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5일 주한 미국상공회의소(AMCHAM) 주최 초청강연에서도 “내가 주한 미국대사로서 하려는 것은 틀에 박히지 않고(unconventional) 비일상적인(non-conventional) 청중에게 다가가는 일”이라고 말해 그동안 주한미국 대사가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10월14일 한미우호협회에서도 “최대한 많이 다니면서 많이 듣도록 노력하겠다. 유쾌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물론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서도 듣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쾌하지 않은 곳’에도 가겠다는 힐 대사의 발언은 취임 한 달 후인 지난해 9월16일 광주의 5·18 묘역을 방문함으로써 실현됐다. 당시 힐 대사의 공식적인 광주 방문 목적은 광주 아메리칸클럽 개소식 참가. 힐 대사의 묘역 방문은 공식일정이 마무리된 뒤인 오후 6시에 이뤄졌고 대사관측도 당시 “애초 일정에 참배계획은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톡톡 튀는 행보
여하튼 힐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로서는 처음으로 광주 5·18 묘역을 참배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힐 대사를 “보통이 아니”라며 주목하기 시작했다. 크게 공식화하지 않으면서도 ‘광주 문제’의 한 매듭을 풀어가기 위한 주의 깊고 계산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는 힐 대사의 대담한 행보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힐 대사의 주목받는 행보는 광주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달 부산행으로 이어졌다. 2월22일 오전 7시반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국외국어대학교 총동문회 ‘미네르바포럼’에 초청연사로 연설한 뒤 부산을 찾은 힐 대사는 23일 부산 범어사를 찾아 발우공양 등 전통불교문화를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벽안(碧眼)의 미국대사가 ‘안 나오는’ 자세로 전통다도와 불교예법을 따르는 모습을 보며 당일 행사에 참가했던 한 기자는 “솔직히 좀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모습에서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힐 대사 본인은 “범어사는 오늘 나에게 하루 휴식을 줬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주일, 아니 한 달간의 휴식을 미리 제공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힐 대사가 가장 신경을 쓰며 해결을 위해 애쓰는 부분 중 하나는 반미감정. 2002년 6월 작전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심미선·신효순양 사건으로 불거져, 촛불시위 등을 거치면서 인화력이 강한 사회현상으로 비화한 반미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힐 대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이었다. 광주 5·18묘역을 방문한 것도 사실은 팽배해 있는 반미감정을 염두에 둔 사과의 표현이자 화해의 제스처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감정과 관련해 제임스 포스터 미 국무부 한국과장은 힐 대사가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아시아재단 초청 한국 언론인 미국연수단의 일원으로 워싱턴 DC를 방문한 기자와 비공개 면담하는 자리에서 포스터 과장은 “힐 대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한국 대사로 부임해 다양한 아이디어로 50년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한국민들을 다독이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작전명 ‘반미감정을 다스려라’
포스터 과장은 “힐 대사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며 “인터넷의 양방향 소통방식을 이용해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힐 대사는 지난해 10월19일부터 ‘인터넷 다음’에 카페(http://cafe.daum.net/usembassy)를 개설하고 네티즌들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사(ambassador)’란 필명으로 글을 올리고 있는 힐 대사는 인터넷에 올라온 ‘공개질문’에 거의 예외 없이 답하고 있어서, 일부 네티즌들은 “부시 대통령이 잃어버린 민심을 힐 대사가 다독이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힐 대사가 한국인들에게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힐 대사의 진지함 때문으로 보인다. 자칫 ‘제스처’로 보일 수 있는 5·18묘역 방문, 부산 범어사 방문, 인터넷 게시판을 통한 대화 등을 보면서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그의 성실성이 공감대를 얻은 때문으로 풀이된다.
힐 대사는 지난해 10월7일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도 “내가 논리적·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한국 젊은이들은 논리적이지 않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을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분야에서의 세대교체에 대해서도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집단에 따라 전혀 다른 ‘집단적인 기억(collective memory)’을 가질 수 있으며 한국에서도 세대교체는 그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직접화법을 쓰지는 않았지만 6·25전쟁에 참여한 미국의 ‘혈맹(血盟)’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젊은 세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한미 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며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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