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과학과 예술 사이에 경계선이 있나요?”

  • 글·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jikija@donga.com

    입력2007-03-12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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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괴짜 발명가의 연구실이 이쯤 되지 않을까? 헬륨 가스통에 알록달록 풍선들, 정체를 알 수 없는 호리병 같은 유리관에다 낡은 현미경들이 여기저기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책상 위의 X선 사진이 유일하게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데, 이것도 희한하다. 해골 네 개가 다정하게 모여 있다. 그는 오늘도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며 웃는다.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연세대 의대 부속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진단방사선과) 정태섭(鄭台燮·53) 교수는 자신을 ‘괴짜’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괴짜임을 즐기고, 괴짜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면 청소년 시절 품었던 과학자의 꿈을 우회적으로나마 보상받고, 누구에게나 격의 없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의하러 갈 땐 돼지코를 빼닮은 척추뼈 CT(컴퓨터단층촬영)사진을 챙겨들고, 음악회에 갈 땐 오선지 넥타이를 매며, 학회 세미나에서 만나는 외국 학자들과는 과학자 얼굴이 그려진 화폐며 1700∼1800년대 현미경 등을 화제로 장시간 대화한다.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X선 기기로 장미를 촬영하는 정태섭 교수. X선 촬영한 장미는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하다.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정 교수는 오래전부터 과학자의 얼굴이 들어간 화폐를 수집하고 있다. 그는 10만원권 지폐에는 과학자의 얼굴이 들어가기를 바란다(왼쪽). 병원을 찾은 어린이들과 별을 관측하는 정 교수. 10년 전부터 매년 봄 ‘별 보기 교실’을 열고 있다(오른쪽).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한 정 교수는 사투리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 게 싫어 입을 꼭 닫고 ‘혼자 놀기’에 빠져들었다. 라디오며 오디오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고, 청계천변 상점을 다니며 관련 재료들을 사 모았다. 호기심 많은 그에게 청계천의 상점들은 곳곳에 보물이 숨겨진 놀이터였다. 그러면서 망원경도 만들고, 오래된 화폐도 하나 둘 수집했다. 의대에 진학한 뒤 전공을 진단방사선과로 정한 것도 ‘기계가 가장 많은’ 과였기 때문이다. 무의촌 진료를 가면 환자보다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쳐줄 때가 더 많았던 그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 교수로 안착하기까지 10년 넘는 기간에는 낭만이나 호기심은 접고 ‘생존’을 우선해야 했다. 혼자 연구실에 박혀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다보면 답답하고 막막해졌다. 그럴 때는 밖으로 나가 별을 보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망원경을 설치하고 별을 보면 병실에 있던 아이들이 쫓아 내려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에워쌌다. 아이들이 별 구경 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친절한’ 의사가 되어갔다. 병마에 주눅든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되찾는 모습을 보고는 틈틈이 과거의 ‘재주’를 살려 어린 환자들에게 솜사탕이며 풍선을 만들어주고, 보호자들의 어릴 적 추억이 담긴 ‘달고나’도 만들어 보였다.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후배 의사들과 CT사진을 판독하는 정 교수. 뇌 단면 사진에서 ‘Y’자를 찾아내고는 “인체에 연세대 마크가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영상의학자 정태섭 - X선 작품 제작

    언뜻 정신없어 보이는 그의 연구실 구석구석엔 언제든 ‘깜짝 선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갖가지 재료와 도구들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라면 환자는 물론 지역 주민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의사 자격만 갖고 연구에 소홀한 채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매달린다면 그것도 한심한 일이다. 그래서 정 교수는 익히 갖고 있던 손재주를 활용하고,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취미를 전공 안에서 찾았다. 집도 병원에서 도보 10분 거리로 옮겼다. 남들이 골프클럽을 사고 필드에 나갈 때 그는 오늘날 X선 기기의 모태인 튜브며 1700~1800년대 현미경을 수집하고 과학사를 공부했다. 오늘날 병리학에 쓰이는 기기들이 과거 상류층의 고상한 취미에 사용됐음을 알고, ‘예술 하는’ 기분으로 그것들을 조작해보면 이골이 난 자신의 전공분야가 예술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실제로 X선 기기의 원조 격인 호리병 모양의 튜브 안엔 꽃 모양의 형광물질이 있어 튜브 밖에서 전기를 통하게 하니 화려한 불빛이 만들어졌다. 또 수백년 된 현미경으로 당시 만들어진 슬라이드를 들여다보니 사방 1mm도 안 되는 작은 이물질의 정체가 한 가족의 초상화였다. 정 교수는 이런 재미난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오는 가을, 대한영상의학회에서 ‘뢴트겐 역사과학교실’을 연다.

    그의 책상 앞에 걸린 ‘다정한 해골사진’은 X선으로 촬영한 그의 가족사진이다. 사진 판독이 주업인 그는 10년 전쯤 CT 사진을 정리하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뇌 단면에 하트 모양이 자리잡고 있고, 척추 단면은 마치 돼지머리를 찍은 것 같은 모양새였던 것. 무심코 보면 골치 아픈 암 덩어리이고, 흔하디흔한 척추뼈일 뿐인데 하트며 돼지코로 보기 시작하니 같은 사진도 더 열심히 들여다보고, 이미 본 것도 다시 보게 됐다. 신기한 발견은 환자들에게도 웃음을 줬다.

    불현듯 ‘작품’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틈날 때마다 진단장비로 나뭇잎이며 과일, 카메라 등을 찍었다. 일반 카메라로 촬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러다 네 식구가 X선 기기 앞에 섰다. 정 교수는 가족해골사진에 가족과 사회, 전공 등 자신이 애정을 품은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아마 환자 대신 사물을 찍는 독특한 취미가 없었다면 고된 의사 생활을 버텨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정 교수는 “오는 3월, 작가가 된다”며 으쓱해했다. 그동안 만들어놓은 X선 작품 사진을 다른 작가들과 함께 전시하게 된 것. 후배 의사에게 부탁해 입에 브로치를 물게 한 뒤 X선으로 촬영한 사진(기형도 시인의 대표작 ‘입속의 검은 잎’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등을 선보인다.

    정 교수는 “예술과 과학이 전혀 다른 분야 같지만 창의적이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점에서 결국 같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다. 환자에게 필요한 의사는 아마도 과학적이면서 예술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의술이 단순히 죽음을 지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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