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은 회장에게 감정 없다”
- “나는 정주영 마니아…회장님이 지금도 날 지켜줘”
- “北이 나와 손잡은 건 신뢰보다 실력 때문”
- “대북사업은 현대아산도 나도 잘되는 쪽으로…”
- “육로교역 발판으로 러시아 시장 진출”
- “평양 파이프라인으로 러시아 가스 끌어온다”
- “감사비리? 아무 변명 않겠다”
- “현 회장이 날 내친 데는 따로 사정 있었겠지…”
김 회장은 현대아산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5년 10월 감사비리 파동으로 물러났다. 그가 퇴출당한 직후 북한 아태평화위(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담화를 통해 “북한과 현대의 신의를 저버린 처사”라며 현대측을 강력히 비판했다.
김 회장이 재기의 움직임을 보인 건 지난해 8월. 서울 서초동의 한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내고 아천글로벌을 설립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이 회사는 대북사업의 선도기업인 현대아산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북한산 농수산물과 식료가공품의 육로 교역, 평양 시내 아파트·오피스텔 건축, 북한산(産) 모래의 부산항 반입, 북한 인력 중동 송출 등 아천글로벌이 북측과 합의했다고 발표한 사업은 하나같이 현대아산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7월19일 개성발 육로를 통해 북한산 농수산물을 들여온 아천글로벌은 “남북간 본격적인 육로 교역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에 앞서 6월21일엔 북에서 양식한 철갑상어를 동해쪽 육로로 들여와 눈길을 끌었다.
현대아산측은 통일부에 아천글로벌의 대북사업을 문제 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는가 하면 언론을 통해 ‘김윤규 때리기’에 나섰다. 8월2일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개인비리로 물러난 사람이 회사 영업 기밀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것은 도덕적,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김 회장을 비난했다.
“누구 것을 빼앗을 생각 없어”
김윤규 회장이 현대아산을 공격하는 발언을 삼가지 않았다면 인터뷰가 더욱 흥미로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 회장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했다. 비록 ‘공격적 방어’이긴 했지만. 그는 대북 육로 교역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육로로 교역한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데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아요.”
▼ 이미 개성공단 상품들이 육로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것과는 의미가 다르죠. 살아 있는 철갑상어가 육로로 넘어왔잖아요. 하긴 여러 사람이 ‘저놈 미쳤다’면 미친 거지. 나 혼자 대단하다고 해봐야…. 하여튼 난 자부심이 있어요. 어떤 회사에서는 남이 하려던 것을 빼앗은 게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누구 것을 빼앗을 생각이 없어요.”
▼ 현대아산 말이죠?
“현대아산은 자기네가 하려 한 것을 내가 바깥에 나가 자기네 아이디어로 하는 것 아니냐고 해요. 하지만 그 아이디어, 내가 (현대아산에 있을 때) 낸 거예요. 물론 아산도 하면 되지요. 모든 유통업자가 편하게 북측과 교역해야죠. 난 항상 아산이 중심이 돼 대북사업이 잘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현정은 회장에게 감정 없어요.”
서울대 공대를 나와 19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그는 현대건설 사장, 현대아산 사장을 지내며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세간에서는 그와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김재수 전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일컬어 ‘가신(家臣) 3인방’이라 했다.
▼ 36년간 몸담았던 현대를 떠날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정주영 회장님 덕분에 나는 그다지 힘들게 살아온 것 같지 같아요. 지금도 날 지켜주시는 것 같고. 그분 아니면 조 기자가 나한테 인터뷰하자고 했겠어요? 다 그분의 영향력이죠. 정주영 마니아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분의 매력은 참 대단합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분이 계속 나와야 하는데…. 그분은 큰 사업을 할 때 계산을 하지 않았어요. 자동차를 처음 만들 때 이렇게 말씀했어요. ‘야, 일본놈도 하는데 우리라고 왜 엔진 못 만드냐, 미쓰비시에 가서 엔진 기술 따와라….’ 그렇게 배워 오늘날 현대를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만든 겁니다.
2005년 7월16일 원산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그 양반이 그렇다고 공부를 많이 했던 것도 아니에요. ‘공부는 신문에서 다했다’고 말씀하곤 했어요. 그것도 동아일보. 사람들이 돌려 읽느라 군데군데 찢겨진 동아일보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셨대요. 나보고도 신문 좀 읽으라고 자주 말씀했지요. 그게 말이 되는 게, 조 기자나 나나 박스기사 하나 쓴다고 생각해봐요. 내가 아는 것 외에 내가 잘 모르는 것도 다른 사람한테 물어 좋은 내용을 만들려 애쓸 것 아니에요. 신문의 박스기사엔 대단한 경험이 들어 있는 셈이죠. 정 회장님은 신문에서 얻는 정보가 가장 값진 것이라고 말씀했죠.”
“김정일에게 직접 시범아파트 건설 제의”
▼ 대북사업 얘기하기 전에 과거 일부터 정리해볼까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거기에 대해선 할 말 없습니다.”
예상한 대로 그는 감사비리 사건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 김 회장께서는 대북사업의 산 증인으로, 정주영 회장▼ 정몽헌 회장의 계보를 잇는 분이라고 하지요.
“계보를 잇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든지 일을 잘되게 하는 게 중요하지. 지금 우리나라 경제에서 가장 큰 변수가 바로 남북관계입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도 1989년에 이미 합의된 것인데, 정부가 대북 접촉을 금지한 탓에 9년 동안이나 묶여 있다 뒤늦게 시작된 것 아닙니까. 이번에 성사된 육로 유통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가 다뤄져야지, 현정은 회장과 관계가 어땠냐, 너 뭐 해먹었다는데 괜찮은 거냐, 이런 질문은 피하겠어요.”
▼ 아천글로벌을 설립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 그만두면서 육 대표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같이 그만뒀어요.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주변에서 ‘북측과 신뢰가 있는데 왜 대북사업 안 하냐’는 얘기가 많았어요. 북에서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뭔가 역할을 해야 하지 않냐고 권했고요. 그렇지만 대북사업용으로 회사를 설립한 건 아닙니다. 제 전공이 건설 아닙니까. 국내에서 건설회사 만들고 해외 건설사업에도 뛰어들 목적이었죠. 두바이에 사무실을 열어놓았습니다. 지금 중동에서는 인력이 모자라 난리예요. 여러 공사가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거든요. 이미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네팔, 필리핀, 중국 등지에서는 인력공급 사업이 시작됐어요. 내가 북한에 얘기했지요. 1970년대에 우리가 중동에 나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으니 이번에 북한도 한번 해보라고. 거기 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는 내가 돕겠다, 정주영 회장과 함께 했던 경험이 있으니. 서로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합의한 상태예요. 그런데 얘기를 하다보니 그쪽에서 유통사업에도 관심을 보이더군요. 민족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 아니냐면서. 그래서 유통도 하게 된 겁니다.”
▼ 평양 시내에 아파트도 짓는다면서요?
“시범아파트. 아주 작아요. 8층이나 10층 규모로 할 생각이에요. 오피스텔도 짓고. 앞으로 평양에서도 주택 재건사업이 벌어집니다. 내가 (현대에 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하는 과정에 시범아파트 건설을 제의했습니다. 이런 얘긴 오늘 처음 하는 겁니다.”
▼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얘기한 겁니까.
“정몽헌 회장님과 같이 만날 때 얘기한 겁니다. 그 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최근 그쪽에서 앞으로 평양과 개성의 아파트사업에 뛰어들려면 먼저 시범아파트를 지어보는 게 좋겠다고 제의해와 합의했습니다. 합의문에도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걸 전제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북측과 합작이든 합영이든 건설회사를 만들어 같이 짓는 거죠. 우리측 기술도 전수하고. 우리도 사업해 이익 남기면 좋고.”
“일 있을 때마다 정주영 회장 산소에…”
김 회장은 현대에 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을 모두 네 차례 만났는데, 아천글로벌 설립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만나야죠. 우리가 독점해 북한을 꽉 잡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정주영 회장님도 그런 것은 원치 않았어요. 이번에 육로를 뚫은 것도 우리만 이용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간 우리 유통업체들이 나진·선봉이나 남포를 통해, 혹은 중국 단둥(丹東)으로 돌아 뱃길로 물건을 들여왔거든요. 배로 들여오면 물건의 품질을 검증하지 못해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앞으로 개성에 유통센터가 만들어지면 우리 업체들이 북에서 나온 농수산물의 품질을 눈으로 확인한 후 상품으로 포장해 들여오게 됩니다. 가락시장처럼 말이죠. 그 유통망을 형성하는 게 내 소임이라는 겁니다. 개성 외에 파주 통일동산에도 집하장이나 전시실을 만들 계획이에요. 유통업자들한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 현대아산이 추진하는 사업에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요. 겹치는 건 없나요.
“영향을 끼쳐선 안 되죠. 될 수 있으면 그런 일 없기를 바랍니다. 아산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거기가 (대북사업의) 주체 아닙니까. 아산도 나도 잘되는 쪽으로 돼야죠.”
▼ 북측은 어떤가요. 현대아산을 의식하지 않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 그쪽에서 김 회장과 손잡은 것은 신뢰 때문이겠지요.
“아니죠. 신뢰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잖습니까. 신뢰가 아니라 실력이죠. 능력 없는 놈이 신뢰만으로 됩니까. 신뢰는 실력이 뒷받침돼야 구축되는 거죠. 난 절대 북한한테 약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력이 없다면 그쪽에서 날 보겠습니까.”
▼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신뢰가 없으면 쉽지 않잖아요. 북한은 특히 신뢰나 의리를 중시한다고 하던데요.
“물론 의리가 있어야죠. 함께 일을 하려면 상대방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최신 정보도 알아야 하고. 상대편 처지를 이해하고 체면을 세워줄 줄도 알아야 하고.”
김 회장은 “나는 정주영 회장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성공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님은 돈도 있었고 그룹도 있었지만 나는 지금 뭐가 있나요. 정 회장님한테 경영수업한 것, 그 자산 하나예요. 지금도 저는 일만 있으면 정 회장님 산소를 찾아갑니다. 가서 고인(故人)과 대화를 나누면 맘이 편해요. 17층 명예회장실에서 새벽 5시50분에 단 둘이 앉아 얘기하던 일도 생각나고. 그래서 산소에도 꼭 새벽 5시50분 전에 가요. 새벽에 늦게 나온다고 하도 혼이 나서 습관이 된 거죠. 제 머릿속에 ‘늘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회장님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옆에서 누가 헐뜯거나 뭐라 해도 돌아볼 겨를이 없어요. 길이 뚫렸다면 누가 뚫었든 다 같이 그 길로 가면 되지,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느냐 따질 필요가 없다는 거죠. 다 같이 그 길을 이용하는 것, 그게 바로 정 회장님의 숭고한 뜻이에요.”
“누구든 빨리빨리 찾아 먹어야”
▼ 육로 교역은 남북경협이 매우 실용적인 단계로 접어드는 신호탄이 아닌가 싶은데요.
“개성공단 관광이나 가자고 뚫은 게 아니에요. 그 길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자는 거죠, 배로 돌아가지 말고. 한 민족끼리 편하게 경제활동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그 육로를 통해 러시아로 진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러시아 제품이 들어올 수도 있죠. 난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우리 사업에 이런 게 필요하다고. 이런 사람이 하는 사업이 내일 모레 갑자기 중단된다면 다음에 누가 또 그 길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경제는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신뢰가 있어야죠.”
▼ 그쪽 사람들, 경제에 대한 개념이 어떤가요.
“자기들에게 필요하고 득이 된다 생각하니 하는 거죠.”
▼ 중국과 비교하면 북한은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알려져 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각자 사는 방법이 다른 겁니다. 예컨대 조 기자와 내가 사업을 같이 한다고 쳐요. 나는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조 기자는 안 지내요. 조 기자 집안이 제사 지내는 방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따질 필요가 없잖아요. 그게 나와 거래하는 데 무슨 문제가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그런 데 관심을 두더라고. 왜 남이 내 스타일대로 하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북측과 거래하면서 이건 자본주의식이고 저건 공산주의식이라고 구분하지 않아요. 왜 이 길이 뚫려야 하는지만 얘기합니다. 우리 민족끼리 거래하는데 왜 비싼 비용 치르면서 단둥으로 돌아 중국 세관을 거쳐야 하냐, 이건 불편하지 않냐고.”
▼ 현대가 2000년에 북한에 큰돈을 건네고 대북사업 독점권을 얻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북측이 현대 외 다른 기업들과도 사업을 같이 할 뜻이 있나요.
“그들도 합의한 것은 꼭 지키려 합니다.”
▼ 7대 경협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분야는 다른 기업들도 진출할 수 있나요.
“무엇이 포함됐다 안 됐다, 선을 긋기가 쉽지 않아요. 능력 있다면 누구나 참여하는 게 맞죠. 겹치거나 충돌하는 게 있으면 양보하고. (먼저 취득한) 사업권을 인정하면서도 같이 잘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봅니다.”
▼ 김 회장도 이제는 현대와 상관없는 개인사업자 아닙니까. 북한이 앞으로 현대와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표시로 봐도 될까요.
“신뢰는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어요. 현대로서는 정주영 회장님과 북측의 관계가 살아 있는 한 그것을 어떻게 잘 가꿔 나가느냐가 중요하죠. 주장할 권리가 있다면 점잖게 하고. 북측에서 현대를 거부하리라고는 보지 않아요.”
▼ 북측이 남측 기업들을 경쟁시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지요.
“잘 모르겠어요. 경쟁이 치열한데, 빨리빨리 찾아 먹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성사된 사업들 중 좀더 설명이 필요한 게 있다면.
“모래에 상당한 수익을 기대해요. 지금 남쪽에는 모래가 없어요. 일본도 없고. 중국이 주다가 중단했어요, 자기들도 자원이 고갈된다며. 북측은 지금 여유가 있어요. 동해안 지역에서 퍼와 항만이 있는 부산, 울산, 진해, 마산, 제주도로 나를 겁니다.”
“평양이 기름에 붕 떠 있다”
▼ 러시아 천연가스를 끌어온다는 계획도 있다면서요.
“정주영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여러 번 얘기한 겁니다. 일화를 소개하면, 정 회장님이 1998년 10월30일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일입니다. 당시 정 회장님은 다리가 불편했는데, 지팡이 대신 제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넌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살아남았으니 너만큼 든든한 지팡이가 있냐’면서(김 회장은 1989년 리비아 출장길에 항공기 추락 사고를 당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승객 70명이 죽었다). 운이 좋은 놈이라 보신 거죠. 백화원 초대소란 게 게스트 하우스 아닙니까. 국가원수급만 묵는 곳이죠. 그때는 제가 본 면담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이후 방북에선 네 차례 같이 들어갔지만. 당시 정 회장님은 김 위원장과 면담한 후 제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평양에 기름 나면 파이프라인으로 서울로 보내달라’고 하셨대요. 김 위원장이 깜짝 놀랐을 것 아닙니까.”
김 회장이 들려준 당시 정주영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의 대화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아니, 무슨 기름이 난다고 그러십니까.”
“평양이 기름에 붕 떠 있습니다.”
“무슨 근거입니까.”
“기름이 나는 대륙붕이 중국 서해안에서 평양 쪽으로 뻗쳐 있습니다.”
“그럼 (평양에도) 기름이 납니까.”
“납니다.”
“기름이 나면 파이프라인으로 서울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김 회장에 따르면, 정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답변을 듣고선 내심 ‘이제 됐다. 내 목적은 달성됐다’며 흡족해 했다고 한다.
“당시 정 회장님이 돌아오는 길에 판문점에서 기자회견하면서 ‘평양에서 파이프라인으로 기름 들여온다’고 해서 난리가 났었잖아요. 그때 제게 ‘이제 평양에 파이프라인이 생겼으니 러시아에서 가스나 기름을 가져와야 한다’고 귀띔하셨어요. 우리나라는 에너지 문제만 해결하면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다며. 그 후 저를 데리고 이르쿠츠크, 야쿠츠크를 여러 번 다녀오셨지요. ‘저 밑에 가스가 있는데 그걸 파낼 놈은 우리밖에 없다, 우리 민족보다 강한 민족이 없다’면서. 거기가 동토(凍土)예요. 땅 아래로 50m가 얼음입니다. 그런 땅 1000m를 파고 들어가야 가스가 나온대요. 서울까지 파이프라인 길이를 계산해보니 4300㎞야. 정 회장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묻혀 있는 경쟁력 있는 자원을 평양을 통해 직접 갖고 와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했어요.”
김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은 남과 북이 직접 교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륙으로 뻗어나가 대륙의 경쟁력을 흡수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이 그걸 못 받아들인다면 난 못하는 거죠. 나는 (북측과) 만날 때마다 정주영 회장님 말씀을 전해요. 정 회장님이 저보고 그걸 꼭 성공시키라고 하셨기에. 정몽헌 회장님도 2002년 개성 육로가 처음 뚫릴 때 도라산역 앞에서 제 손을 잡고 ‘자전거 타고 러시아 한번 갈 수 있는 거야?’ 하셨죠. 아버님의 뜻을 실현하고 싶었던 거죠.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유서를 통해) ‘명예회장께는 당신이 누구보다 진실한 자식이었다’며 내게 나머지 사업을 잘 추진해달라고 부탁하신 것도 다 그런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건 묻지 마세요”
▼ 김정일 위원장의 성격이 어떤가요.
“아휴, 그런 건 묻지 마세요. 국가지도자를 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예의 바르고, 순발력 있고, 건강하고…. 적절한 표현이 아니겠지만, 똑똑하고요. 남쪽이나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고요. 다섯 시간씩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화제가 떨어지는 법이 없어요. 그것도 남북의 정치·군사 얘기는 꺼내지도 않아요. 경제,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방면에 해박해요.”
2003년 11월18일 금강산관광 개시 5주년을 맞아 경기도 하남의 정주영 회장 묘소를 찾은 현정은 회장과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
“(김 위원장은) 충돌할 법한 얘기는 될 수 있으면 피했어요.”
▼ 김 위원장한테 편지도 몇 번 보내셨다면서요.
“편지로 애걸복걸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경제는 정치·군사 이데올로기를 떠나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업 얘기를 할 때는 실무자들과 엄청 세게 붙습니다.”
이쯤에서 그의 퇴진 원인인 감사비리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 감사비리 파동에 대해 과거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한 마디 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그건 묻지 마세요. 내가 할 말 없다고 했잖아요.”
▼ (감사보고서에) 잘못된 내용은 없나요.
“난 못 봤어요. 언론을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인터뷰가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작은 문제로 큰일 그르치면 안 되죠.”
▼ 좋습니다. 그럼 과거에 업무 처리과정에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고 인정하십니까.
“답을 할 수 없어요.”
▼ 오해가 있었습니까.
“오해가 많았다고 봐야죠. 당시 내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기자들에게 얘기했어요. (현 회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 오해가 있었다고 봅니다. 현 회장에게도 따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 당시 감사 배경이 궁금합니다. 대북사업 주도권과 관련한 내부 알력이라느니 김 회장을 밀어내려는 세력이 감사보고서 내용을 언론에 흘렸다느니 뒷말이 많았는데요.
“더 이상 얘기하지 맙시다. 현재 잘하고 있으면 잘되는 쪽으로 얘기해야지, 과거 일을 자꾸 얘기해서는 도움이 안 되죠.”
▼ 북측에서는 어떻게 봅니까.
“그쪽에서도 다 알죠. 조사를 해봤으니.”
“정주영·정몽헌 선생이 곧 김윤규”
▼ 그쪽에선 깨끗이 정리가 됐나요.
“모르겠어요. 나는 거기에 대해 일절 변명하지 않습니다.”
▼ 현대 내에서도 김 회장의 비리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팀에서 적발한 비리의혹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내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지….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정몽헌 회장님과는 가족처럼 지내왔는데…. 그 정도 일로…. 어쨌든 그 일로 현대가 더 잘되면 좋겠습니다.”
2005년 8월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감사팀이 적발한 김 회장의 비위사실은 한마디로 비자금 조성이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김 회장은 금강산 지역 공사비를 부풀리고 회사자금을 유용해 8억2000만원의 비자금을 만들었다.
▼ 당시 북측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내가 공작한 결과라는 얘기가 있었지요. 아, 북한을 그렇게 움직일 정도라면 꽤 능력 있는 것 아닙니까. 어쨌든 북측의 반응이 더 오해를 불러일으켰지요. 저는 사정이 있었으니 그랬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현대가 잘돼야 다른 기업들도 투자합니다. 김윤규가 안되면 다른 사람들도 안됩니다.”
2005년 10월20일 북한 아태평화위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의 퇴출사태와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요지는 이렇다.
“김윤규 전 부회장 퇴출은 현대와 북한 간의 신의를 저버린 행위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배은망덕이다. 우리는 현대와의 모든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고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금강산관광사업 개척과 추진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주역이 하루아침에 이름도 모를 몇몇 사람들에 의해 축출당하고 민족의 기쁨과 통일의 희망이던 금강산관광이 전면중단의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된 데 대해 우리는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정주영·정몽헌 선생을 떠난 현대를 생각해본 적이 없듯이 정주영·정몽헌 선생을 떠난 김윤규 전 부회장을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정주영·정몽헌 선생이 곧 김윤규로 여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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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북투자, 몇 배로 돌아올 것”
실제로 당시 북한은 김 부회장의 원직복귀를 요구하면서 금강산 관광객 수를 일방적으로 축소하고 백두산 시범관광을 위한 답사도 연기해 현대를 당혹스럽게 했다. 10월27일 김 부회장에 대한 감사를 주도했던 최용묵 현대그룹 경영전략팀장이 전격 사퇴한 데 대해 ‘북측 달래기’라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현대측은 감사보고서 외부 유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 그간 북한은 현대에 대해 지나친 고자세에 갑자기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둥 변덕이 심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그런 태도가 남쪽 기업들에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어요.
“없는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일이 없도록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죠.”
▼ ‘현대 길들이기’ 차원이라고 하는데요.
“그런다고 길이 듭니까. 그런 건 안 되죠.”
▼ 현대의 대북사업은 민족적 차원에서 뜻 깊은 일이지만 경제면에서는 실속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무리한 대북사업이 현대를 망가뜨렸다는 지적인데요.
“대북사업 때문에 특별히 잘못되거나 힘들어진 게 없다고 보는데요. 그간 많이 성장했어요. 지금 현대그룹이 현금을 많이 확보해 현대건설을 다시 인수하려 하잖아요. 다만 금강산에서 많이 벌었는지는 따져봐야겠죠. 그간 돈 들어간 걸 감안하면 아직 본전을 뽑지 못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있죠. 하지만 충분히 뽑아낼 거라고 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가 좋아져 북한과 미국이 수교하면 현대가 굉장히 좋아질 겁니다.”
▼ 2000년 7대 경협사업 명목으로 현금 3억5000만달러, 현물 5000만달러 모두 4억달러를 북한에 줬습니다. 사업권 대가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무리한 투자가 아니었냐는 지적이 있죠. 그것이 대북송금 특검을 부르고 정몽헌 회장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결정한 일도 아니고. 그 돈 제가 보낸 것도 아니고요.”
▼ 현재 대북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당시 현대가 그렇게 거액을 뿌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업권 확보는 잘한 게 아닌가 싶어요. 나중에 큰돈 될 겁니다. 몇십 배로 돌아올 거라 봐요. 지금도 그것이 현대의 대북사업에 상당한 명분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 대북송금 과정에 불법대출, 외국환관리법위반 등 불법행위가 있었지요. 분식회계도 있었고. 당시 김 회장께서 사장을 맡았던 현대건설도 대북송금용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 분식회계를 했지요?
“3개월치 분식에 대해 내게 책임을 묻는데, 3개월간 어떻게 분식을 해요. 현재 법정에서도 그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 기간에 분식으로 내가 착복한 게 있습니까? 감사비리? 그건 회사 내부의 일입니다. 내가 지금 북한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육로도 뚫고 하면서 남북경협에 기여하고 있는데, 그런 걸 자꾸 들춰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100% 잘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조그마한 잘못이 있더라도 언론에서 너그러이 봐주고 격려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현재 현대가 갖고 있는 경협 합의문은 당시 나와 육재희 대표가 만든 겁니다. 나는 공과대학을, 육 대표는 법과대학을 나왔어요. 지금 봐도 참 잘 만든 것 같아요. 우리 민족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김 회장은 대북송금과 관련해 남북교류협력법,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04년 5월 특별사면됐다. 2006년 2월엔 이내흔 전 현대건설 대표 등과 함께 대북송금 당시 분식회계로 사기대출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2년6월형이 선고됐는데, 현재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분식회계했다고 퇴직금도 안 주더라고요. 분식을 해서 채권단에 넘겨줬다는 게 내 죄라는 겁니다. 난 다 털어버렸어요. 채권단에 넘길 때 ‘부도내지 말고 당신들이 빌려준 돈은 출자로 전환하라. (채권 대신) 지분을 가져라’고 얘기했어요. 분식한 걸 다 밝혀 (부채를) 6조~7조원 줄였어요. 그러니 회사가 가벼워질 수밖에. 빚을 털어냈으니. 그 후 현대건설이 살아났잖아요.”
“정몽헌 산소에 포도주 들고 간다”
“회장님이 모든 걸 다 안고 가셨다.” 김 회장이 정몽헌 회장 빈소에서 문상 온 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했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의문투성이인 정 회장의 자살 배경을 암시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당사자에게 확인해봤다.
“정몽헌 회장님은 굉장히 순박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국문과를 나왔잖아요. 문학적인 면이 있었지요. 꼼꼼하고. 당시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남북간 관계가 나빴잖아요. 대북사업을 하는데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얼마나 힘든지 나도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분이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에게 대북사업의 중요성을 알린 것 같았습니다. 그런 뜻에서 임동원씨에게 했던 말입니다.”
▼ 타살설까지 제기됐지요?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어떤 놈은 음해한다고 내 이름까지 거론하더라고요.”
▼ 언제 마지막으로 봤습니까.
“돌아가시기 전날 본 것 같은데….”
▼ 정 회장은 죽기 전전날에도 검찰 조사를 받았죠.
“그때는 나도 매일같이 불려가 조사 받았죠.”
▼ 당시 정 회장과 어떤 얘기를 나눴습니까.
“그분은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에요. 저녁에 만나는 팀이 따로 있었어요. 나중에 들으니 가족과 식사하고 또 누군가와 만나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나는 그 자리에는 없었습니다.”
▼ 검찰 수사에 대해 뭐라 얘기한 게 없나요.
“특별한 얘기가 없었습니다. 나한테 그런 얘기는 잘 안 하셨어요.”
▼ 유서에서 김 회장님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표시했는데요.
“나는 그분이 포도주 마시고 운동하는 자리엔 빠졌어요. 그걸 두고 ‘김윤규는 몽헌 회장과는 가깝지 않다’는 평도 있었지요. 나는 철저하게 일로만 그분을 대했어요. 제가 새벽부터 명예회장님을 친구처럼 아버지처럼 모시는 걸 그분이 다 보셨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유서에서) 나한테 그런 애정을 표시했다고 봐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압 조사 없었다”
▼ 정몽헌 회장은 죽기 일주일쯤 전에도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관광사업을 챙길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는 정몽헌 회장님과 뜻이 같았어요. 돌아가신 다음 (같이 술 마시지 않은 것이) 미안해서 요즘엔 산소에 갈 때마다 포도주를 가져가 따라드립니다.”
▼ 그토록 의욕을 보이던 분이 갑자기 목숨을 버렸는데,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너무 놀라고 당황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지요. 왜 그랬을까. 어떤 놈의 장난일까. 아직도 궁금해요.”
▼ 항간에는 대북송금을 비롯해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 조성에 대해 검찰이 집요하게 파고들자 심리적 압박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는 추측이 있었지요.
“대북송금이나 비자금에 대해서는 힘든 점이 없었을 겁니다. 검찰에서 다 밝혀진 사안이니. 다른 부분에서 뭐가 또 있지 않았나 싶어요. 하여간 그건 제가 모르니까요.”
▼ 전혀 짚이는 점이 없나요.
“나는 엔지니어예요. 돈 문제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 검찰에서 강압 조사를 받지 않았습니까.
“내가 답변하기는 곤란하네요.”
▼ 정몽헌 회장의 경우 모욕을 주는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죠.
“나한테는 안 그랬어요. 내가 검사라도 그 정도는 하지 않았겠나 싶어요. 정 회장님한테는 어떻게 조사했는지 모르겠지만.”
▼ 조사받고 나오면 서로 얘기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변호사도 다 분리하더라고요.”
정몽헌 회장의 죽음은 김 회장의 인생행로가 바뀌는 분기점이었는지 모른다. 정 회장이 살아 있다면 아천글로벌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아천글로벌은 대북사업을 하면서 어떤 원칙을 갖고 있습니까.
“대북사업이 주종은 아닙니다. 국내 건설, 건자재 판매, 해외건설에 주력할 겁니다. 대북사업과 관련해서는 정주영 회장님의 뜻을 받드는 게 원칙입니다. 정주영 회장님은 남북경협사업은 국가와 민족과 함께 해야 한다고 늘 말씀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뜻이 옳다고 봅니다. 또 정몽헌 회장님이 남긴 유지에도 잘 맞출 겁니다. 절대로 남과 부딪치면서 대북사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 현정은 회장을 만날 생각은 없습니까.
“글쎄요.”
▼ 그쪽에서 제의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똑똑한 아드님 뒀다”
마지막으로 현대에 있을 때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물어보자 ‘정주영 마니아’에 어울리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장 큰 보람은 정주영 회장님을 만난 거죠.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시골에서 아버지가 상경해 회사에 찾아왔어요. 아버지는 내가 졸업 후 한동안 취직을 못하다 현대에 들어가자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정주영 사장님께―그때는 사장님이었지요―인사하시겠다고 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장실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고무신에 두루마기 차림이었어요. 비서들이 안 들여보내더라고요. 밖이 시끄러우니 사장님이 안에서 나왔어요. 나를 보시더니 ‘왔어?’ 하고 아는 척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참 똑똑한 아드님 두셨다. 훌륭하시다’고 칭찬하시는 겁니다. 나는 속으로 ‘이 양반이 말단인 나를 어떻게 아나’ 싶었지요. 아버지가 얼마나 기분이 좋으신지, 이번엔 사무실을 좀 보자고 해 내 자리가 있는 5층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사무실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자리였지요. 그때 아버지가 ‘너는 언제 저 꼭대기에 앉을 거냐’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납니다. 정주영 회장님은 큰 사업엔 꼭 나를 끼워 넣으셨어요.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조선소, 올림픽 유치…. 정 회장님과 함께 그런 일들을 했던 게 자랑스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