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김민경 ‘맛 이야기’

‘방구석’에서 즐기는 유럽 미식 여행, 영화 ‘파리로 가는 길’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0-06-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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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과 미식의 기쁨을 알려주는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한 장면.

    여행과 미식의 기쁨을 알려주는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의 한 장면.

    6년 전 쯤 친구가 영화 한 편을 건넸다. 그때 나는 영화 따위에 눈도 마음도 돌릴 틈이 없었다. 오랫동안 아빠를 따라다니던 병이 결국 사선까지 그를 몰고 간 때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강원도로 이주한 아빠 엄마를 보러 오밤중에 차를 몰고 가기 일쑤였고, 주말에는 아빠 병실을 지키며 엄마에게 짧게나마 쉬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던 때다. 회사원이던 나는 한편으로는 하루가 딱 24시간밖에 안 되는 것을 원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나 아빠 부고가 갑자기 날아드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24시간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친구가 보내 온 그 영화를 보게 됐다. ‘웰컴 투 사우스(welcome to south)’라는 이탈리아 영화였다. 코믹한 내용인데 보는 내내 이유 없이 울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이듬해 아빠는 고통과 이승의 연을 끊고 우리 곁을 떠났으며, 나는 그해 겨울 영화로 만났던 남부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

    영상으로 만나는 아름다움과 낯섦

    여행은 계획을 짤 때 가장 행복하다. 현실 여행은 수많은 낯선 것과 부딪히느라 상상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안락한 집으로 돌아온 뒤 하나하나 되돌아보면 여행의 기억이 다시 엉덩이를 들썩이게 한다. 하늘 길도 바닷길도 막힌 탓에 현실 여행 기회가 사라져버린 요즘 ‘웰컴 투 사우스’를 다시 꺼내 보며 추억을 곱씹고, 전례 없이 장대한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워보는 중이다. 

    ‘웰컴 투 사우스’는 ‘남부 이탈리아는 위험하고 미개하다’고 여기는 북부 이탈리아 사람이 남부 해안 도시 ‘카스텔라바테’로 이주해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 음식과 문화에 완전히 젖어드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로 만나는 이탈리아 남부의 서쪽 바다 풍경은 숨 막히게 아름답고,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들 정서는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가보지 못한, 어쩌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움과 낯섦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경험한다. 

    여행의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는 이외에도 꽤 많다. 나는 오늘 그중에서 ‘파리로 가는 길(Paris can wait)’을 열어 본다. 제목처럼 파리까지 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멋진 도시 파리는 영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프랑스 칸에서 파리를 향해 같이 출발하게 된 서먹한 두 사람 ‘자크’와 ‘앤’. 이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며 만나는 작은 소도시 풍경과 음식, 와인 등이 끊임없이 화면을 채운다. 



    이들의 첫 끼는 어색함을 풀어주는 단출한 음식 하몽과 멜론이다. 그 다음엔 로마인이 지어 놓은 고대 도시 흔적을 따라 가다 라벤더 들판을 지나 올리브 숲에 이르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자크는 길에서 자란 민들레 잎을 따먹으며 “오일과 앤초비, 소금, 후추만 있으면 이보다 더 완벽한 샐러드는 없을 것”이라고, 자연이 내주는 먹을거리를 예찬하기 바쁘다. 이들은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림처럼 예쁘고 화사한 음식, 어마어마한 치즈 트레이를 만나기도 한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죠?”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들은 풀밭 위 간식부터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정찬까지 다양한 식사를 즐긴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들은 풀밭 위 간식부터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정찬까지 다양한 식사를 즐긴다.

    ‘파리로 가는 길’은 음식을 앞에 둔 두 사람이 음식 얘기를 하지 않아 더 재미있다. 테이블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장미에 대한 감상, 꽃의 향이 와인 향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화답, 초콜릿 범벅인 디저트를 앞에 둔 여인에게 “죄책감은 소화에 좋지 않다”고 건네는 현명한 조언, 신식 자동차의 세련된 디자인을 보며 “식욕을 떨어뜨리는 디자인”이라고 평하는 말 등이 그렇다. 

    영화 중간 즈음에는 프랑스 재래시장의 맛있는 풍경과 풀밭 위 식사 장면 등도 나온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의 명작이 두 사람 여정 사이사이에 등장해, 이토록 소소한 여행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응원한다. 파리에 가까워지며 두 사람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픈 속내를 드러내고, 가슴 뛰는 ‘썸’도 잠깐 탄다.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빵 한 조각이 가슴 설레게 다가오고, 살찔 두려움 따위 내던진 채 탄수화물 덩어리 파스타를 한 사발 먹게 만드는 것. ‘익숙한 여기’가 아니라 ‘낯선 거기’에 있음으로써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가치 있어지는 순간순간을 경험하는 것. 

    마침내 파리에 다다른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묻는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죠?” 그 질문에 아직 나는 답을 못하겠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행복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단조로운 질문 하나가 내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되짚어줬다. 휴가 대신 선택할 미지의 영화가 나를 또 얼마나 뒤흔들어 놓을지 생각하니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올 여름 더위가 무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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