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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전주 한옥마을에서 임권택을 만나다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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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길어올리기’는 ‘전주 투어’

예컨대 전주 완산구에 있는 ‘옛촌막걸리’ 가 그런 곳이다. 여기서 서울 사람들이 처음에 실수를 많이 했다. 막걸리가 전문인 이곳에서 서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 안주를 더 해달라, 저 안주를 더 해달라 해서 결국 주인아줌마와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도 그럴 만한 일인 것이, 여기서는 안주가 공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안주를 더 해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건 ‘안주 리필’과 다른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주는 막걸리 판매 단위인 주전자 하나, 주전자 둘, 주전자 셋에 따라 계속해서 ‘업그레이드’가 된다. 그러니 안주를 더 먹고 싶으면 주전자 막걸리를 하나 더 시키면 될 일이다. 그래서 요즘엔 손님들이 헷갈리지 말라고 아예 한 주전자 기준 얼마에 안주 뭐뭐, 두 주전자 기준 얼마에 안주 뭐뭐, 라는 식의 메뉴판이 붙어 있다. 일종의 코스 요리인 셈이다.

전주를 비롯해 전라도 전역에서는 안주 인심이 아주 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찬이 한 상 가득,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져 나온다. 막걸릿집도 예외가 아닌데, 예를 들어 두 주전자 기준으로 시키면 안주가 무려 10가지나 나온다. 삼계탕, 김치찜, 족발, 파전, 프라이, 생선, 대하구이(혹은 낙지볶음), 간장게장, 은행구이, 홍합탕 등이다. 이것도 조금씩 조금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한 판씩 나온다. 이러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전주에 오면 영화 때문만이 아니라 순전히 음식 하나 때문에 입이 헤벌어진다. 이렇게 융숭하게 대접받는 게 어디서 가능했겠냐 싶다.

아마도 임권택 감독이 ‘달빛 길어올리기’를 찍을 때 그 무대를 아무런 이견 없이 단박에 전주로 결정한 것도 스태프들의 먹을거리가 가장 풍부할 것이라는 소신 아닌 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이 동네에서 먹을거리만큼 유명한 한지에 대한 얘기가 임 감독의 가슴에 예술의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유독 막걸릿집이나 한정식집 같은 먹을 곳과 여러 군데의 한지 공방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막걸릿집 촬영장소로는 ‘옛촌막걸리’ 대신 ‘참새와 방앗간’이 쓰였다. 전주 한옥마을 천양제지와 김혜미자 공방, 전주 흑석골 고궁한지, 전주 용머리고개에 있는 골동품 가게 같은 곳도 주요 촬영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럼으로 해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하나의 거대한 전주 투어 같은 영화다. 이를테면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나 ‘환상의 그대’ ‘로마 위드 러브’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와 같은 반열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임권택 감독의 102편째 영화 ‘화장’은 영화에 대한 임 감독의 고뇌를 솔직히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영화로 나이 먹는다는 것

영화는 나이를 먹은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젊을 때 알았다고 생각한 영화는 사실 또 그만큼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나이를 먹기 전까지는 무엇인가를 자꾸 드러내지 않으려고만 한다. 개인적인 것,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 나이를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남자의 욕구 같은 것, 그래서 부끄러운 것. 그런 건 가능한 한 밝히지 않고 숨기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또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그런 걸 밖으로 꺼내 보여주고 싶어 한다. 드러내는 영화. 감정적으로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얘기. 임권택의 최신작 ‘화장’은 바로 그런 영화였다.

그러나 ‘화장’ 역시 지난 4월 개봉 당시, 어쩌면 애당초 정해진 운명을 타고났을지 모른다. 말년 임권택의 최대 역작임에도 흥행은 신통치가 않았다. 임권택 감독도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주연배우 안성기도 같은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영화 ‘화장’은 작가 김훈과 거장 임권택의 만남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작품이다. 임권택은 오랫동안 작가 이청준과 작업을 했다. ‘서편제’에서 ‘천년학’까지, 영화를 찍는 임권택 옆에서 이청준은 말년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있다 가셨다. 이청준이 있어야 임권택 역시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이청준 작가가 세상을 뜨자 임권택 영화는 100편째에서 막힌 듯이 보였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전남 고흥 당남해변 가는 길에 있는 농장.

火葬과 化粧

‘달빛 길어올리기’가 실패한 건 어쩌면 이청준 없이 찍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임권택은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결국 김훈을 만났다. 그리고 이 노붕(老鵬)은 다시 비상(飛上)했다. ‘화장’은 그가 여전히 뛰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장 감독임을 입증하는 데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화장’은 초로의 한 남자가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보낼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직원 중 한 명인 젊은 여성에게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건 임권택 스스로 지금의 영화와 관객들에게 느낀 감정 그대로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영화를 떠나보내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관객과 만나고 싶어 한다. 영화 속 초로의 남자 안성기는 임권택 자신이고, 죽어가는 아내 김호정은 그의 영화이며, 젊은 여성 김규리는 임권택이 새로 만나고 싶어 하는 요즘 관객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안성기는 김규리를 ‘갖지’ 못한다. 아니 아예 ‘갖지’ 않으려 한다. 그건 어쩌면 임권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안성기처럼 서서히 세상을 등질 준비를 해나갈 것이다. ‘화장’에서 임권택 감독이 보여준 투혼의 연출은 사람들 가슴에 눈물을 차오르게 만든다. 임권택의 ‘화장’은 그래서 매우 진실된 맛이 철철 넘쳐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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