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노동 대가로 사기 어음 건네는 정치 현실
좋은 일 하니 공짜 인력 쓴다?
민주당 돈 봉투 의혹, 후진적 정치 문화 상징
문재인 전 대통령이 5월 10일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책방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책을 추천하고 있다. [뉴시스]
‘평산책방’의 자원봉사자 모집은 예상대로 큰 논란을 낳았다.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 오전·오후 각각 4시간 또는 종일 9시간 동안 일할 자원봉사자 50명을 선착순으로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혜택은 급여가 아닌 평산책방 굿즈와 식사·간식. 그마저도 식사는 종일 근무자에게만 제공된다고 했다. 이 공지를 보고도 뜨악하지 않았다면 남에게 열정을 강요하는 꼰대이거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일 것이다. 해당 공고는 당연히 ‘열정페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평산책방은 결국 자원봉사자 모집을 하루 만인 5월 8일 철회했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평산마을에 위치한 평산책방은 책을 통한 소통과 교류의 장을 만들고 싶다며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비를 털어 4월 25일 문을 연 서점이다. 전직 대통령이 운영하는 서점은 오픈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운영 한 달 만에 2만여 권의 책을 파는 등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혹자는 “잊히고 싶다던 분이 왜 다시 전면에 나서느냐”며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전직 대통령이 시민들과 지근거리에서 소통하려 한다는 점, 그 소재가 책이라는 점은 이유를 막론하고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자원봉사자 모집은 분명 아쉽다. 도대체 언제 적 열정페이인가. 이번 사건은 문 전 대통령과 그 참모진의 인식이 한국 사회에서 열정페이 논란이 처음 대두된 2010년대 중반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열정페이가 문제 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국회 홈페이지 내 의원실 채용 게시판을 보면 정당을 막론하고 무급 입법보조원을 채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입법보조원은 말 그대로 의원실 업무를 보조하는 자원봉사자다. 현장에서는 홍보·입법·국정감사 등 실제 보좌진과 다르지 않은 일을 하지만 대가는 고작해야 ‘소정의 교통비와 식비’ 정도다. 일부 양심적인 의원실은 인턴에 준하는 급여를 지급하기도 한다. “무급이라도 국회에서 경력을 쌓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주된 이유다.
‘월급 10만 원’ 열정페이 논란과 헬조선
열정페이는 무급 또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주면서 노력을 강요하는 사회 현실을 비꼰 단어다. 2014년 한 유명 패션디자이너가 직원들에게 형편없는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각됐다. 참고로 그는 견습에게 10만 원, 인턴에게 30만 원, 정직원에게 110만 원을 급여(야근 수당 포함)로 지급했다. 비슷한 시기 한 소셜커머스 업체가 구직자들에게 실무 평가를 빌미로 2주간 영업을 시키고 단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아 공분을 샀다. 수습사원 신분이던 구직자들은 최종 합격을 위해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며 계약을 따냈지만, 사측은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없다’며 전원 해고 통보하고 일당 5만 원씩을 지급해 물의를 빚었다.당시 이 두 사건이 워낙 화제가 돼 열정페이의 대표 사례로 남아 있을 뿐,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은 흔하디흔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열정’이 바람직한 청년의 상(像)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기업·언론 등 이른바 청년들이 선망하는 일자리는 늘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다. 그만큼 경쟁은 치열해지고 관련 이력 한 줄 채우는 것도 쉽지 않다. 고용주들은 이런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경력 쌓을 기회를 줄 테니 네 열정을 바쳐보라. 대신 공짜로.’
이런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앞선 두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청년세대를 관통한 그 분노는 급기야 이 나라가 지옥만큼 살기 힘들다는 의미의 ‘헬조선(Hell+조선의 합성어)’ 현상으로 번져나갔다. 정치권이 청년들의 목소리에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인 것도 이때부터였다.
열정페이와 헬조선 담론이 2015년 대한민국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여기에 놀란 정부는 2016년 들어 ‘열정페이 가이드라인(일경험 수련생에 대한 법적 지위 판단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는 등 청년층의 분노를 달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이 거듭된 덕분인지 민간 영역에서는 열정페이가 상당 부분 해소된 게 사실이다. 이제는 인턴이라도 함부로 돈을 주지 않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주52시간제가 도입된 이후론 인턴·수습생에게 밤낮없이 일을 시키는 관행도 많이 사라졌다.
정치권은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다. 앞서 언급한 입법보조원은 극히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선거 캠프라든지 청년위원회·대학생위원회 등 청년들이 맡게 되는 주요 당직은 수고에 따른 급여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고 활동한다. 2020년 9월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더불어민주당 청년최고위원에 지명된 박성민 전 대통령청년비서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매월 150만 원씩 내야 하는 직책당비가 부담스럽다며 이낙연 대표에게 당비를 감면해 달라고 요구했다.
많은 이들이 “그것도 모르고 최고위원직을 수락했느냐”고 비판했지만 개인적으론 의견이 다르다. 당직의 고하에 따라 당비를 높이거나 낮춰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매관매직이 아니면 무엇인가. 물론 이를 권리와 의무의 비례라는 측면에서 볼 수는 있다. 그 경우에도 일하는 만큼 보상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많은 정무직 당직자가 당을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노동착취가 자원봉사나 정당 활동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포장된다. 한국 정치는 열정페이라는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돈 봉투’ 부르는 정치관계법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당 대변인단에게 활동비를 지급했다. [동아DB]
당시 국민의힘 사례가 보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변인단에 활동비를 지급한 건 이 전 대표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일 뿐, 제도화된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나라 정당법은 정당이 고용할 수 있는 유급 사무직원 수를 중앙당 100명, 시·도당 100명으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정무직 당직자들이 고생한다고 무턱대고 활동비를 챙겨줬다간 쇠고랑 차기 십상이다.
심지어 선거 때 캠프에서 일하는 직원들 급여를 챙겨주는 것도 녹록지
않다. 공직선거법은 선거운동 개시일 전까지 선거사무장 등 캠프 직원들에게 수당과 실비를 지급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선거운동 개시일 전에 수당과 실비를 주지 못하는 게 왜 문제냐 하면, 우리나라 선거법에서는 선거 기간을 매우 짧게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23일, 국회의원 및 지방선거 14일이다. 대선은 약 3주, 총선과 지선은 2주 동안만 캠프 직원들에게 정해진 급여를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그 이전엔 모두 무급 자원봉사자로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서너 달은 사명감으로 일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대선 캠프의 경우 빠르면 1년 전부터 꾸려지기도 한다. 당내 경선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을 기준으로 했을 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6월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7월에 각각 경선 캠프를 차렸다. 공식적으로 이때부터 캠프에 합류했다면 대선일까지 반년 이상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자원봉사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소요되는 상당한 비용, 즉 자원봉사자 활동비나 식비 등이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먹고살아야 하는 생활인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하지 않을 순 없으니 음성적으로 금일봉이 오고 간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당대표 선거 경선에서 오고 갔다는 ‘돈 봉투’는 그렇게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돈 봉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이 전당대회 때 송 후보 캠프 밥값이 필요하니 돈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오는가 하면, 정성호 의원은 송 전 대표를 두둔하며 “기름값, 밥값 수준이기 때문에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나오는 ‘밥값’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밥값이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민주당 돈 봉투 의혹은 우리나라 후진적 정치 문화와 비현실적 제도가 결합돼 만들어진 산물인 셈이다.
수고에는 제값 따라야 한다
열정페이는 제도에서 비롯됐다. 그 제도는 인식의 산물이다. 결국 정치권에 만연한 열정페이는 “그렇게 해도 문제없다”는 기성 정치권의 고루한 인식과 문화가 만든 부조리다. 누군가는 문자 보낼 돈 아껴 사람들 보수 챙겨줄 때, 다른 누군가는 임금에서 아낀 돈으로 문자 보낼 생각을 한다. 정치권은 문자·현수막 같은 비효율적인 일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붓는데 정작 그 분야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은 열정페이로 고생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정치권의 열정페이는 왜 문제인가? 세상사 등가교환이 기본이다. 개인이 말도 안 되는 열정페이를 감수하는 건 그에 상응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면 공직에 데려가겠다는 약속, 이 당에서 열심히 하면 공천을 받거나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개인의 이런 꿈과 욕망을 알기에 정치권은 손쉽게 공짜 인력을 부린다. 일종의 어음이다.
이런 암묵적 합의는 상황에 따라 깨지기도 한다. 제19대 대선 과정에서 댓글 작업을 돕고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반대로 돌아서서 민주당으로부터 고발당했던 드루킹은 대표적 ‘나쁜 사례’다. 물론 이는 극단적 경우다. 하지만 기껏 생계도 포기해 가며 선거를 도왔는데 선거가 끝나고 배신당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정치권이 노동력의 대가로 사기 어음을 발행하는 격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로 인해 열정페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정치권에 남게 된다는 점이다. 생계 활동을 영위하지 않아도 되는 자산가, 집에서 내준 돈으로 수익 모델도 불분명한 사업을 하는 청년, 수임한 재판보다 정치권 인사들과 어울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변호사 등등. 이들이 보편적인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거라 기대하긴 어렵다. 정치권의 열정페이는 정당엔 공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땐 결코 공짜가 아니다.
평산책방의 자원봉사자 모집을 지금까지 언급한 정치적 거래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기저에 자리 잡은 인식은 정치권 열정페이의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하니까 공짜 인력을 쓸 자격이 있다’는 심리다. 평산책방이 진짜 공익사업을 목적으로 운영된다면 한 달에 2만 권 넘게 판 돈으로 사람을 많이 고용하고 그들의 인건비를 제대로 챙겨주는 게 맞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대통령후보 시절 적폐 청산을 약속했다. 적폐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다. 전 정권의 문제점을 하나씩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이 대거 구속됐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 이후 한국 정치가 더 나아졌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 전 대통령이 진정으로 청산했어야 할 적폐는 전 정권의 비위 사실보단 청년과 지지자들의 수고에 제값을 치르지 않으려는 정치권의 오랜 관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동아 7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