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문화재청도 자문하는 도굴꾼의 세계

“‘꼬질대’ 콕콕 쑤셔대면 강태공 손맛처럼 감이 짜릿 오죠”

  • 이 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입력2007-09-11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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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굴(盜掘)의 사전적 의미는 ‘역사·문화적 유물을 무단으로 발굴하는 일’. 국내 도굴 역사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됐다. 이후 도굴꾼들은 ‘꼬질대’와 탐사기를 들고 ‘문화유적 분포도’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문화재를 훔쳐왔다. 더 도굴할 고분이 남지 않은 요즘은 박물관과 사찰의 문화재에 눈독 들이고 있다. 도굴꾼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도굴세계.
    문화재청도 자문하는 도굴꾼의 세계
    2006년 개봉한 영화 ‘마이캡틴, 김대출’은 도굴꾼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 영화의 광고 포스터에서 주인공 김대출은 흙투성이가 된 채 무덤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도자기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영화는 김대출을 그저 보물이 좋아 보물에 죽고 사는 도둑으로 그렸다. 이렇듯 문화재만 탐하는 도굴꾼은 여느 도둑과는 좀 다른 면모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현재 국내 최고 수준으로 꼽는 도굴꾼은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인 서상복씨. 20년 넘게 문화재 도굴꾼을 잡아온 강신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반장도 서씨를 ‘업계 1인자’로 인정했다. 서씨는 2001년 검찰의 대대적인 문화재 사범 단속으로 붙잡히기 전까지 전국의 땅속 유물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20여 년간 그가 도굴, 절도로 유통시킨 문화재 규모는 수십억원대. 전국 각지의 묘터와 대흥사 유물전시관, 장말손 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 같은 박물관이 그의 활동 무대였다.

    모든 범죄가 그렇지만 도굴은 특히 은밀하게 이뤄진다. 도굴꾼들은 믿을 만한 구성원으로 이뤄진 점조직 단위로 활동하기에 ‘바닥’ 자체가 좁은 데다 산과 논밭 등 외진 곳에서 어두운 밤을 틈타 행동한다. 그래서 도굴하다 현장에서 붙잡히는 일은 거의 없다. 도굴 대상이 주인 없는 유물이라는 점도 도굴꾼에게 유리한 요인. “도굴의 세계는 도굴꾼의 입을 빌려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박상국 문화재위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본의 다이너마이트 도굴

    도굴꾼을 알려면 우선 도굴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도굴 수법은 예부터 도제식으로 전수돼왔기 때문이다. 물론 뜨내기가 아닌 ‘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도굴이 본격화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1910년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고분 도굴사건, 1920년대 대동강의 낙랑고분 도굴사건, 경상도의 신라 가야고분 도굴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무덤을 파는 건 터부시됐다. 일제 때 일본인이 우리 무덤을 파헤치면서 도굴이 극성을 부렸다. 당시 일본인들 가운데 돈으로 조선인을 사 귀한 보물을 도굴하게끔 하는 이가 많았다”고 말했다.

    1910~30년에는 마구잡이식 도굴이 횡행했다. 개에게 냄새를 맡게 해 봉분이란 봉분은 죄다 물색했고, 규모가 큰 무덤은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에 왔다간 일본인들 중에는 본국으로 돌아가 “문화재를 이만큼 모아왔다”고 자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국보급이나 보물급의 귀한 문화재가 줄줄이 유출됐음은 물론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서 돈을 받고 땅을 파던 하수인들은 광복 후 골동품 가게를 차려 자신이 도굴한 유물을 팔았다. 가게가 잘되면 사람을 두고 도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웬만큼 배운 이들은 독립해 나가 또 골동품 가게를 차리고…. 도굴꾼의 명맥은 그렇게 이어졌다.

    국내인에 의한 도굴이 가장 성행한 시기는 1960년대. 깜짝 놀랄 만한 규모의 도굴 뉴스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64년 10월 서울에서 도굴꾼 일당이 검거됐다. 일당 중 한 명의 집을 수색하던 경찰은 경악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수백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역대 황족의 태를 묻은 백자태항아리도 다수 있었다. 이들은 서울은 물론 경기 강원 경북 충북 등 전국을 무대로 항아리만 전문으로 도굴한 것으로 밝혀졌다.’(이구열 저, ‘한국문화재수난사’, 돌베개)

    요즘은 도굴사건이 비교적 뜸해 한 해 두세 건의 도굴 소식이 들려올 뿐이다. 그러나 도굴된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실제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문화재 관계자들의 얘기다. 조유전 관장은 도굴이 줄어든 배경에 대해 “전국 봉분의 99%가 도굴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신라 무덤이 유일할 겁니다.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꽉 채워 넣은 적석목곽분 형태라 도굴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석탄 캘 때처럼 갱도를 뚫어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가다 중간에 무덤이 무너지면 생매장당할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파낼 무덤이 없다’는 도굴꾼들의 우스갯소리가 빈말은 아닌 셈이지요.”

    도굴꾼과 고고학자의 敎學相長

    문화재청도 자문하는 도굴꾼의 세계

    2005년 11월 전북 군산시 야미도 인근 바다의 침몰 선박에서 고려청자 320점이 불법 인양됐다.

    고고학계에는 ‘도굴꾼과 고고학자는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말이 전해온다. 문화재에 대한 식견은 365일 전국의 무덤을 발로 뛰는 도굴꾼이 고고학자보다 낫다는 것이다. 박상국 문화재위원의 말이다.

    “문화재 전문 도굴꾼들이 교수들보다 문화재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높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깁니다. 소싯적부터 한학과 문화재를 공부했고 귀중한 문화재를 매일같이 보고 만지는데 그 차이가 클 수밖에요.”

    흔히 도굴은 ‘지능범죄’라고 한다. 도굴할 터를 살피는 것부터 유물 감정에 이르기까지 풍수지리와 문화재 전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굴꾼들은 행동대원, 상선(나까마), 유통업자로 구성된 점조직 단위로 활동한다. 조직의 핵심은 상선, 즉 장물아비들. 이들은 고서 도자기 석물 목불 탱화 등 각각의 전문 분야를 두고 사찰과 고택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행동대원에게 도굴을 지시한다.

    지시받은 목표물을 훔치는 데 성공하면 행동대원은 물건을 들고 상선을 찾아간다.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안목을 자랑하는 상선들은 감정을 거쳐 대금을 치른다. 물건의 전달과 금전거래는 동시에 이뤄지는 게 철칙. 서상복씨는 “오른손으로 물건을 주면 왼손으로 현금을 받는 게 원칙”이라며 “행동대원과 상선은 상호 신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훔친 문화재에 대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고 전했다.

    행동대원과 상선의 거래가 끝나면 상선들은 물건에 관심을 보일 만한 사람들을 찾아 팔아넘긴다.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은 다양하다. 경찰청 광역수사대 김윤석 문화재전담수사반장은 “개인 소장가도 있고 박물관도 있다. 사는 사람은 딱히 특정되지 않는다”고 했고, 서씨는 “대학교수, 박물관장, 대기업 사장 등이 상선의 ‘윗선’”이라고 했다.

    상선은 ‘윗선’과 직거래하고 남은 유물을 전국으로 돌린다. 본격적인 ‘물건 세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물은 전국의 골동품점을 돌며 유통된다. 강신태 반장은 “도굴한 유물이 여러 단계를 거치다 보면 출처가 모호해진다. 도난 문화재를 소유한 사람이 ‘합법적인 매매업소에서 샀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나오면 물증을 잡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조직폭력배가 문화재 도굴에 개입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서상복씨가 보내온 서신 내용이다.

    “저는 (충남) 서산의 모 폭력조직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조폭처럼 이권개입, 술장사, 사채거래 등을 하지 않고 문화재 일을 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수백억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려 중국과 일본에 사무실도 냈습니다. 국내에서 거래하기 힘든 도굴품이나 절도품은 해외 골동품상에 팔았습니다. 좋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해외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조폭이 문화재 거래를 하면 장점이 많습니다. 입이 무거워 들킬 염려가 없고, 설사 검거돼도 혼자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선들도 조폭과의 거래를 선호하는 겁니다.”

    “강태공이 낚시하듯…”

    도굴꾼들은 땅속 유물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낸다. 비법이 뭘까. 아래는 서씨에게서 전해들은 도굴 수법.

    ‘고전적인 방법은 길다란 총구 소제용 꼬질대로 양지바른 곳을 쑤시는 것이다. 이때는 풍수지리를 이용한다. 지형과 산세를 보면 묘를 쓸 만한 지역이 나온다. 묘를 쓸 때 산의 지형과 방향을 보는 것은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형이 험해도 산의 옛 위치를 머릿속에 복원하면 묏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꼬질대로 땅을 쑤실 때는 아무 데나 쑤시는 게 아니라 지형을 보고 평탄한 곳을 찾아 쑤신다. 왜 평탄한 곳이냐 하면, 수백년이 흐르면서 관리를 하지 않아 묘의 봉분이 없어지고 길이나 논밭이 됐기 때문이다. 지형의 흐름에 따라 꼬질대로 땅밑을 쑤셔대면 느낌이 온다. 강태공이 고기를 낚을 때처럼 손에 감촉이 온다. 도자기류인지 금속류인지 그냥 돌덩이인지…. 주변에 우리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해뒀다가 인적이 뜸한 시간에 돌아와 땅을 판다. 청자, 유기그릇, 칼, 방패 등 여러 가지가 나온다.

    그러나 요즘은 장비가 발달해 탐지기를 주로 쓴다. 일본에서 사온 탐지기를 이용하면 지뢰 탐지기처럼 땅위를 훑기만 해도 디지털 모니터에 매장된 물건이 나온다. 철기류, 사기류, 석물류 등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도굴꾼들은 전국을 떠돈다. 땅이 얼면 작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북에서 시작해 남으로 내려간다. 시기는 봄부터 초겨울까지. 한반도 전체가 꽁꽁 언 한겨울에는 잠시 쉬었다가 땅이 녹기 시작하면 다시 북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도굴꾼에겐 전국을 누비고 다닐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이 필수다.

    도굴당하는 고분은 주로 넓은 석판으로 만든 석실이나 석관이 들어 있는 형태. 봉분의 흙만 파고 들어가면 바로 부장품이 안치된 방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이 만든 ‘전국문화유적총람’을 토대로 도굴할 곳을 물색하기도 한다. ‘전국문화유적총람’은 1976년부터 전국 문화재의 위치를 일일이 조사해 만든 일종의 문화재 분포지도. 조유전 관장은 “원래는 지자체에서 문화재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실질적으로 일일이 관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총람은 누구나 볼 수 있으므로 도굴꾼들도 그것을 참고할 것”이라고 했다.

    문화재청도 자문하는 도굴꾼의 세계

    문화재 절도조직으로부터 압수한 문관석 등 시가 1억원어치의 문화재. 이 절도조직은 전국의 문중 묘지를 돌며 석조물 등 100억원 상당의 문화재를 훔쳤다고 진술했다.

    최근에는 도굴사건이 줄어들고 도난사건이 늘어나는 추세다. 강신태 반장은 “도굴할 묘가 줄어들었고, 1990년대 초부터 TV에 문화재를 감정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 ‘문화재가 돈이 된다’는 얘기가 돌면서 도난사건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문화재를 잘 모르는 ‘초짜 털이범’이 늘어나면서 범죄수법은 더 대담해졌다고 한다. ‘프로’들은 국보급 유명 문화재는 유통시키기 어렵다는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물건을 가려서 털지만, 초짜들은 가리지 않고 마구 훔친다는 것. 강 반장은 2003년 국립 공주박물관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 등 국보급 문화재가 털린 황당한 사건을 예로 들었다. 유통이 힘든 등록 문화재를 턴 솜씨를 보니 경험 없는 초짜들 소행 같았는데, 범인들을 붙잡고 보니 역시나 큰돈을 노린 청송감호소 출신들이었다는 것.

    문짝, 문고리까지 뜯어가

    문화재 털이범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안동 김씨, 의성 김씨 등 지방 집성촌의 재실(齋室), 사찰 등이다. 절도 역시 도굴처럼 상선들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다. 상선들은 전국에 정보책을 두고 ‘어느 동네 어느 집에 옛날 책이 많다’는 식의 입소문을 토대로 행동대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고서, 영정 등 대대로 내려오는 오랜 물건부터 문고리, 문짝까지 모두가 ‘작업 대상’이다.

    특히 노인이 홀로 지키는 종가는 좋은 목표물이다. 이런 집은 보안과 관리가 소홀해 한 집이 여러 번 되풀이해 털리기도 한다. 조유전 관장은 “문화재를 국가기관에 위탁하면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지만 그런 정보를 몰라 도난당한 뒤에야 땅을 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집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몰라 물건이 없어진 것을 모르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일단 도굴, 도난당한 유물을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굴꾼들은 파헤친 묘의 입구를 나뭇가지 등으로 정교하게 봉해놓고 자리를 뜬다. 이처럼 사후 처리가 깔끔해 도굴 당시에는 관리인조차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몇 년이 지나 파헤쳐진 부분이 조금씩 내려앉은 뒤에야 신고하는 게 보통이다. 서상복씨 역시 “20년 간 도굴을 했지만 현행범으로 체포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도난은 사정이 좀 다르다. 도난당한 물건이 발견됐더라도 돌려받기가 어려워 허탈해하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는 선의취득(善意取得·장물인지 모르고 사들임) 시효 7년이 지나면 원 소유자가 소유권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남 장성군 백양사는 1994년에 도둑맞은 탱화 한 점을 10년이 지나 서울 인사동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서 발견했다. 극락보전에 걸려 있던 ‘아미타산영산회상도’였다. 탱화 아래 적힌 글귀가 백양사에 걸려 있던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박물관측은 1995년 인사동의 미술상으로부터 합법적으로 구입했다며 선의취득을 주장해 백양사측과 갈등을 빚었다.

    지름길 없는 문화재 수사

    도굴꾼들은 귀중한 유물이 많을 때는 연대가 짧은 것부터 버리기도 한다. 서상복씨의 말이다.

    “도굴을 하면 금관, 도기, 자기, 말안장 등 다양한 유물이 나온다. 무덤 앞의 석물도 도굴 대상이다. 석물처럼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크레인을 이용해 훔치기도 한다. 사찰은 법당 안 불상 안에서 귀중한 복장(伏蔣·불상을 만들 때 부처의 가슴에 금·은·칠보 따위를 넣음)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 금사경, 은사경, 능엄경, 화엄경, 사리, 사리함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유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연대가 300년 미만인 것은 소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태워 없앤 불경만 해도 100억원대의 값어치는 있을 것이다. 한국과 해외에 귀한 도자기가 수없이 많이 전시돼 있고 유통되고 있다. 이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중에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묘를 해체해 꺼낸 것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극히 일부이고, 그나마 도굴꾼이 다녀간 자리에서 뒷북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도굴·도난 문화재 수사는 문화재청과 2006년 7월 출범한 경찰청 광역수사대 문화재전담수사반에서 맡고 있다. 김윤석 반장은 문화재 범죄 수사의 베테랑으로 꼽힌다. 수사 노하우를 묻는 질문에 그는 “문화재 사건은 물밑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정보를 수집하는 것말고는 수사에 별다른 지름길이 없다. 문화재는 크게 석물, 고서, 도자기류로 분류되는데, 항목별 상선을 중심으로 주변의 흐름을 파악하다 보면 대충 선이 보인다”고 했다.

    그는 오랜 기간 골동품상 등 관련 업계 사람들을 접촉하며 만든 리스트를 토대로 수사해 나간다고 한다.

    “도굴·도난품은 주로 서울 인사동, 장안동의 골동품점에서 거래됩니다. 지방에서는 인근에 집성촌이 많은 대구, 충주에서 거래가 많은 편이죠. 이런 곳을 다니면서 물건이 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그런 다음 새로 나도는 물건과 도난 문화재 도록에 나온 문화재를 대조합니다.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탱화와 화기 설명서 등에 등록된 도난 문화재와 모양·상태 등을 대조해 같은 물건이라는 확신이 서면 수사에 들어가죠. 일단 물건이 나온 골동품점 주인을 시작으로 4~5단계씩 윗선을 타고 들어갑니다. 대개 수년 전 도난당한 문화재들이죠. 최근에는 인터넷 문화재 경매도 늘어나 주시하고 있습니다.”

    ‘직지심경’ 상권은 어디에?

    서상복씨는 “1998~2000년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심경) 상권 2권과 직지보다 앞선 불경 1권을 도굴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직지심경 상권의 출처와 불경의 출처 및 소장자를 밝혔고 “현재 직지 소장자가 같이 공개하자고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신태 반장은 “2001년 검찰에서 한 차례 조사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뒤 개인적으로 계속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세 가지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조사하고 있으며, 신빙성이 있을 때 공개할 생각이다. 직지심경 상권이 정말 어디엔가 있다면 국가적인 일이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김윤석 반장은 “서씨의 말은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신뢰할 만한 사람이 그 금속활자본을 감정했다면 적극적으로 찾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서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가적 문화재인 만큼 이를 찾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문화재계가 도굴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들 없이는 도굴된 유물의 행방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은 도굴꾼이 검거되면 그들의 진술에 따라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수사를 벌이며, 때론 교도소에 있는 도굴꾼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고려청자 : 도굴품. 현재 신주쿠에서 한일식당 경영하는 이가 소장. 유통가격 10억원/ 능엄경 언해본 불경 2권 : 1999년 신촌 봉원사에서 도굴. 4권 중 2권은 사찰 회수, 나머지 2권은 공무원이 빼돌림. 유통가격 권당 7000만원….’

    서씨는 최근 보내온 서신에서도 과거에 도굴한 문화재에 대해 언급했다. “순천 선암사에서 훔친 45억원짜리 33도사도와 15억원짜리 팔성도를 선의취득한 개인 소장자가 있다. 한번 알아보라”는 말도 전했다.

    전국의 묘역을 온종일 돌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도난당한 문화재는 공소시효 7년이 지나면 취득할 길이 없다. 국내에서 유통되기 힘든 도굴·도난 문화재는 해외로 유출된다.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으려면 문화재 도굴꾼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우리 문화재 관리의 씁쓸한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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