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우리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5-12-15 1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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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 한인동포 사회의 역사가 40년에 이르렀다.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호주인도 많다. 그러나 호주의 소수민족 그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인 한인 사회의 권익 신장에 관심을 갖는 호주인은 드물다. 그런 현실에서 변조은 목사와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호주 한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정통한 변조은 목사.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침하자 호주는 불과 나흘 뒤인 6월29일에 파병을 결정한다. 호주는 미국의 참전과 동시에 해군 구축함과 프리깃함을 유엔군 휘하에 배속했다. 다음날인 6월30일엔 공군 77비행중대 소속 무스탕 전투기를 6·25전쟁에 투입했다(그런 연유로 한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오랫동안 전투기를 ‘호주기(濠洲機)’라고 불렀다). 이어 9월28일에는 호주 육군 제3대대가 부산항에 당도한다. 호주 육·해·공군이 모두 6·25전쟁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호주군은 그 뒤에도 항공모함 1대, 구축함 5대, 프리깃함 4대 등 해병대 병력을 추가로 배치했고, 공군도 프로펠러 추진 시퓨리기 2개 중대와 파이어 플라이기 1개 중대를 증파했다. 호주 공군은 1만9000회 출격을 기록하면서 36명의 전투기 조종사를 잃었다.

    이같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한 호주군은 3년의 전쟁에서 전사 361명, 실종 37명, 부상 1216명 등 약 1600명의 희생자를 냈고 29명의 병사가 포로로 잡혀 사망하거나 나중에 송환됐다. 6·25전쟁 기간에 호주는 전쟁 상황을 주요 뉴스로 자세하게 보도했다. 뉴스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호주 사람들의 뇌리엔 그때 그 장면이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다.

    호주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멜버른에서 대학에 다니던 한 호주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스코틀랜드 출신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를 꿈꾸던 그는 연일 보도되는 6·25전쟁의 참상을 보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와 길고긴 피난민 행렬….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밥 먹고 잠잘 곳은 있을까. 온몸을 붕대로 친친 감은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을까. 혹 고아가 되지는 않았을까….’



    불길한 상념은 또 다른 상념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국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나라의 전쟁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처음엔 자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심했다. ‘저 나라에 가서 저들을 도와주리라’고. 그는 곧바로 장로교단을 찾아가 한국으로의 선교사 파송 신청을 했다.

    그가 바로 존 브라운(72·한국 이름 변조은) 목사다. 그는 20대 초반에 한 결심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한국에서 12년간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호주 장로교신학대 교수를 역임하고, 호주 최초의 한국인 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를 설립했다.

    필자는 ‘한국을 사랑하는 호주 사람들’을 취재하기 위해 여러 한인동포와 한인단체에 자문했는데, 자문에 응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그 첫 번째 인물로 변조은 목사를 꼽았다. 그가 한국과 한인동포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변조은 목사는 한인동포뿐 아니라 호주의 짙은 그림자와 같은 원주민(애보리진)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서도 힘을 쏟아온 대표적인 인권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변조은 목사를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또 하나 있다. 그가 호주 기독교 통합의 역사적 산물인 연합교단의 창립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연합교단은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단으로 연합한 통합체 교단이다. 변 목사는 “분열로 일관해온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호주에서만은 피해보자”는 강한 의지를 갖고 호주 기독교 통합에 적극 참여했다고 한다.

    변 목사는 멜버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호주 장로교신학대에 입학했다. 진작부터 신학에 뜻을 두긴 했지만, 한국에 가서 전쟁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선교사 신분이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여자친구이던 노마 브라운도 적극 찬성했다. 찬성한 정도가 아니라 “그 길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변 목사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3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그 사이 노마 브라운과 결혼하고, 아들 마이클 브라운(한국 이름 변선태·목사)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교단으로부터 대학시절에 접수한 한국 선교사 파송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이 왔다.

    48개 농촌교회 담임목사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한인동포들과 함께한 버지니아 저지 의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맨 왼쪽이 권기범 시의원이다.

    1960년초, 변조은 목사 부부와 두 살배기 아들은 마침내 한국으로 먼 길을 떠났다. 6·25전쟁의 참상을 보도를 통해 접하고, 난민과 전쟁고아를 돕기로 결심한 지 10년 만이었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피난민이 많이 모여 살던 부산. 휴전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부산 피난민촌의 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하꼬방’이라고 부르는 판잣집이 즐비했고, 일제 강점기에 지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았다.

    피난민촌에 잠시 머물던 변조은 선교사는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 마산에 정착했다. 마산을 중심으로 거제도까지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봉사활동을 벌였다. 교인이 10∼20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선교활동을 했다. 교회도 피난민들이 거주하는 집과 마찬가지로 판잣집이었다.

    농촌교회를 주로 순회하던 변 선교사는 충북 음성의 한센병 환자들이 개간지에 세운 교회에 몸담기도 했다. 그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늘 낮은 곳에 임한 이유를 깨닫게 된 것도 그곳이다. 그는 마산과 거제 지역 48개 농촌교회의 담임목사와 당회장을 맡았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어 설교를 준비해 48번이나 반복했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국 농민의 끈끈한 정은 또 어떤가. 사발에 깡보리밥을 꾹꾹 눌러 고봉으로 담아 내놓는 그 넉넉함이라니. 그는 그토록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무리 배가 불러도 먹고 또 먹었다. “선교사는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는 선배 선교사의 말을 명심했다.

    그 무렵 가난한 농촌에서 반찬이라고 할 만한 건 맵고 짠 김치에 시금떨떨한 된장찌개가 전부였다. 맵고 짠 음식에 뱃속에 난리가 난 것은 불문가지. 재래식 변소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그런데도 그의 기억 속엔 고통은 간 곳 없고 농촌 아낙네의 푸근한 인심만 남아 있다.

    “우리 목사님, 시장하셨나 보다. 밥 잘 드시네. 여기, 조금만 더 드세요.”

    양 50마리 싣고 태평양 건너

    변조은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지 8개월 만에 둘째딸 선혜가 태어났다. 그후 고아인 순자를 입양해 자녀가 금세 셋이나 됐다. 입양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선 굳이 아이를 낳지 않고도 귀한 가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입양 제안을 했고, 노마 브라운 여사도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브라운 여사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판자촌 부녀자들을 모아 수예품을 만들었다. 그 수예품은 호주로 보내져 6·25전쟁 피해자들을 돕는다는 취지에 공감하는 호주 사람들에게 팔렸다. 호주인들의 호응으로 수예품 공동체는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가난한 교인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변조은 선교사는 호주에 흔해빠진 양을 떠올렸다. 양을 키워본 적이 있던 그는 호주로 건너가 양 50마리를 배에 실었다. 다시 부산을 향해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배에서 손수 양에게 꼴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웠다. 그 양들은 거제 지역의 가난한 농가에 무상으로 대주는 우유 공급원이 되었다.

    변 선교사의 열성적인 활동은 서울에까지 전해졌다. 장로교신학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했다. 그는 6년 동안 하루 10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마산과 서울을 오고갔다. 마산역에서 밤 10시30분 기차를 타면 아침 7시30분에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는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주로 히브리어를 강의했지만 영어로 구약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서 그가 한국어를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그의 제자인 홍길복(61·시드니우리교회) 목사의 얘기다.

    “존 브라운 교수님한테서 이사야서 41장 원서강해를 듣고 시험을 쳤습니다. 그 며칠 후에 답안지를 돌려받았는데,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 남짓한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글로 작성한 답안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정해놓았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틀린 한글 맞춤법을 정확하게 지적했더라고요.”

    “‘새끼’는 나쁜 말이지요”

    하루는 변조은 목사가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청년 두 사람이 “야, 양코배기 새끼가 탔다”며 시시덕거렸다. 변 목사는 잠자코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새끼’는 나쁜 말이지요”라고 한 마디 했다.

    언젠가 변 목사가 “참 웃긴다”는 말을 하자 홍길복 목사가 “목사님은 천재적인 언어감각을 갖고 태어나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변 목사가 버럭 화를 내며 한소리 했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사실 그는 대단한 언어학자다. 모국어인 영어와 대학에서 전공한 히브리어는 논외로 치더라도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에도 능통하고, 약간 더듬거리지만 호주 원주민이 쓰는 애보리진어와 인도네시아어도 구사한다. 필자는 천자문까지 익힌 변조은 목사가 고사성어를 써가며 한국어로 설교하는 걸 듣고 그가 한국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적도 있다.

    이쯤에서 홍길복 목사의 회고담을 직접 들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교신학대에서 공부한 홍 목사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고초를 당한 바 있는데, 훗날 변조은 목사의 초청으로 호주에 정착했다.

    “변조은 목사님과 여러 차례 함께 여행을 했는데, 한방을 쓰기엔 영 적합한 분이 아니다. 이분이 새벽 4시 전후에 깨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자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명상에 잠기는데 그래도 옆사람이 편히 자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왕에 설친 잠, 나도 일어나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목사님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멜버른 근처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분은 어릴 때부터 학교에 가기 전에 소에게 여물을 주고 젖을 짜는 일을 해야 했다. 그때의 습관이 평생의 습관이 된 것인데, 여행 동반자로는 부적하지만 목사로서는 얼마나 바람직한 습관인가.

    변 목사님이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선교사 생활과 장로교신학대학 교수생활 이 전부가 아니다. 한국 농촌의 빈곤퇴치운동과 도시빈민운동, 노동자인권운동, 정치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도 결코 그에 못지않다.

    우선 그가 가르친 제자 중 도시산업선교회 총무를 지낸 인명진 목사와 빈민운동을 하면서 활빈교회를 설립한 김진홍 목사의 활동을 생각해보면 그의 민중사상과 사회의식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호주 원주민 인권운동 등 호주의 소수민족을 위해 활동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다. 목사님은 YH 사건, 도시산업선교회 사건, 국제어페럴 사건 등에 관여했고 김대중 선생의 석방을 위해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변 목사님은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의 민주화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여러 제자가 긴급조치 위반 으로 수감돼 있을 때 위로편지를 보내주셨고, 관계 당국에도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비단 정치·사회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빈민구제 쪽에 더 큰 관심을 뒀다. 그래서 김진홍 목사가 설립한 활빈교회에 호주의 소를 보내줬고,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노동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함께 지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1974년 호주 최초의 한인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를 설립한 주인공으로, 호주 한인교회 30년 역사의 산 증인이자 정신적인 지도자다. 한국 사람인 나보다 한국과 한국인을 더 지극하게 사랑하는 분이다.”

    최초의 한인교회 설립

    변조은 목사가 12년간의 한국파송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온 1972년, 호주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서너 가구의 한국인과 만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예배모임을 갖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1974년 7월경, 변조은 목사의 친구이며 대한예수회 총회장인 김윤식 목사가 시드니를 방문했을 때 시드니에 사는 한국인들이 환영행사를 마련했다. 그때 한국인 교회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왔고, 1974년 9월6일, 마침내 한인들이 모여 예배하는 ‘시드니 한국인 크리스천 교제회’라는 모임이 시작됐다. 이 모임이 훗날 최초의 호주 한인교회인 시드니연합교회로 발전했다.

    교제회 모임엔 개신교 신도뿐 아니라 호주에 유학 온 두 명의 가톨릭 신부도 참여했다. 자연스럽게 개신교 목사와 가톨릭 신부가 교대로 예배를 인도했다. 또한 교제회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그 공동체는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 없이 한인들의 친목도모와 정보교환을 위한 모임이었다.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호주 캔버라에 거주하는 변조은 목사는 종종 시드니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한다. 그는 한인동포를 비롯한 호주 내 소수집단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수백명의 한국인 기술자가 임시체류 비자인 관광비자를 들고 호주로 몰려왔다. 서너 가정이 꾸려가던 교제회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정보센터 및 취업알선 기구로 돌변했다. 더러는 숙소 구실까지 해야 했다. 더욱이 교회가 호주 영주권을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기 때문에 교회는 오랫동안 한인공동체 기능을 했다. 변조은 목사가 그 교회의 목사였으니 그는 호주에서도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간 셈이다.

    변조은 목사는 1977년부터 호주 연합교단 업무를 맡게 됐다. 호주의 장로교(주로 스코틀랜드계), 감리교(주로 잉글랜드계), 회중교회(주로 웨일스계)가 통합해서 만든 유나이팅 처치(Uniting Church·연합교단)의 발족은 호주 기독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변 목사는 연합교단 차원에서 한인교회를 지원했다. 그러나 한국인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한인교회는 한국 교회의 분열상을 답습했다. 변조은 목사 한 사람의 힘으로 그런 추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변조은 목사의 당초 계획은 한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교회를 세워서 통합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한 소속감을 원하는 한국인들은 자신이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교파를 따르고 싶어했고, 그 교파 소속의 목사를 초청해 교회를 설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시드니에만 200개가 넘는 한인교회가 생겨났다.

    예수는 평생 집이 없었다

    변조은 목사는 존 하워드 호주총리와 논쟁을 벌일 정도로 호주 원주민 인권 보호에 단호하다. 그는 “아무런 협상이나 강화조약도 없이 호주대륙을 강점한 백인들이 애보리진을 학살하고, 혼혈 원주민 아동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고아원 등에 수용했던 잔혹행위에 대해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소수집단인 호주 원주민 그룹과 소수 이민자 그룹이 힘을 합해 다수집단인 유럽계 백인에게 차별당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며 이 같은 대안이 현실화되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물론 여기엔 호주 내 소수 이민자 그룹 중 하나인 한인들을 위한 배려도 담겨 있다.

    변조은 목사는 원주민 인권운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현재 행정수도인 캔버라에 거주하고 있다. 가끔은 시드니에 있는 한인교회에 와서 설교하는데, 인터뷰를 하기 위해 캔버라로 찾아갔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어허, 그건 곤란한데요. 오랜 세월 한국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왔기에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국인의 한없이 융숭한 마음은 그 어디에서도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젊은 시절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 농민에게 받았던 후대(厚待)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 전쟁의 폐허에서 불과 50여 년 만에 기적 같은 발전을 이루어낸 한국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가서 서울-부산 간 열차를 탔는데 딱 2시간30분이 걸리더군요. 1970년대 초엔 특급열차를 타도 9시간30분이 걸렸는데 말입니다. 한국 교회의 발전사는 또 어떻습니까. 밤낮없이 일하고 자기를 희생해서 교회를 세우는 과정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숨어 있지만….”

    -‘부정적인 요소들’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선 교회의 대형화와 호화로움을 들 수 있겠죠. 교회가 커지면 대체로 목사의 세력이 커집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전적으로 봉사를 위한 세력이어야 합니다. 남을 지배하기 위한 세력은 독약입니다. 교회의 근본자세는 겸손함과 인자함입니다. 교회나 목사의 성취가 인간의 힘보다는 하나님의 은총과 관대하심을 받아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의 편에 계셨고 평생 집도 없이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목사님 차가 많이 낡았더군요.

    “32만km를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끄떡없습니다. 목사는 크고 좋은 차를 타면 안 됩니다. 교인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호화롭게 살고 싶으면 목사 노릇 그만두고 사업을 해야죠.”

    -호주에 사는 한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한국인의 가장 훌륭한 덕목인 따뜻한 인간애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호주에서 여러 인종과 어울려 살면서 다른 쪽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장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과 한국인은 위대합니다. 이건 내 평생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듬뿍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한국인과 어울리며 살아온 내 생애가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한복 차려입은 벽안의 여의원

    호주의 든든한 친한파, 변조은 목사·버지니아 저지 하원의원

    지난 8월15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축하 연설을 했다.

    지난 8월15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는 남북 외교관이 함께 참여한 광복 60주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호주 한인 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벽안의 여성이 있었다. 버지니아 저지 뉴사우스웨일스주(州) 하원의원. 그는 행사에 참여한 400여 명 가운데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있었다. 빨간색 한복에 어울리게 축하연설도 아주 열정적으로 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남북이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광경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오늘은 호주의 ‘태평양 승리의 날(VP Day)’이기도 한데 남북한 외교관들이 다정하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올림픽 때와 같은 진한 감동을 느낍니다.”

    저지 의원의 연설이 처음엔 지극히 정치적인 수사(修辭)로 들렸다. 그런데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언론인 고직만씨가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다르다”고 했다. 고씨는 “저지 의원이 한국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인데, 마침내 한인동포 사회가 친한파(親韓派) 정치인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사이자 스트라스필드시(市) 의원인 권기범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저지 의원은 가끔 자신이 전생에 한국인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일 수도 있다. 정치인이다 보니 비(非)영국계 지역구민을 만날 때마다 같은 식으로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옆에서 지켜보니 그 말이 가벼운 조크가 아님을 알게 됐다.”

    버지니아 저지 의원이 어떤 연유로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저지 의원은 광복절 축하연설 말미에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스트라스필드 시장으로 일할 때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인의 의리 등에 대해 폭넓게 배웠습니다. 다 한국 친구들이 가르쳐줬지요.”

    역시 한국통 정치인다운 발언이었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다음은 저지 의원과의 1문1답이다.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봐요”

    -언제부터 한국을 제대로 알게 됐습니까.

    “세 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 초에 아이들 친구 중에 한국 아이들이 있었어요. 같은 학부모로서 그 아이들의 부모와 가깝게 지내며 한국과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1995년 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할 때 스트라스필드에 거주하던 고(故) 성기주(㈜개미스 사장, 벤디고은행 한인지점 초대 이사장, 재호한인상공인연합회 회장 역임) 회장을 비롯해 여러 한인을 만나며 한인 사회와 더욱 친숙해졌습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과 한국 문화, 한인 친구들이 전혀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친구들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한국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한국과 한국인은 한마디로 다이내믹하죠. 늘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에 감명을 받거든요.”

    -저지 의원의 지역구인 스트라스필드에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스트라스필드에 6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스트라스필드엔 서부 시드니에서 가장 살기 좋은 주택가와 명문학교, 공원이 많죠. 게다가 교통의 요지라 생활하기에 아주 편리한 곳인데, 이곳에 한인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평화롭게, 그리고 아주 열심히 살고 있어 보기 좋습니다. 그들은 다문화 사회인 호주를 모범적으로 이끌어가는 훌륭한 모델들이죠. 특히 스트라스필드역과 그 주변 상가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150여 개 상점과 사무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어요. 항상 깨끗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코리아타운입니다.”

    -현재 한국 정부와 연대해 추진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스트라스필드 시장으로 있을 때 한국 정부와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물론 수많은 한국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게 다행스럽긴 하지만. 최근 서울시의회 의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엔 열린우리당 산하 ‘우리여성리더십’ 주최 세미나에 참석해 ‘여성과 풀뿌리 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한 바 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 가운데 특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 있던가요?

    “얼마 전 한국인 친구 어머니의 칠순 잔치에 참석했어요. 다정다감한 한인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술잔이 왔다갔다하면서 대화가 무르익고 급기야 노래판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니 마치 제 고향집에 온 기분이 들었어요. 잔치가 끝나고 내겐 어머님이 한 분 더 생겼죠.

    저는 가끔 한국 친구들이 소개해준 노래방에 가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남편과 세 딸도 매우 좋아합니다. 한국의 전통의상과 전통무용엔 이미 익숙해졌어요. 전통한복과 개량한복이 한 벌씩 있습니다. 젓가락질은 이제 초보단계를 넘어서 국수도 거뜬하게 먹어요.

    한국은 이제 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어요. 많은 한국인을 평생지기로 갖게 되어 자랑스러워요. 저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권기범·박은덕 변호사 부부는 저를 ‘하프 코리언’이라고 부르죠.”

    버지니아 저지 의원은 캔버라 인근의 지방도시 쿠마에서 태어났다. 측량기사이던 아버지는 노동당을 지지했다. 저지 의원이 노동당에 몸담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그는 호주국립음대와 국립사범대를 졸업한 뒤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음악교사로 일했다. 의사인 남편과의 사이에 딸 셋을 낳고, 1995년 스트라스필드 시의원으로 선출됐다. 그후 2000년엔 시장, 2003년엔 뉴사우스웨일스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3전4기 신화’

    결과만 놓고 보면 탄탄대로를 지나온 듯하지만 그가 하원에 진출할 당시 기록한 ‘3전4기 신화’는 지금도 호주 정계에서 회자된다. 첫 번째 출마에서 3표, 두 번째 출마에서 1표 차이로 낙선하고 세 번째는 ‘낙하산 후보’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이 버지니아 저지 후보를 지원했다. 그런 까닭에 저지 의원이 한국 이민자 사회를 대표하는 후보처럼 여겨졌는데, 사실 한국인 유권자는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규모가 극히 작다. 그럼에도 저지 후보가 친한국계 후보임을 표방한 것은 그만큼 한국과 한국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정치적 모험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저지 의원을 좋아하고 열성적으로 지원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원에 진출해서 처녀연설(maiden speech)을 할 때는 한국인 지지자들이 국회 방청석을 가득 메웠을 정도다.

    한인들이 저지 의원을 이처럼 뜨겁게 성원하는 것은 일면 보은(報恩)의 측면이 강하다. 저지 의원은 스트라스필드 시장으로 재임할 때 한국계 주민과 상인들을 알뜰하게 보살폈다. 특히 거액의 예산을 들여 신축한 최첨단 스트라스필드 도서관에 많은 한국 도서를 비치해 한국문화에 대한 갈증을 풀게 했다. 도서관에서는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문화강좌도 계속 열리고 있다.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인과 친하게 지내는 호주 사람은 많다. 그러나 공적 차원에서 호주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서 발로 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헌신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호주 한인 사회는 소수민족 그룹 중에서도 작은 커뮤니티다. 그러나 한국과 호주의 교역 규모(한국은 호주의 4대 교역국)와 활발한 인적 교류를 감안하면 외형 이상의 의미를 지닌 커뮤니티 그룹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친한파 호주 인사가 태부족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변조은 목사와 향후 정치권에서 큰 역할을 해줄 버지니아 저지 의원 같은 호주인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동포사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시점이다. 지금처럼 뜨뜻미지근한 상태로는 동포 사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

    산타클로스가 수영복 차림으로 서핑보드를 타고 오는 나라, 호주의 12월은 30℃를 웃도는 한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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