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국내 최고 수준으로 꼽는 도굴꾼은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인 서상복씨. 20년 넘게 문화재 도굴꾼을 잡아온 강신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반장도 서씨를 ‘업계 1인자’로 인정했다. 서씨는 2001년 검찰의 대대적인 문화재 사범 단속으로 붙잡히기 전까지 전국의 땅속 유물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20여 년간 그가 도굴, 절도로 유통시킨 문화재 규모는 수십억원대. 전국 각지의 묘터와 대흥사 유물전시관, 장말손 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 같은 박물관이 그의 활동 무대였다.
모든 범죄가 그렇지만 도굴은 특히 은밀하게 이뤄진다. 도굴꾼들은 믿을 만한 구성원으로 이뤄진 점조직 단위로 활동하기에 ‘바닥’ 자체가 좁은 데다 산과 논밭 등 외진 곳에서 어두운 밤을 틈타 행동한다. 그래서 도굴하다 현장에서 붙잡히는 일은 거의 없다. 도굴 대상이 주인 없는 유물이라는 점도 도굴꾼에게 유리한 요인. “도굴의 세계는 도굴꾼의 입을 빌려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박상국 문화재위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본의 다이너마이트 도굴
도굴꾼을 알려면 우선 도굴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도굴 수법은 예부터 도제식으로 전수돼왔기 때문이다. 물론 뜨내기가 아닌 ‘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도굴이 본격화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 1910년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고분 도굴사건, 1920년대 대동강의 낙랑고분 도굴사건, 경상도의 신라 가야고분 도굴사건이 대표적이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조선시대에는 조상의 무덤을 파는 건 터부시됐다. 일제 때 일본인이 우리 무덤을 파헤치면서 도굴이 극성을 부렸다. 당시 일본인들 가운데 돈으로 조선인을 사 귀한 보물을 도굴하게끔 하는 이가 많았다”고 말했다.
1910~30년에는 마구잡이식 도굴이 횡행했다. 개에게 냄새를 맡게 해 봉분이란 봉분은 죄다 물색했고, 규모가 큰 무덤은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훼손하기도 했다. 한국에 왔다간 일본인들 중에는 본국으로 돌아가 “문화재를 이만큼 모아왔다”고 자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국보급이나 보물급의 귀한 문화재가 줄줄이 유출됐음은 물론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에게서 돈을 받고 땅을 파던 하수인들은 광복 후 골동품 가게를 차려 자신이 도굴한 유물을 팔았다. 가게가 잘되면 사람을 두고 도굴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웬만큼 배운 이들은 독립해 나가 또 골동품 가게를 차리고…. 도굴꾼의 명맥은 그렇게 이어졌다.
국내인에 의한 도굴이 가장 성행한 시기는 1960년대. 깜짝 놀랄 만한 규모의 도굴 뉴스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964년 10월 서울에서 도굴꾼 일당이 검거됐다. 일당 중 한 명의 집을 수색하던 경찰은 경악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수백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역대 황족의 태를 묻은 백자태항아리도 다수 있었다. 이들은 서울은 물론 경기 강원 경북 충북 등 전국을 무대로 항아리만 전문으로 도굴한 것으로 밝혀졌다.’(이구열 저, ‘한국문화재수난사’, 돌베개)
요즘은 도굴사건이 비교적 뜸해 한 해 두세 건의 도굴 소식이 들려올 뿐이다. 그러나 도굴된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실제 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문화재 관계자들의 얘기다. 조유전 관장은 도굴이 줄어든 배경에 대해 “전국 봉분의 99%가 도굴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 남은 거라곤 신라 무덤이 유일할 겁니다.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꽉 채워 넣은 적석목곽분 형태라 도굴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석탄 캘 때처럼 갱도를 뚫어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가다 중간에 무덤이 무너지면 생매장당할 수 있으니까요. ‘더 이상 파낼 무덤이 없다’는 도굴꾼들의 우스갯소리가 빈말은 아닌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