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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제대로 살아야 사는 것”… 열사의 울림, 100년을 뛰어넘다

  • 손택균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기자 sohn@donga.com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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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년, 3인의 조선 청년이 네덜란드 헤이그를 향한 대장정에 올랐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 달 넘게 걸려 목적지에 닿은 이들은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다. 한 청년은 울분을 토하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고, 남은 이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하며 비탄에 잠겼으리라. 꼭 100년 전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가 의연히 걸어간 길을 따라가봤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시베리아에선 공간도 시간도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숲일까. 바로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자작나무 물결이 지평선 끝까지 촘촘히 메워진다. 차창 밖으로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통나무집 마을은 목초의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솟아오른 섬이다.

어디서부터 뿌린 밀알일까. 밭의 경계를 어떤 방법으로 구분하고 있을지, 파종과 수확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밤 11시가 가깝도록 희뿌연 빛을 거두지 않다가 겨우 저문 태양은 이른 새벽부터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어스름 하늘을 밝힌다.

거리와 시간을 짐작하는 일이 부질없는 길을 달리기 때문일까. 열차는 마냥 여유롭다. 지구 전체 둘레(4만77km)의 4분의 1에 가까운 먼 길을 고작 시속 70~80km로 느릿느릿 달린다. 샛길 없는 철로에 한번 올라탄 이상, 끝 닿을 때까지는 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2007년 7월14일은 이준(李儁)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기독교대한감리회와 공동 주최로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발자취를 좇는 청년 답사단을 파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b>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지도</b><br>가는 실선 : TSR <br>점선 : 나머지 아시아횡단철도(TAR) 구간 <br>굵은 실선 : 답사단이 탑승한 구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대륙을 횡단해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에 이르는 21일간의 일정. 각 교회의 추천을 받은 감리회 청년 50명(남자 30명, 여자 20명)과 인솔 목사들, 동아일보 취재진 3명과 TV 다큐멘터리 제작진 2명, 협찬사 직원 10명 해서 모두 65명이 참가했다.



6월27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답사단은 이틀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Trans-Siberian Railroad)에 올랐다. 이상설(李相卨)과 이준의 100년 전 기차여정을 되짚는 길의 시작이다. 두 헤이그 특사는 고종 황제의 밀지(密旨)를 가슴에 품고 1907년 5월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보름간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헤이그 특사’ 하면 대개는 분사(憤死)한 이준 열사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설은 이준 못지않게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당시 37세의 이상설이 정사(正使), 48세의 이준이 부사(副使)였다. 답사단 인솔자인 협성대 역사신학과 서영석 교수는 “드라마틱하게 두드러지는 특정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교육이 여러 중요한 인물의 업적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상설은 24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해 불과 2년 뒤 성균관장에 임명된 수재였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는 고종 황제에게 “이래도 나라가 망하고 저래도 나라가 망할 바에야 죽음으로써 조약 인준을 거부해 선대가 남긴 책임을 완수하는 게 낫다”고 뼈아픈 상소를 올렸다.

특사 활동 중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땅에 묻은 뒤 이상설은 유럽을 순회하며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 의병을 규합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그것이었다.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 통령을 맡았다.

1916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을 얻은 그는 이듬해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한다. 향년 47세.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闕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유언은 이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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