 그대로 수집한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동성애를 비롯해 수간, 소아성애, 네크로필리아(시체성교애호증) 등 듣기에도 끔찍한 인간의 어두운 리비도가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왔다.
100년 전 명품, 번영의 순환
‘럭스플로전’은 아시아 소비 문화의 신(新)동향에 대한 ‘킨제이 보고서’다. 객관적 태도를 일관되게 고수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만일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던져버리고 싶다거나, 유럽산 명품에 넋이 나간 아시아의 현재에 대해 자괴하고 있다면, 100년 전 세상을 매혹시킨 명품의 이동경로가 단연 아시아발(發)이었음을 생각해보기를.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번영의 순환을 떠올려보기를. 아시아의 현재에 주목하고 있다면, 아시아의 미래 또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법. 그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바로 아시아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