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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기 변호사의 골프생각

회원제 골프장의 위험성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기형아

  • 소동기 변호사, 법무법인 보나 대표 sodongki@bonalaw.com / 일러스트·김영민

회원제 골프장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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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쇼와 공황을 거쳐 1937년 개장한 고가네이(小金井) 컨트리클럽의 창립자 후카자와(深澤喜一)는 자금을 일반 골퍼들로부터 조달하기 위해 골프장 소유회사의 주식을 주당 500엔에 모집했다. 당시의 모집안내서에는 ‘회원은 주주에 그치지 않고 주식을 제3자에게 양도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로서도 유리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주주회원권의 탄생이고 회원권 자산화의 효시다. 사단법인제 골프장에서는 공익성의 존부가 문제됐기 때문에 골프장 소유회사의 주주하고만 회원계약을 체결하는 회원들을 임의단체(법적으로는 권리능력이 없는 사단인 경우가 많음) 구조로 조직한 주주회원제 골프장은 현재 일본의 법률제도 아래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회원제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주주회원제에 의한 자금조달, 즉 주주회원제가 1965년 무렵까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골프장을 건설하는 데는 100억엔 안팎의 초기 투자가 필요했지만 버블기에는 200억~300억엔이 넘게 들어간 골프장이 적지 않았다. 200억엔을 투자했다면 1억엔 이익이 난다 해도 겨우 0.5%의 이익밖에 나지 않은 저수익 사업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그런 저수익 사업에 이해관계에 밝은 사업가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해 버블기에는 골프장이 600여 곳이나 건설됐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주 간단했다. 바로 예탁금 회원제라는 것이다.

본래 사업의욕은 있으나 자본이 없는 사람이 대규모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돈 많은 사람으로부터 출자형식으로 자금을 빌려 배당 형식으로 환원한다. 이것이 주식회사 제도다. 회원제 골프장같이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 사업은 이 방식에 의한 자금조달이 정도(正道)다.

그러나 주식회사 제도의 오너십은 출자자, 곧 주주에게 있다. 주식회사 제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해 골프장 조성이라는 어려운 일을 이뤄내더라도 그 성과를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경영자는 언제 주주로부터 해임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업자가 돈을 내더라도 오너십은 자기 휘하에 둘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예탁금 제도인 것이다.

이 제도의 발안자는 한때 소득순위로 일본 1위에 랭크된 적이 있는 사사키 신타로씨다. 그가 1958년 이바라키현에 오픈했던 도리테코쿠사이(取手國際) 컨트리클럽에서 예탁금제를 운영한 게 최초였다. 1958년은 가쓰미카세키 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된 캐나다컵에서 일본이 단체우승을 하고 개인전에서는 나카무라 도라키치 선수가 우승함으로써 온 일본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골프라는 운동에 쏠린 1957년 바로 다음해로서, 일본 골프붐의 원년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런 시기였다.



당시 골프장의 숫자는 117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요에 공급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 이를 보고 사사키씨는 절호의 비즈니스 찬스가 도래했음을 통찰하고는 출자 형식을 취하지 않는 자금조달방식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1965년 이후에는 예탁금제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앞서 본 특정서비스산업 실태조사에 의하면 회원제 골프장의 80% 이상이 예탁금제 골프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골프장사(史)

이제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국에 골프가 전래된 것은 1897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1880년 함경남도 원산항이 개항하면서 한국의 해관 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해관 안 유목산 중턱에 6홀 규모의 간이 코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훗날 시가지를 확장하느라 외인촌을 철거할 때 다락방에서 클럽세트 등 골프 용구가 쏟아져 나왔으며 이후 그들이 골프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특히 이 골프클럽을 포장한 신문지가 1897년도 판이어서 국내에 골프가 도입된 시점이 그 이전임을 추정케 한다. 이러한 사실은 1940년 발행된 ‘조선골프소사’에서 골프역사가인 다카히다씨가 기술하고 있다고 한다.

효창원 골프코스는 전장 2300야드의 9홀 규모로 일제 강점기인 1919년 5월에 착공해 1921년 6월1일 개장했다. 이 코스는 조선호텔 이용객을 위한 부속시설로 만들어져 처음엔 7홀만 사용됐으나 외국인 내장객만으로는 적자를 면하기 어렵자 법인체인 경성골프구락부를 조직하게 된다. 경성골프구락부는 효창원코스가 공원으로 편입되며 폐장되자 청량리 골프코스를 개장했고(1924년), 이 코스가 폐장되자 다시 군자리 골프코스(1930년)를 개장한다.

이 무렵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골프코스가 만들어졌다. 1923년 대구 골프코스가 9홀 규모로 개장했고, 1928년 평양 골프코스, 1929년 원산 송도원 골프코스, 1932년 부산 골프코스가 각각 9홀로 개장했다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폐장했다.

군자리 골프코스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장됐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1950년 5월 복원됐지만, 불과 한 달 만에 6·25전쟁이 발발해 다시 폐장됐다. 휴전 후 군자리 골프코스 복원이 재개됐고, 1953년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가 창설되면서 1954년 18홀(파72)의 국제규모를 자랑하는 골프코스로 개장했다. 서울컨트리구락부는 1972년 군자리 골프코스를 어린이대공원 자리로 내주면서 고양시에 있는 36홀의 한양골프장 주식을 인수해 이전했다. 지방 코스로는 1956년 부산해운대에 부산컨트리클럽이 개장했다. 부산컨트리클럽은 2610야드 9홀 규모였으나 1971년 7월 동래구 노포동에 18홀 6402야드 규모로 재조성됐다.

1960년 비약적인 경제발전에 힘입어 골프인구가 증가하자 민간자본으로서는 국내 처음으로 1964년 9월 한양컨트리클럽이 문을 열었다. 이어서 1965년 제주컨트리클럽이 개장했고, 1966년 태릉과 뉴코리아, 1967년 관악, 1968년 안양컨트리클럽이 개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용인과 인천국제가 개장했고, 1971년에 부산과 동래, 남서울이 개장하는 등 1970년대 말에 모두 22곳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1980년 프라자를 비롯해 1989년 개장한 중문 등 10년간 모두 20곳의 골프장이 건설되면서 한국의 골프장은 1989년 말 42곳으로 증가했다. 이후 2006년 현재까지 연도별 골프장 개장현황은 표와 같다.

연도별 골프장 개장 현황
1990 1995 2000 2003 2004 2005 2006
회원제 43 79 108 122 132 143 154
퍼블릭 9 16 40 55 58 77 93
기타 골프장 3 4 4 4 4 4 4
합계 55 99 152 181 194 224 251
증가수 25 44 53 29 13 30 27
증가율 83%80%53.5%9.7%7.2%1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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