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권택 감독은 100편의 작품을 넘기면서 101편째와 102편째 영화부터는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만드는 영상의 깊이는 늘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01편째 작품, 그러니까 최근 개봉작 ‘화장’의 전작인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한지(韓紙)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꼼꼼하고 정교한 영상 서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평단의 반응도 ‘적어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지에 대한 단순하고 표피적인 지식을 확장시키고, 그럼으로써 그 관심을 보다 증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영화’라는 것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흥행 면에서는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다. 영화는 지나치게 ‘문예영화’ 취급을 받았다.
‘대가의 영화’와 ‘즐기는 영화’

한지를 소재로 한 임권택 감독의 101편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한지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집중시키려는 생각이 다소 읽히는 듯한 이 영화는 사실 그 같은 목적성이 다분히 개입된 작품이다. 전주시와 전주국제영화제로부터 13억 원을 지원받아 제작됐다. 한지는 전주의 특산물이다. 전주는 임권택 감독을 통해 한지를 전국에, 가능하면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천년학’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고, 무엇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던, 시류에 영합하는 유의 영화가 아니었지만 관객은 이제 서서히 임권택의 품을 떠나려 한다. 그의 영화는 대가와 장인의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안타깝게도 ‘즐기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소 교훈적이고 성찰적인, 그럼으로 해서 중장년층에게 소구(訴求)될 작품이라는 인식이 각인되고 있었다.
어쨌든 전주와 임권택의 관계는 이처럼 끈끈하다. 그건 임권택이 호남 출신,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라는 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호남 출신답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임권택 감독은 종종 그 지방 특유의 걸쭉한 농지거리를 하곤 한다. 임 감독은 사실 은근히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단지 그걸 사람들과 나눌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와 줄곧 영화 얘기만 하려 하니까. 영화와 시대, 영화와 사회, 영화와 역사에 대한 얘기만 물어보려 하니까.
그런데 사실 그와 좀 더 짙게 얘기했어야 할 부분은 바로 영화와 인생이라는 섹션일 것이다. 그는 1936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영화 얘기 말고, 인생 얘기를 물어보면 아마도 진한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겨가며 동시에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한옥마을 풀샷 같은 임권택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만드는 장인에 대한 얘기다.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면 여기엔 역사의 에피소드가 도도히 흘러 다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으로 해서 이런 곳에서는 그리 어려운 담론(談論) 같은 것은 쉽게 내놓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하는 느낌마저 준다. 공연히 젠체하지 말 것, 입 다물고 주변을 즐길 것, 과거의 향기를 가만히 몸 안으로 받아들일 것 등등 마음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가다듬어진다.
전주에서 찍은 수많은 영화의 수많은 촬영 장소가 되는 전주 한옥마을은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다 아래로 내려가 아이드샷(eyed shot)으로 마주하면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팬시(fancy)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옥마을은 점점 더 커머셜(commcial)해지고 있다. 도처에 프랜차이즈형 편의점이 들어서고 음식점도 한결같이 깔끔해졌다. 어딜 가나 화장실도 깨끗하고, 그릇이며 집기들에서 플라스틱이 사라졌다. 철저하게 관광지가 돼가는 중이다.
그런데 꼭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연휴 기간에는 발걸음을 떼기 힘들 만큼 사람이 많다. 한옥마을에서 고즈넉한 느낌을 얻기란 이제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젊은이가 너무 많아졌다. 한옥은 청년보다는 중년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디를 가나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듯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전주에는 위안거리가 많다. 일단 먹을거리가 안심하게 만든다. 공간이 좀 현대화하고 있다 한들, 그래서 좀 불만이 생긴다 한들,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준다는 건 그만큼 대신의 위로를 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주에선 먹을 것이 곧 얘깃거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