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이정식 교수 인터뷰

“몽양은 공산당 독재, 폭력혁명, 유물론 배격한 진보적 민족주의자”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7-09-10 1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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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교수 인터뷰
    몽양 추모 학술심포지엄이 끝난 뒤 이정식 교수를 만났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개척자인 이 교수는 ‘한국공산주의 기원’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의 저서를 펴냈으며 정치 및 국제문제 최고 저작에 수여하는 미국 정치학회 우드로 윌슨 파운데이션상을 수상했다.

    공산주의자, 기회주의자

    ▼ 한국 공산주의운동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1957년에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일본 중국 한국 등 아시아 공산주의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제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분이 1년 동안 이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구해온 자료 중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부분을 제가 정리한 게 계기가 됐죠. 그 후 그분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운동을 연구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의 한 분파로서 연구를 계속했고요.”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인 스칼라피노 교수는 아시아 공산주의운동 연구의 대가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조직을 이끌던 ‘전설’의 김일성 장군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당시 한국 학계의 통념을 뒤엎고 동일인물임을 밝혀냈다. 물론 김일성의 항일독립운동이 과장됐다는 것도 입증했다.



    ▼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당시 한국에서 공산주의 연구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한국 공산주의 기원에 대한 제 논문 두 편이 미국의 아시아학회지에 실렸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에 공산주의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였죠. 그게 1960년 4·19혁명 직후에 국내에서 출판됐는데, 형사들이 동국대 이정식 교수라는 분을 찾아가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저와 동명이인인데다 나이도 같고, 더구나 같은 비교정치학 전공이라 오해를 했던 모양이에요.”

    ▼ 정부가 요시찰 인물로 지목하진 않았나요.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1966년 한국에 왔을 때 대접이 너무 좋았어요. 북한 연구를 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어요. 강의하느라 정작 학자로서 연구를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자칫 어용학자 소리를 들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곧장 미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 몽양 여운형은 어떤 계기로 연구하게 됐습니까.

    “스칼라피노 교수가 보내온 자료 중에 일본 경찰이 안창호와 여운형을 신문 조사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걸 인상 깊게 봤어요. 그게 1957년이니 여운형을 알게 된 지 꼭 50년 된 셈이네요. 그 후 한국 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 연구를 하다 보니 여운형이란 인물이 계속 튀어나왔어요. 좌우를 넘나들며 감초처럼 속하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등이 비교적 단순한 인물인 반면, 여운형은 매우 복잡한 인물입니다. 심지어 일제는 미국, 중국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게 힘에 부치니까 1942년부터 중국과 종전(終戰)하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으려 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하던 날, 총독부가 그에게 일본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데 피해가 없도록 치안을 맡아달라고 했을 정도예요.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기회주의자였다고 비난받기도 했어요. 왜 그가 일직선을 걷지 않고 복잡한 길을 택했는지, 과연 몽양의 사상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등은 학자에게 재미있는 과제죠.”

    시대를 앞선 진보적 민족주의자

    ▼ 여운형 전기를 집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확실한 건 1981년에 몽양의 딸 여연구씨를 만났을 때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그전부터 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부터였고요. 올 9월까지 탈고할 계획입니다.”

    ▼ 몽양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활달하고 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국제화한 인물이고, 트인 사람이었어요. 사물을 교조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또한 자기주장만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어요. 자기와 의견이 달라도 대화를 해서 해결점을 찾으려는 사람이었고, 남에게서 배우기를 즐기는 열린 사람이었죠.

    저는 그가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지만 폭력을 통한 혁명을 배척했고, 기독교 배경이 있기 때문에 유물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어요.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삼은 그로선 공산당 독재를 용인할 수 없었던 거죠.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룩한 첫째는 반제국주의 사상이고 둘째는 독립에 대한 집념이었어요. 물론 조국이 분단된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집념은 통일독립으로 변했고요.”

    이정식 교수 인터뷰

    이정식 교수는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와 민족주의 운동사 연구의 선각자다.

    ▼ 몽양은 좌우합작을 주창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여운형은 타협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좌우합작해서 하나의 공동체로 나아가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좌와 우는 각기 정해놓은 목표로 나아가는 데 몽양은 좌와 우가 합해서 타협하는 길로 나아갔어요. 해방 뒤 한국 사람이나 경제 모두 매우 빈곤했어요. 중학 졸업자가 1%도 안 됐죠. 경제나 교육수준이 타협적 상황을 만들지 못했어요. 미·소 갈등이 날로 격화하는 등 국제적 조건도 나빴고요.”

    ▼ 그는 결국 남북으로부터 다 버림받았는데, 당시 좌우합작은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고 봅니까.

    “제가 보기엔 가능성이 있었어요. 좌우합작을 처음 착안해서 추진한 게 미국입니다. 당시 미국에는 소련과의 타협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런데 이승만과 김구는 소련이 배척했고, 공산당은 자기들이 수용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중간세력인 여운형과 김규식을 도우려 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 수백만달러를 지원해서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려고 했어요. 1946년 중반 수립된 대한원조안(案)인 ‘한국 정책(KOREA POLICY)’이 그것인데, 당시 육군장관이던 로버트 페터슨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미국이 방대한 경제원조를 하고, 여운형을 민정장관으로 세우는 계획이 예정대로 실행됐다면 한국경제가 좋아졌을 것이고 몽양 지지세력도 크게 늘어나 좌우합작이 성사됐을 것입니다.”

    미군정 민정장관

    ▼ 여운형이 미군정과 협력했다는 말씀인가요.

    “여운형이 암살당하던 날 승용차를 타고 가려 한 목적지는 미군정의 민정 책임자 E. A. 존슨의 집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제가 입수한 존슨의 회고록 ‘페르 귄트의 모습인 미 제국주의(American Imperialism in the Image of Peer Gynt· 1971)’입니다. 거기에 당시 미군정이 우익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운형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한 독립을 위해선 싸우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는 게 암살 직전 여운형의 결심이었다고 봅니다.”

    ▼ 중국에서는 좌우합작이 공산당을 돕는 결과가 됐습니다.

    “중국국민당이 망한 것은 전술적인 실패 때문이지 국공합작 때문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국공합작이 없었다면 국민당도 공산당도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국공합작이 공산당에만 유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 지금도 좌우합작, 남북합작이 가능할까요.

    “예민한 문제인데, 우선 북한 조선노동당의 대남통일노선이 뭐냐가 중요합니다. 김정일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서 연설한 적이 없어요. 선군(先軍)정치, 강성국가 이야기만 할 뿐이에요. 북한이 미국과 협상할 때 한국은 제쳐놓습니다. 우리만 북한을 짝사랑하고 있지 북한은 대답이 없습니다.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이 평화공존인지 무장통일인지 내부와해에 의한 흡수통일인지를 정확히 알아낸 후에 거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은 지금 북한을 보는 눈이 혼동돼 있어요. 정부가 국민이 합의할 수 있는 시각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동포애로 통일하자는 것은 공산주의체제를 무시하는 것이에요. 종교, 이데올로기 등 이념은 피보다 진합니다.”

    ▼ 오늘날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운형은 융화를 원했는데, 지금 북한이 정말 융화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선 ‘햇볕을 줄 테니 옷을 벗어라’는 식으로 북한에 대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해서는 안 됩니다. 동포애로 기다리면서 북한이 자체 필요에 의해 혹은 자각에 의해 평화공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이 변할 수 있게끔 상황조성을 위해 노력해야지 필요 이상으로 지원하거나 압력을 가하면 안 됩니다. 자꾸 주기만 하면 변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법이에요. 북한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무조건 퍼줘도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서로 도움이 되는 것만 하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박헌영과의 갈등

    ▼ 논문에서 몽양을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다고 주장했는데요.

    “암살을 실행한 사람이 우익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테러범인 한지근을 누가 사주했느냐에 대해선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테러범이 극우였다고 배후 인물도 꼭 극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극좌도 그에게 ‘저 빨갱이를 죽이라’고 사주했을 수 있으니까요. 미군정 자료를 보면 김구, 이승만 등 우익은 오히려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인정했습니다. 더욱이 김구나 이승만은 당시 김규식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던 여운형을 죽일 이유가 없었어요. 여운형과 미국의 관계도 좋았고요.

    반면 당시 소련자료를 보면 남로당이 여운형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남로당은 테러 직전까지 몽양을 맹렬히 매도했고 폭행을 가한 일도 있습니다. 1947년 3월16일 자택에서 좌파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가 일어난 뒤로 여운형은 공산당과 결별합니다. 여운형측은 공산당에 대해 ‘소련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 사대주의 이데올로기’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이렇듯 여운형이 암살 직전까지 숱한 테러를 당하면서 싸운 대상은 우익이 아니라 박헌영 쪽이었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신민당을 남로당으로 통합하는 3당 합당을 추진 중이었는데, 1946년 7월 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박헌영이 몽양이 당수인 인민당에 몽양 명의로 남로당에 합류하도록 지령을 내린 뒤 뒤늦게 몽양에게 서명을 요구했습니다. 몽양은 이런 ‘박헌영의 횡포’에 대해 심한 모욕을 느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 여연구가 쓴 ‘나의 아버지 여운형’을 보면 ‘(어머니와 언니에게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지 물으니)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었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지시를 받았고, 이승만은 미국의 지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걸림돌이 되는 몽양을 제거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고요.

    “그 자서전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1981년에 나를 만났을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당시 여연구는 해외동포원호위원장으로 나 같은 해외동포가 오면 영접하고 배웅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운형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하니까 ‘부친을 암살한 것은 종파분자들이었다’고 말했어요. ‘종파분자’라는 건 공산당 내에서 반당(反黨) 분자로 규정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우익에게 ‘종파분자’라고 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박헌영이라는 얘기죠. 그땐 저도 이 양반이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 자료를 찾으면서 당시 여운형은 좌익들로부터 테러를 많이 당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 말이 자꾸 생각났어요.”

    여운형 재평가 필요

    ▼ 몽양을 박헌영 계열이 암살했다는 심증을 굳힌 것은 언제인가요.

    “경북대 전현수 교수가 구소련의 비밀문건 자료인 ‘스티코프(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일기’와 ‘남조선 정세보고서’를 수집해 번역한 자료를 보게 됐습니다. 2004년과 2006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책입니다. 남로당과 북한에서 정보보고한 것을 그대로 모아놓은 자료인데, 당시 남로당 자료가 세밀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중엔 소련군 관계자가 여운형과 대화한 속기록도 있고, 누가 여운형을 만났고 여운형이 뭐라고 했는지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많이 참고했어요.”

    ▼ 다른 근거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미국 자료는 이미 많은 학자가 대부분 분석을 했는데, 암살에 대한 자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운형의 암살과 관련한 자료가 더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자료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튀어나오게 마련이니까요. 특히 구소련 문서에 어떤 놀라운 보고서가 숨어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 몽양이 우익에게 암살당한 것과 좌익에게 암살당한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운형이 남로당과 적대적이었다는 게 중요하지 누가 암살을 했느냐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합작의 실패에 대해 좀더 깊이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여운형이 한때 소련·공산당과 손잡은 이유는 그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소련 역시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 국내 공산당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등을 돌린 겁니다. 만일 그가 좌익에게 암살당했다면 그 때문일 겁니다. 여운형이 결코 단순한 ‘좌파’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좌우 합작을 추진했던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는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북한 ‘통일신보’는 7월14일자에서 몽양의 암살에 대해 “남조선(남한)에 친미정권을 조작하고 식민지 지배정책을 실시하려는 미국과 그와 야합한 친미 보수세력의 음모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했다. 통일신보는 “외세를 등에 업은 친미 사대분자들이 감행한 테러 암살사건은 여운형 선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연공통일을 주장한 김구 선생과 자주·민주·통일을 요구한 조봉암 선생 등 수많은 애국적 인사들이 친미 사대분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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