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서 일을 보고, 통영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언제 또 내려오랴 싶어 급히 소형차를 빌려 진영을 향해 달리는데, 비가 내렸다. 많이 내렸다. 와이퍼의 왕복 속도를 최고치로 올리고서야 겨우 시야가 확보됐다.
운전 경력 20여 년으로 어지간한 차는 다 몰아봤건만, 지난해 출시됐다는 이 소형차의 시트 포스트는 지나치게 낮게 잡혀 있어 창원에서 진영으로 가는 국도를 달리는데, 몸이 시트에 적응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몸과 시트가 겉돌아 빗길 운전이 힘들었다.
엄격하게 절제된 묘역
예전에도 김해에서 한림을 거쳐 진영으로 들어가는 14번 국도를 달린 적 있다. 그때 참으로 기이한 풍경을 봤다. 한림에서 진영 사이에 ‘가구 거리’가 형성됐는데, 도로 양편으로 줄지어 선 가구 상가마다 ‘내레이터 모델’을 앞세워 호객하고 있었다. 한두 가게도 아니고 모든 가게가, 십수 개 넘는 모든 가게가 스피커를 왕왕왕 시끄럽게 틀어놓고 짧은 치마에 바짝 달라붙는 배꼽 티를 입은 아가씨들이 춤을 춰가면서 호객하는 장면이란, 참으로 기이하고도 슬펐다. 다시 그것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주룩주룩 비가 내려 국도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아마도 이토록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런 호객 행위도 삼갔을 것이다.
비가 와서 차선은 죄다 지워져버렸고, 지방의 국도변이 어디나 그렇듯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도로 주변의 끝없이 무질서한 풍경은 안전운전을 교란했다. 그 바람에 오직 내비게이션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좌회전하세요, 우회전하세요, 전방에 미끄럼 주의 구간입니다 하는 경고음에 귀를 바짝 세우고, 달리고, 또 겨우 달려서 진영에 당도했다.
진영, 이라고만 써도 될까. 잠시 생각해본다. 봉하마을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금세 알아듣겠지만 이러한 호명은 순식간에 금속성의 날카로운 정치성을 발현한다. 그렇다고 진영읍 본산리 30번지라고 쓸 수도 없고 고(故) 노무현 대통령 묘역이라고 쓰기에도 불편하다. 이런 행정 지번은 곧잘 어떤 알리바이로 들리기 때문이다. 살았을 적에도 그러했고 서거 이후에도 오늘의 정치와 사회에 긴급한 문제로 늘 부각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해 지나가는 ‘행인 1’의 관점에서 몇 글자 쓰는 것조차 어찌 이토록 힘겨운지, 다시 실감한다.
어쨌든 다들 봉하마을이라고 하고, 또 뉴스에서도 지명의 뜻으로든 아니면 정치적 의미로든 어지간하면 다들 봉하마을이라고 하니, 달리 말을 찾아서 마음을 평정시키기보다는 슬쩍 그 말에 기대어 봉하마을로 들어섰다. 평일 낮 주룩주룩 비가 오는데도 참배객이 적지 않았다. 이 묘역의 특징답게 아이들을 데리고 참배하러 나선 젊은 부부들이 삼삼오오 걷거나 서서 비를 맞고 있는 묘역을 바라봤다. 묘역은 낮게 조성됐고, 그 너머 오른편으로 사자바위, 그리고 또 왼편으로 부엉이바위가 보였다. 비가 봉하마을 전체를 다 적시고 있었다. 엄격하게 절제된 묘역이었다.
분단의 치명적 상흔
대추나무 뒤편 하늘은 벌써 짙은 보라색이다. 나는 보라색을 싫어한다. 손톱에 들이는 봉숭아물도,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꽃도, 코스모스의 보라색 꽃도 다 싫다. 어머니의 젖꼭지 색깔까지도 싫다. 보라색은 어쩐지 아버지의 하는 일을 떠올리게 해주고 어머니의 피멍 든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보라색은 또 말라붙은 피와 같고 깜깜해질 징조를 보이는 색깔이다. 옅은 보라에서 짙은 보라로, 그래서 야금야금 어둠이 모든 것을 잡아먹다가 끝내 깜깜한 밤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경남 진영 출신 김원일이 쓴 단편소설의 한 대목이다. 소설 속의 소년(아마도 어린 시절의 소설가 본인의 초상인 듯)은 보라색으로 물드는 저녁이 싫었다. 그것은 곧 밤의 징조였고, 밤은 삭막한 침묵과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는 긴장으로 덧칠된 암흑이었으며, 또한 그 어둠은 죽음을 향해 직진하는 일방통행로였다. 끝내, 소설의 밤에 순경이 들이닥치고 총성이 울려퍼지고 아버지는 쑥대밭이 된 곳을 뒤로하고 산으로 도망쳤으며 어머니는 지서로 끌려간다. 소년은 소리 죽여 운다. 그때, 달은 보라색 하늘에 걸려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소년은, 피 칠갑을 한 채 턱이 붓고 입은 커다랗게 벌어진 아버지의 시신을 본다. 어릴 적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던 넉넉한 가슴은 ‘그 두려운 보라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원일은 단편 ‘어둠의 혼’을 확장해 장편 ‘노을’을 썼고, 전쟁과 분단의 치명적 상흔들을 불러 모아 대하장편 ‘불의 제전’을 썼다. 김원일의 이 소설에 대해 세부적인 ‘지정학적’ 비평을 한 사람은 역시 진영 출신의 김윤식이다. 1936년 윤삼월에 진영읍 사산리에서 태어난 김윤식은 서울대 정년퇴임 고별 강연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에서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강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언어에 친숙했지요”라고 회상했다. 그는 사산리에서 십리 길을 걸어 대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몇 년 아래로 소설가 김원일이 다녔고 또 그 4년 후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학교를 나왔다.
김해시 진영읍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진영의 보랏빛 하늘
김윤식은 김원일의 ‘노을’을 아주 상세하게 읽는다. 예컨대 그는 ‘노을’에 나오는 철하, 물통걸, 진영 같은 지명에 대해 해명하면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뿐이었는데, 수리시설과 철도 통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뿌리 뽑힌 자들이 모여들었던 것. 일제강점기에 이미 읍으로 승격할 만큼 발달한 진영은 단감 생산의 최적지로 판명되어 일인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진영·김해 사람을 빼면 부산 형무소가 텅 빈다는 속설만큼 여기에 모인 주민들의 성향을 잘 말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좌우익 싸움이 유별나게 벌어진 곳”이라고 썼다.
바로 그 ‘유별난 싸움’을 기록한 것이 김원일의 소설이다. 농산물이 집약되는 곳이었기에 쟁의의 소지가 다분했고, 그래서 광복 이후 좌우 대립이 격렬했으며 급기야 6·25전쟁 중에는 경남 남부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좌우 쟁투가 펼쳐진, 그리하여 이 지역 사람들의 가계는 분단 이후의 남북관계 모두에 핏줄을 나눌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김원일은 장편 ‘노을’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진영 출신의 어느 변호사로부터 ‘소설을 잘 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진영 출신의 변호사가 몇 안 되니 아마 그 변호사가 노 대통령 아닌가’ 하고 김원일은 회고한 적 있다. 만약 이 회고가 맞다면 그 전화는 단순히 동향 출신의 유명인사들이 ‘트고 지내려고’ 인사치레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노을’에 대한, 진영의 슬픔에 대한, 이 한반도의 쓰라린 상처에 대한 답례일 것이다.
김원일의 소설 ‘노을’은 금병산과 봉화산에 대한 멀미 나는 묘사로 끝이 난다. 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왜 김원일이 진영을 물들이는 노을을 ‘붉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으로 묘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을은 산과 가까운 쪽일수록 찬란한 금빛을 띠고 차츰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라색 쪽으로 여리어져, 노을을 단순히 붉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여러가지 색이 교묘히 섞여 있음에도 사람들은 노을을 붉다고만 말한다. 진노란색, 옅은 푸른색, 회색도 저 속에 섞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 뭉뚱그려 구별지어버리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비에 젖은 통영, 동피랑마을
나는, 봄철이라 해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폭우 때문에 통영이 너무 일찍 어두워질 것을 염려하며, 봉하마을에서 통영 쪽으로 길을 서둘렀다. 길게 선회하는 고속도로 대신 마산을 관통해 고성에서 통영으로 직하하는 국도를 잡았다. 길은 평탄했으나 비가 시야를 가렸다.
통영에 당도해 우선 동피랑마을을 찾아갔다. 거제도와 남해도 사이, 바다로 뻗어나온 고성반도 끝자락에 통영이 있고 그중 높은 곳에 동피랑마을이 있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라는 뜻으로 실제 주소지인 통영시 정량동, 태평동 일대 산비탈 마을을 가리킨다.
이 높은 마을에 올라서면 왜 통영이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이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통제사영(統制使營)’을 줄인 것이 ‘통영’이다. 옥포해전, 한산대첩, 사천해전, 당포대첩 등 임진왜란 때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격전의 요충지이자 부산에서 여수까지 이어지는 남해안 뱃길의 핵심 거점이다. 한때 거제와 마산과 남해에 지역 중심처 지위를 빼앗겼으나 2001년 통영 대전을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그리고 윤이상·박경리·전혁림 등의 문화 자산이 전국적 사랑을 받으면서 통영은 은성(殷盛)한 항구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동피랑마을에 올라서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동피랑마을에서 내려다본 통영.
동피랑은 ‘벽화 마을’로 유명하다.
부산의 감천마을과 더불어 이곳 통영의 동피랑마을은 이른바 ‘벽화마을’의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동네로 유명하다. ‘동쪽 벼랑’이란 뜻의 동피랑마을은 2006년까지만 해도 재건축이 예정된 낡은 달동네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던 마을이 재건축으로 일거에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푸른통영21 추진협의회’의 윤미숙 전 사무국장이 기획하고 전국의 미대생들이 마음을 더해 벽화를 그린 게 지금의 동피랑마을로 진화했다.
사실 가난한 동네에 벽화를 그리는 유행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이 있어왔다. 생활환경 개선에 관광사업까지 된다 해서 전국의 지자체들이 자기네의 가난한 동네들을 두서없이 벽화마을로 정해 최소한의 미적 기준이나 장소의 의미도 고려하지 않고 덮어놓고 벽화를 그려대는 풍토가 만연했다.
특히 인천 중구 송월동의 ‘동화마을’ 벽화는 지자체가 주민과 지역 예술가들의 반대에도 오직 ‘관광사업’이라는 목적을 앞세워,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대표적인 곳이다. 국적 불명의 조잡한 그림을 가난한 동네의 벽과 담에 잔뜩 그려 넣는 것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을의 의미와 정체성, 마을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감각과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벽화란 오히려 마을을 조잡한 구경거리로 전락시킨다.
동피랑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현황을 반성적으로 돌아보면서 새로운 모색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동피랑 주민들과 예술가들은 이 기이한 열기를 되새기면서 참여작가 공모, 주민 공동기획, 이야기가 있는 벽화 그리기, 마을 벽화와 공공성 토론 등을 아울러 전개했다. 동피랑의 빈집 가운데 다섯 채를 리모델링한 후 화가, 작가, 음악가들이 입주해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개별 작업을 하는 것도 이 동피랑의 미덕이다. 주민 모두가 조합원으로 등록된 동피랑생활협동조합이 마을의 기념품 판매점 등을 운영하고 그 수익금을 주민 전체의 공동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것도 이 마을의 특색이다.
동피랑마을의 자생성을 마련한 윤미숙 씨는, 통영시의 부당해고에 맞서 승소했고 현재는 전남도청 소속으로 전남의 섬 가꾸기 프로젝트 총괄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2000여 개의 섬마을을 지속가능한 곳으로 재생하는 사업이다.
통영시 박경리기념관.
동피랑에서 내려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소설가 박경리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박경리 소설의 모태가 되는 초기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 되는 강구안을 일단 벗어나라고 가리킨다. 1962년 작품임에도 소설의 첫 대목은 지금의 통영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의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 있어서 남해도와 쌍벽인 큰 섬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난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들이 위성처럼 산재하고 있다.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 없이 사면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이 있고 언덕빼기에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기세는 빈약하다.
소설이 묘사한 대로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통해 이 섬 아닌 섬에 들어선 나는 언덕배기에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집들과 골목을 배회하고 나서 항구를 잠시 빠져나갔다. 소설의 시작은 잔잔하지만 실은 이 작품은 문약하고 선비적인 김약국의 주인 김봉제 집안의 격정적인 풍비박산을 다루고 있다. 격동기의 삶들이 간악함과 치정과 욕망의 굴레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파국을 맞는 작품이다. 대하소설 ‘토지’와 더불어 박경리는 이렇게 한 집안의 몰락과 그로 인한 비극을 평생의 주제로 삼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창 밖으로 짭짤한 바람을 잠시 맡은 후, 곧 차를 몰아 박경리 묘소로 10여 분을 달려갔다. 십수 년 전 원주 자택에서 찾아뵈었을 때처럼 이곳 묘소도 검박하게 단장돼 있었다. 당대 최고의 작가임에도 과시적인 조형과 장식을 찾아볼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선생의 친필을 그대로 따온 ‘朴景利’ 세 글자는 소설 이외의 것에 엄격했던 작가정신의 단호한 표현처럼 보였다. 묘소 아래에, 산기슭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기념관 또한 박경리의 작가정신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시 차를 몰아 통영 시내로 돌아왔다. 해는 길어졌으나, 빗줄기에 의해 지독히도 흐린 날씨가 되었기에 항구도시는 벌써부터 하나둘씩 불빛을 밝혔다. 직선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동해안의 항구들과 달리 여수와 남해와 이곳 통영은 들고나는 지형지물의 형태를 따라 항만과 시장과 도로가 형성돼 있어서, 저녁 무렵 불이 밝혀지면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일부러 인공 조명으로 도시를 치장할 필요가 없는, 그런 풍경이다.
상처 입은 용
통영 한복판에 조성된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갔다. 약간은 기구한 장소가 됐다. 통영시는 몇 해 전부터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그가 치른 정치적 사건과 행적의 일부분을 과장해 세차게 비난하는 경우들이 있어 윤이상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음악 문화를 창출했던 지자체가 이제는 그 이름을 조금씩 삭제하는 중이다. ‘윤이상국제음악제’가 ‘통영국제음악제’로 바뀌었고 ‘윤이상국제음악당’도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바뀌었다. 그의 생가터에 조성된 기념공원도 윤이상이라는 이름 대신 ‘도천테마파크’를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작곡가 윤이상의 생가터에 윤이상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하고 윤이상의 유품을 전시해놓고는 정작 윤이상이라는 이름 대신 ‘도천테마파크’라고 부르니, 낯설고 괴이쩍다.
소설가 루이제 린저와 대담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태생적으로 가혹한 운명의 상처를 가진 음악가다. 윤이상이 어머니로부터 일곱 살 즈음에 들었다는 태몽이 그것이다.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며 비상을 한다. 푸른 하늘보다 더 찬연한 비늘을 퍼득이며 용은 떠오른다. 옛적부터 영산으로 꼽히는 지리산 위를 비상하던 용은 이윽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온 힘을 쓴다. 그러나 용은 오래전부터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기는커녕 더 이상 비상할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윤이상을 ‘상처 입은 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윤이상은 1917년에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17년은 한국 민족음악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윤이상과 김순남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현대음악을 익힌 윤이상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와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광복 이후 한국 음악계의 주도적 작곡가로 인정받는다. 1956년 그는 현악 사중주 1번과 피아노 3중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바로 그해 윤이상은 유럽으로 떠난다. 잠시 파리를 경유해 물정을 확인한 후 베를린으로 거점을 옮겼는데 그곳이 평생의 유랑지가 됐고, 그곳에서 남북 분단에 따른 사건을 겪었으며 그 일로 끝내는 영구 귀국을 하지 못한, 상처 입은 용이 됐다.
음악가로서 윤이상은, 현대의 급진 아방가르드 경향을 주도함은 물론 동서양의 갈등과 교차와 긴장과 대화라는 물음을 오선지로 제출했다. 1959년 작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시작으로 ‘바라’(1960),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辭·1963), 오페라 ‘류퉁의 꿈’(1965),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1966),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68), 혼성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76), 오보에·하프·관현악을 위한 이중 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1976), 1980년대에 나온 5개의 교향곡이 그가 내놓은 답안지다.
가장자리의 소용돌이
그 답안지는, 신영복의 ‘변방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보자면 동북아의 남단 항구 통영에서 태어나 유럽 음악 문화의 성지 베를린에서 활동한, 그러나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거나 편입되지 않고, 그 양 문화의 변방을 끝없이 서성거린 경계인이자 변방인이 제출한 것이기에 큰 주목을 받았다.
다시 말해 신영복의 ‘변방의식’이란 ‘중심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변두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 문화의 주류로부터 의식적으로 멀리 떨어져 끝없이 가장자리의 소용돌이를 자기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는 사유와 창작의 변방을 말한다. 변방은 회의하고 되묻고 모색하는 자리다. 진정한 변화와 창조는 그 격류가 휘몰아치는 변방에서 발생한다. 신영복은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의식이라고 말한다. 이 격렬한 사유가 ‘중심에 대한 열등의식’을 떨쳐버리게 한다.
그러니 그저 지리적으로 ‘변두리’ 출신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변방의식’이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중심이나 주류로부터 심미적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는 것, 중심과 주류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제어하고 그 보이지 않는 회유를 거절하며 ‘사유의 힘’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영 사람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고, 또 그 결과물이 그 흔한 오리엔털리즘, 즉 ‘서양 화성악에 동양 정신을 담았다’는 식의 진부하고 낮은 수준에 갇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소외와 격절감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잠시 비를 피해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경계인 윤이상의 필기구와 옷가지와 책상이 있었고 여권, 큼직한 여행 가방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책자와 기사와 음악회 팸플릿을 통해 눈에 익숙한 그의 커다란 초상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애국자 윤이상’
…. 엉킨 실타래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경계에 선 음악가 윤이상, 변방의식의 예술가 윤이상이 그 기념관 안에서는 ‘애국자’라는 이름으로 강조돼 있었다. 이런 호명이 아니고서는 고향에 머무를 수도 없는 한 예술가의 생애, 그 상처 입은 생애가 역설로 도드라졌다.
통영시 도천테마파크에 전시된 윤이상의 유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