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으로 치료하는 시대…‘복약 순응도’가 관건
알약 삼키기 어려운 영유아·고령자 ‘녹여 먹기’ 가능
피하주사로 5분 내 투여…특허 방어 효과도
월 1회 비만 주사 니즈 증가, 편의성=경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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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약 순응도란 의사의 처방과 약사의 복약지도를 환자가 이행하는 정도를 뜻한다. 복약 순응도는 치료 효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순응도가 낮을 때 약효가 감소하는 것은 물론 내성, 합병증 발생 등의 문제가 생긴다. 이러한 이유로 제약·바이오기업들은 약물전달시스템(Drug Delivery System·DDS)을 이용해 약물의 제형을 바꾸거나 약효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적용해 투약 횟수를 줄이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DDS는 기존 의약품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투여 형태, 시간, 방출 장소 등을 제어하고 약물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제형을 설계하는 기술을 총칭한다.
투약 편의성을 높이는 기술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전 세계 DDS 시장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약물전달시스템 시장규모는 2023년 427억1000만 달러(59조 원)에서 2032년에는 633억8000만 달러(87조 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 없이 녹여 먹는다
성장세가 높은 대표 기술로는 구강점막 약물 전달 기술이 있다. 이는 혀, 볼, 잇몸 등 구강 내 점막을 통해 약물을 체내로 전달하는 방법으로, 구강붕해정(정제), 필름, 액체, 분사제 등을 포함한다. 입안에서 약물을 녹이는 형태여서 알약, 주사제와 같은 전통적인 약물 전달 방법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한국혁신의약품컨소시엄(KIMco)이 2023년 발간한 ‘구강점막 약물 전달 글로벌 시장·기술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약물이 소화기관을 거치지 않고 점막을 통해 혈류로 직접 흡수되기 때문에 약물의 대사 현상인 ‘초회통과효과(first-pass effect)’를 피할 수 있다. 경구제를 복용했을 때보다 약물 흡수 및 대사에 영향을 덜 받는다. 또한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약물 프로파일을 파악할 수 있어 약물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다. 약효가 빠르게 나타난다는 것도 장점이다.
또한 약물을 삼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영유아나 노인 등 고체 형태의 경구용 제품 복용이 어려운 환자들의 복약 수용도를 높일 수 있다. 게다가 비침습적 특성으로 인해 당뇨 등 지속적 약물 주사가 필요한 만성질환 환자들에게도 중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국산 30호 신약인 HK이노엔의 위식도역류질환 치료제 ‘케이캡’(성분명 테고프라잔)은 알약에 이어 구강붕해정 제품도 출시해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사진은 케이캡 구강붕해정 제품. [HK이노엔]
이 밖에도 마약성진통제 의존증, 신경 장애, 발기부전, 오심 및 구토 증상 등을 중심으로 구강점막 약물 전달 기술이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 중 해당 기술을 활용한 발기부전치료제 시장규모는 2022년 약 18억 달러(2조5000억 원)에서 연평균 6.11% 성장해 2030년 약 29억 달러(4조 원)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서는 SK케미칼이 최초로 필름형 발기부전 치료제 ‘엠빅스에스’(미로데나필)를 선보인 바 있다.
비용은 줄이고 편의성은 높이고
암, 자가면역질환 등의 치료에 쓰이는 바이오의약품 분야에서는 제형 변경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바이오의약품은 주사제 형태로 투여하는 경우가 많다. 단백질이나 펩타이드 같은 고분자 물질로 구성돼 있어 위장관의 소화효소와 산성 환경에서 쉽게 분해되기 때문이다. 구강제로 복용할 경우 소화 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되고, 분해되지 않더라도 분자 크기가 커서 체내 흡수가 어렵다.
기존에는 약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하는 정맥주사(IV) 제형을 주로 사용했다. IV제형은 약물이 곧바로 혈액 속으로 들어가 체내에 전달되기 때문에 약효가 신속하게 나타나고 소화 과정이 없어 약물 손실이 거의 없다는 특징이 있다. 또 약물의 용량을 정확히 조절할 수 있어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 농도를 유지하기 쉽고, 비교적 많은 양의 약물을 투여할 수 있어 장기간 약물이 필요한 환자에게 적합하다.
다만 투약 시 의료진의 관리 감독이 필요해 내원이 필요하다. 주사 시간도 약 4~5시간 소요되기 때문에 투약 편의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유행하게 되면 환자는 물론 의료진도 치료를 지속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대안으로 나온 방법이 IV제형을 피하주사(SC)로 바꾸는 것이다. SC제형은 장소 제한 없이 환자 스스로 1분 만에 주사할 수 있어 투약 편의성이 높고 IV제형 대비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항암제도 5분 이내로 투약할 수 있다.
셀트리온이 SC제형으로 개발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램시마SC’는 해외에서 높은 시장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제품은 미국 얀센이 개발한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레미케이드의 복제약(바이오시밀러) ‘램시마’를 고농도 제형 변경 기술을 활용해 피하주사로 투여 경로를 변경한 의약품이다. 인플릭시맙 성분의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중 유일한 SC제형으로, 미국에서는 신약으로 인정받아 ‘짐펜트라’라는 제품명으로 판매되고 있다.
램시마SC 처방 환자들의 만족도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5월 셀트리온이 공개한 영국 리버풀대학병원(Liverpool University Hospitals) 주도의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플릭시맙 IV제형 제품에서 램시마SC로 변경한 환자 대다수가 편의성과 안전성 측면에서 램시마SC를 더 선호했고, 77%가 만족한다고 응답했다.
‘인간 히알루로니다제’를 기반으로 한 제형 변경 기술은 환자 투약 편의성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오리지널 의약품 특허 만료 이후 방어 전략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 글로벌 제약사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다. 히알루로니다제는 체내에 분포하고 있는 히알루론산(HA)을 분해하는 효소로, 피하조직의 투과성을 증가시켜 IV 제품을 SC 제형으로 바꿔 약물확산제로 사용한다. 현재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기반 SC제형 변경 기술 개발에 성공한 기업은 미국 할로자임과 국내 기업 알테오젠뿐이다. 알테오젠은 할로자임보다 후발 주자이지만 특허 만료일이 더 길다는 점이 강점이다. 할로자임은 2030년, 알테오젠은 2040년까지 특허 보호를 받는다.
알테오젠은 ‘ALT-B4’ 기술로 2019년부터 4년간 미국 MSD(머크), 인도 인타스, 스위스 산도스 등 글로벌 제약사들과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2월에는 머크가 세계 매출 1위 항암제 ‘키트루다’의 SC제형 변경을 위해 기존 비독점 계약을 독점계약으로 변경해 주목받았다. 키트루다는 2028년 IV제형의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어 바이오시밀러 공격 방어와 특허 연장 목적으로 SC제형을 개발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 네스터에 따르면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시장규모는 2023년 10억 달러(1조3900억 원)에서 연평균 9% 성장해 2036년에는 120억 달러(16조60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에 국내 기업인 휴온스랩, 셀트리온 등도 인간 히알루로니다제 기반 SC제형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투여 간격을 늘린 ‘장기 지속형 주사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차세대 글로벌 블록버스터 의약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비만치료 주사제를 지속형 제형으로 개발하는 기술개발이 활발히 이뤄지는 추세다. 블록버스터 의약품은 단일 품목 연 매출 1조 원 이상 의약품을 뜻한다.
‘위고비’로 대표되는 GLP-1(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1) 계열 비만치료 주사제는 뛰어난 체중감량 효과로 글로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반감기가 짧은 펩타이드 약물이라 약효가 금방 사라진다. 매일 또는 주 1회 맞아야 하는 만큼 환자들의 투약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기존 약물 대비 투약 편의성을 대폭 개선할 경우 비만약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주사제를 주 1회 자가 투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GLP-1 약물이 떠오르면서 글로벌 제약사들도 투약 편의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비만약 ‘월 1회 주사’가 경쟁력
다만 위고비를 개발한 노보노디스크가 비만치료제 1개월 제형 개발 중단을 선언했던 만큼 장기지속형 주사제 개발이 쉽지만은 않다. 반감기를 늘리는 플랫폼 기술을 가진 기업도 많지 않다. 현재 노보노디스크와 글로벌 비만약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일라이릴리는 장기지속형 약물 전달 플랫폼 기술을 보유한 국내 바이오기업 펩트론과 플랫폼 기술평가 계약을 맺고 공동연구에 나선 상태다. 일라이릴리가 보유하고 있는 펩타이드 약물에 펩트론의 플랫폼을 적용, 공동 연구하는 것이 이 계약의 골자다. 구체적인 연구 물질은 밝히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비만 치료제 파이프라인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라이릴리는 ‘마운자로’(미국 제품명 젭바운드)를 보유하고 있다. 펩트론이 보유한 ‘스마트데포(SmartDepot™)’ 기술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포주사와 달리 생분해성 고분자를 방출조절용 물질로 사용해 펩타이드 약물의 투약 주기를 월 1회 이상 늘릴 수 있다. 참고로 데포 기술은 서방형, 즉 약물이 일반 제형보다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방출되도록 특수 설계된 제형을 갖춘 약물을 뜻한다.
국내 바이오벤처인 인벤티지랩도 자체 플랫폼 ‘IVL-DrugFluidic’를 기반으로 장기지속형 주사제를 개발하고 있다. 해당 플랫폼을 적용하면 1회 투여로 1~6개월간 약효를 유지할 수 있다. 회사는 위고비와 같은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의 약효 지속 기간을 1개월까지 늘린 주사제 ‘IVL3021’을 당뇨병 및 비만치료제로 개발하고 있으며, 1월부터는 유한양행과 협업해 공동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계 글로벌제약사 베링거인겔하임과 장기지속형 주사제 공동개발 계약을 맺기도 했다.
대웅제약은 10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제약·바이오 전시회 ‘CPHI Worldwide 2024’에서 장기지속형 세마글루타이드 주사제를 처음 공개했다. 이 주사제는 위고비 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를 서서히 방출해 한 달 동안 혈중 약물 농도를 유지하도록 설계했다.
미국 암젠은 비만치료제 ‘마리타이드’를 월 1회 투여 방식으로 개발하고 있으며, 현재 임상 2상 단계다. 마리타이드는 GLP-1 수용체를 활성화하는 동시에 GIP(위 억제 펩타이드) 호르몬의 수용체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대웅제약 계열사 대웅테라퓨틱스는 ‘마이크로니들’ 기술을 활용해 피부에 붙이는 형태의 패치형 GLP-1 비만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대웅제약]
대원제약은 라파스와 함께 패치형 비만치료제 ‘DW-1022’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현재 임상 1상 단계로, 11월 종료가 목표다. ‘DW-1022’도 세마글루티드를 탑재한 마이크로니들 형태의 패치제다. 기존 주사제를 피부에 붙이는 패치 형태로 바꾼 제품이다.
미국 바이킹 테라퓨틱스는 GLP-1/GIP 이중작용제 ‘VK2735’를 주사제 버전과 경구용 버전으로 개발하고 있다. 주사제 VK2735는 임상 2상 시험에서 13주간 투여 후 체중이 14.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고, 경구제는 임상 1상에서 최대 5.3%까지 체중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지속형 주사제는 탈모 분야에서도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현재 종근당이 개발하고 있는 ‘CKD-843’은 경구용 남성 탈모치료제에 사용되는 두타스테리드 성분을 주사제로 변형한 것으로 석 달에 1번 투약한다. 7월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임상 3상 시험계획을 승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