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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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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반혁명사건으로 법정에 선 박창암씨와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 호외.

반혁명사건으로 투옥되기 전까지 박창암씨의 키워드가 반공이었다면 자유지 창간 이후 그의 주제어는 ‘국사(國史)’로 바뀌었다. 1차적인 계기는 그가 간도에서 자랐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고, 2차적 계기는 당시 대전 지역에서 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씨와의 만남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박씨와 의기가 상통한 이유립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지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이유립씨는 ‘자유’지 전체 지면의 절반 정도를 자신의 글로 ‘도배’하며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

이를 계기로 이유립씨는 주요 언론인과도 교류하기 시작해 1978년 10월22일자 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 1979년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창해출판사 사장은 ‘자유’지를 통해 막 지식인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유립을 접하게 된 것이다.

만주 지역 역사와 고토(故土) 회복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전형배씨는 1979년 여름 어느날 박창암씨를 찾아갔고 그의 소개로 의정부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자일동에 있는 이유립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전씨는 경주법주를 사들고 갔는데, 그를 맞은 이유립씨는 대뜸 “술 사올 돈 있으면 책을 사보거나 책을 사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씨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유립씨로부터 역사와 한문을 배우게 됐다. 한문으로 된 환단고기를 읽고 그 뜻을 푸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지 몰라도 전씨는 “그때 나는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모시는 시봉 노릇에 더 열심이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이유립씨를 지원하는 일을 많이 했다.



전형배 사장과의 만남을 통해 이유립이 실존인물임을 확인한 기자는 취재 폭을 확대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먼저 취재에서 확인된 이유립이란 사람부터 정리해보기로 하자. 이유립 집안은 환단고기와 깊이 엮여 있었으므로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고 그와 환단고기, 그리고 계연수, 가지마 노보루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이유립(李裕?·1907~1986)은 평북 삭주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삭주라는 지방이다. 삭주는 중국과의 국경선인 압록강변에 있는데, 이곳에서 5km쯤 떨어진 곳에 수풍댐이 있다. 그의 부친인 이관즙(李觀楫)은 5남3녀를 뒀는데 이유립은 이 중 다섯째, 아들로는 4남으로 태어났다. 이유립의 재능이 출중했기 때문인지 부친은 다른 아들들은 농사를 짓게 했으나 그에게만은 한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이유립은 여섯 살 때 ‘동몽선습’을 공부했는데 동몽선습에는 ‘한나라의 무제께옵서 이를(위만조선을) 토멸하시고’라는 ‘한무제 토멸지(漢武帝 討滅之)’라는 문구가 있다. 이유립은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자를 중심으로 한 글을 읽기 싫다”며 동몽선습 공부를 중단했다고 한다.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이러한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유립의 본관은 경남 고성(固城)인데, 그가 경남 고성이 아닌 평북 삭주에서 태어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환단고기를 전하게 된 것도 삭주에서 태어난 고성 이씨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고성 이씨 가계도를 살펴보기로 한다.

유·불·선에 능통했던 이암

고성 이씨는 고려 덕종 때의 인물인 이황(李璜)을 시조로 한다. 이황의 후손은 대대로 큰 벼슬을 했는데, 이황의 9세손이 고려 말의 이암(李·#53078;·1297~1364)이다. 이암은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조맹부체 글씨를 잘 쓴 명필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원나라에서 농업 전문서적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가져와 고려에 전파한 인물로 나온다.

이암은 유학을 공부한 문관이지만 무관 임무도 수행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이를 막게 됐으나 방어에 실패했다. 이암은 작은아버지가 큰스님이어서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작은아버지는 승보사찰인 전남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 16국사 가운데 13번째인 각진(覺眞) 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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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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