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산과 강, 계곡에 숨은 전쟁의 상흔 강원 철원

  • 입력2003-04-29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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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들은 추억하지 않는다. 어제 그러했듯 오늘도 그렇게 그냥 앉으며 날며 뜻 없이 지저귈 뿐이다.
    • 인간은 추억한다. 포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시체가 즐비하며 피가 강처럼 흘렀던 산에, 그래서 조형물을 만들었다.
    산과 강, 계곡에 숨은 전쟁의 상흔 강원 철원

    비무장지대로 가는 길은 온통 자연이다. 새가 날고 고라니가 뛰놀고 산버들이 춤을 춘다.

    야트막한, 볼품없는 언덕 하나를 뺏고 빼앗기며 죽이고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탑과 그 주변에서 무심한 새들은 조잘조잘 끊임없이 지저귄다.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맞는 아침은 아이러니다. 한국전쟁 중부전선 최대의 격전지. 열흘 사이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었던 곳. 고작 395m짜리 동산에 포탄 27만4954발을 쏟아부었고 국군 3400명, 중공군 1만43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고지. 거기서 들리는 건 놀랍게도 한가로운 새소리뿐이다.

    백마고지의 아이러니

    전쟁 전 이름조차 없던 고지는 빗발친 포탄세례로 산 전체가 깊이 1m 가량의 모래밭으로 변했단다. 참혹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널브러진 것 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린 그곳은 그러나 지금 외양으론 여느 고지와 크게 다름없어 보인다. 언덕 위 GP와 독전 구호판만 아니라면 아무데서나 마주칠 수 있는 민둥산 같다.

    1952년 10월6일.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은 훗날 백마고지로 불릴 철원 ‘산명리 뒷산’에서 숙명적으로 마주쳤다. 그로부터 10월15일까지 열흘간 양측은 끝없이 밀고 밀리며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늘은 벌겋게 물이 들었다. 밤에는 야간폭격으로 일대가 달아올랐다. 포격과 폭격의 소음,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이 산을 울렸다.



    초연에 가려 피아(彼我)조차 제대로 구분 못하는 상황에서 백병전도 벌였다. 중공군 병사들은 아편이나 독주를 마신 채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다. 잠시 총성이 그친 짬에 쏟아지는 잠에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참호엔 어느새 시체가 가득했다. 포탄이 떨어진 웅덩이엔 피가 고였다. 비가 오면 빗물과 눈물, 피와 땀 그리고 포연과 흙먼지가 함께 흘러내렸다.

    중공군은 병사들의 손목을 쇠사슬로 기관총에 묶어 탈주를 막고 전투를 독려했다. 10차 공방전 때 강승우 소위 등 9사단 육탄 3용사는 수류탄만 뽑아들고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들어 적과 함께 산화했다. 장병들의 이런 장렬한 투혼으로 국군은 끝내 백마고지를 지켜내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백마고지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푹 파고 들어가 철원평야를 수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이 전투를 기리고자, 군은 민통선 바깥쪽 묘장초등학교 뒤 언덕에 위령비, 전적비와 기념관을 세웠다. 두손 모아 통일을 기원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전적비는 높이가 22.5m. 아라비아 숫자를 다 합치면 9가 돼 백마고지를 사수해낸 9사단을 기리도록 했다..



    위령비에는 모윤숙 시인이 지은 ‘백마의 얼’이 새겨져 있다.

    ‘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전적지 건립공사를 한 국군 5사단은 또 건립 이유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세상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가/ 기억하는 이는 점점 세상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되묻고 있다.’

    아침 햇살이 전적비 그림자를 백마고지 쪽으로 드리웠다.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한다. 문득 민통선 안 논둑을 바라보니 고라니 두 마리가 무엇에 놀란 듯 재빨리 달리고 있다. 철새들은 이미 북쪽으로 돌아갔을 계절인데 독수리 한 마리가 휘- 원을 그리며 고라니 위를 날고 있다. 이것이 정녕 근 2만 명이 스러져간 50년 전 격전지의 풍경인가

    월정역, 철길의 잡초

    백마고지 전적지를 나와 민통선 안으로 3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월정역에 닿는다. 경원선의 간이역이던 이곳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붙어 있다시피 한 최북단 종착역이다. 물론 지금은 안보관광객들에게만 공개될 뿐 역의 기능은 잃었다. 역사 안쪽 입간판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구호와 함께, 서울 부산 목포 평강 원산 함흥 청진 나진까지의 거리가 표시돼 있다.

    앞뒤로 끊어진 철길 위에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가 남아 있다. 앞머리는 사라지고 객차부분만 세 덩이쯤 남았는데 온통 깨지고 찢어지고 구멍난 데다 시뻘겋게 녹이 슬었다. 6·25당시 국군의 북진에 밀린 북한군이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것이라니, 50년 넘게 풍찬노숙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말이 객차지 사실상 고철덩어리인 차 안에는 구조물이란 한 점도 없고 자갈과 잡초가 뒤섞여 황량하기 그지없다.

    플랫폼과 철길에도 잡초는 무성하다. 만지면 부스러질 듯 삭아버린 기차바퀴와 철길의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 잡초들은 쇠를 갉아먹고 자라기라도 한 듯 푸르죽죽하다. 월정역에서 북쪽 가곡역까지 거리는 약 5km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 안에 묻혀 있을 철길이 온통 잡초에 갉아먹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에 풋- 쓴웃음이 나온다.

    월정역사 옆에는 김일성고지 등 북한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4층 건물 ‘철의 삼각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 바로 앞으로 길게 뻗은 철책선이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다.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 2km씩 폭 4km의 비무장지대는 휴전 후 50년간 월정역 철길을 갉아먹는 잡초 끊긴 지역이다. 수만 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망대에 올라보니 비무장지대 안 곳곳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북쪽에서 발생한 산불이 능선과 계곡을 타고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지만 불을 끌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안내원은 “비무장지대에서 산불이 나면 보통 한달 가까이 탄다”며 “노루 고라니 멧돼지 꿩 등 야생동물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며 걱정했다.

    전망대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산은 유명한 ‘피의 500능선’이다. 철원평야 공방전 때 북한군 3만 명, 국군과 유엔군 1만5000명이 전사한 곳으로 비 오는 날이면 그들의 피로 능선이 붉게 물들었다 해서 섬뜩한 이름을 얻었다. 피의 능선 뒤편엔 높이 780m의 고암산이 북측 지역 전망을 가로막는다. 김일성이 거기서 직접 철원전투를 지휘했으나 끝내 백마고지를 빼앗기자 사흘 동안 통곡했다 해서 김일성고지란 이름이 붙었다 했다.

    백마고지나 피의 능선, 또는 저격 능선처럼 으스스한 이름은 아니지만 아이스크림 고지 역시 참혹한 과거를 안고 있다. 해발 223m의 이 고지는 철원평야 공방전 중 양측의 무차별 포격으로 산이 3m가량 정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지금은 둥글둥글한 고지에 하얀 띠가 둘러쳐진 예쁜 모양을 갖췄지만 전쟁중엔 이글거리는 포열을 견디지 못해 울부짖듯 흘러내렸던 모양이다.

    전쟁 없는 피안이어라

    고지 능선과 땅굴까지 돌아보고 민통선 밖으로 나오면 먼저 마주치는 곳이 옛 노동당사 건물이다. 1946년 북한이 철원 평강 김화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지은 이 건물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데다 구석구석에 팬 탄흔들로 전쟁과 시대의 아픔을 뚜렷이 각인시킨다. 우익인사들을 감금 고문했다는 방공호에서는 썰렁한 찬바람이 밀려나오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철원 여행은 우울하며 섬뜩한 감상여행이다.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한탄강 계곡의 빼어난 절경, 두루미 기러기 독수리 등 겨울 철새들이 빠짐없이 찾아오는 천혜의 자연이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지만 그곳의 강과 산 계곡마다엔 빠짐없이 전쟁의 상흔이 똬리를 틀고 있다.

    통일신라 도선국사가,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이라 하여 절을 짓고 도피안사(到彼岸寺)라고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철원에서 처절한 전쟁의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철원을 나와 경기도 포천에 이르렀을 때 라디오에서는 바그다드가 미·영 연합군에 함락됐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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