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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미군정 행정장관 수락하러 가는 길에 좌익이 사주한 테러 당해”

  •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희대 평화대학원 석좌교수 chongsiklee@khu.ac.kr

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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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교수, ‘여운형은 박헌영파에 암살’ 주장

여운형의 가족. 차녀 여연구(두 번째줄 맨 오른쪽)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평화의 진수(眞髓)는 융화로서 모든 투쟁, 시기, 분노, 원한 등 부정적인 것을 씻어버리고, 새가 짹짹거리고 꽃이 피고, 낮이 포근하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기상을 말함이지 결코 사해(死海)와 같이 다만 고요하고 평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희락과 희망과 자유와 평등과 존귀가 다 있는 가운데에 평화가 있는 것이지 두려움과 걱정과 절망과 압박과 차별이 있는 곳에 어찌 평화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에서 동양의 평화를 논해봅시다.”

서양의 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긍정적 평화론’이니 ‘적극적 평화론’을 논하기 시작했지만 몽양은 이미 1919년에 그런 말을 했고 자기의 행동지침으로 삼았습니다.

간사할 邪, 속일 詐, 죽을 死

그는 국제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뿐 아니라 조선공산당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해방 후에는 평양에 왕래하면서 소련군정의 수뇌부는 물론 후에 북한의 수장이 된 김일성과도 자주 만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그를 공산주의자였다고 단정하기도 했습니다. 또 기회주의자였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왜 그는 여러 가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될 행동을 취했던가. 그가 기회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왜 그는 일직선을 걷지 않고 복잡한 길을 택했던가. 과연 여운형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등의 질문은 학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하고 재미있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운형이라는 개인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현대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그가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후의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요구할 사항이 있습니다. 여운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분론적인 측도(測度)나 틀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운형이 ‘기회주의자였다’ 또는 ‘사상이 모호했다’는 평가를 하게 된 것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사상적인 틀을 그에게 맞춰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맞지 않은 틀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운형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의 용어에 끼워 맞출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었지 그가 모호하거나 야릇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운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판단해온 한국의 정치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고 하면 모두 조선왕조 말기의 대원군과 그 주변의 선비들을 연상할 것이지만 저는 척사위정이라는 단어는 한국의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한국의 문화는 독선적이고 교조적입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좌도 그렇고 우도 그렇습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만이 옳다는 독선주의는 조선민족의 핏속에 짙게 흐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아직도 대화문화가 깃들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미 진리와 진실을 알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사(邪, 간사할 사) 아니면 사(詐, 속일 사)일 터이니 사(死, 죽을 사)로 대해야 한다는 송시열적인 문화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여운형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대화를 좋아하고 남에게서 배우는 것을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비(非)한국적인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겠지만 그는 일찍부터 세계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여운형을 진보적인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마르크스가 계급이 없는 사회, 압박이 없는 사회, 평등과 자유의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내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학교도였던 조부의 슬하에서 자라난 여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즉 마르크스주의를 알기 전부터 그런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가 가미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을 통한 혁명을 배척했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척했습니다. 기독교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삼던 그가 공산당의 독재를 선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박헌영이 1946년에 했다고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새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

그렇다면 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지적을 받았을 정도로 공산주의자들과 가깝게 지냈던가. 왜 그는 남다르게 일찍부터 평양 나들이를 자주했고 소련군정의 수뇌부와 만나곤 했던가.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룬 두 가지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반(反)제국주의사상이고 둘째는 독립에 대한 집념입니다. 물론 조국이 분단된 후에는 독립에 대한 집념은 통일독립으로 변했습니다.

여운형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몇 가지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세부적인 것은 이제 곧 출판될 저의 책에서 기술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의 반제국주의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좌우합작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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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정치학, 경희대 평화대학원 석좌교수 chongsikle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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