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은 고유의 구성원리와 작동방식을 가진 하나의 생명체다.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은 이 생명체에게 뿌리로부터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거꾸로 오바마 당선자 역시 워싱턴에 적응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대통령직 수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바마 리더십은 백악관과 외교안보팀의 내부 정치,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 민주·공화 양당구도와 2010년 중간선거 등 앞으로 예정된 워싱턴 정치의 수많은 그물코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민주당은 생기가 감돌고 공화당은 생존을 걱정하고 있다. 특히 1994년 의회 장악과 2000년 대선 승리를 통해 워싱턴을 완전히 장악했던 공화당이 ‘로비스트 그룹도 공화당 중심으로 바꾸겠다’며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른바 ‘K스트리트 프로젝트’는 이제 부메랑이 되어 공화당 로비스트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간 대표적인 수혜자인 BGR홀딩스 같은 공화당 중심 로비회사들은 선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발 빠르게 민주당과 가까운 로비회사를 인수했다. 이제 그들은 지난 8년간 자신들이 해온 일들은 까맣게 잊은 듯 ‘초당파적 업무’를 공언하고 있다.
오바마는 과연 대선기간에 한 약속처럼 기존의 워싱턴 문화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이뤄낼 수 있을까. 지금 워싱턴의 눈과 귀는 모두 오바마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려 있다. 단순히 그가 대통령 당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당선이 갖는 역사성, 현 상황이 주는 긴박성, 그리고 무엇보다 워싱턴이 오바마라는 인물과 그의 리더십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 더욱 큰 이유다.
워싱턴은 단순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다. 워싱턴은 자기만의 활동방식을 가진 일종의 생명체다. 이제 이 생명체는 앞으로 최소 4년 동안은 오바마에게 적응해야 한다. 대통령 오바마의 스타일이 워싱턴 문화 전반에 미칠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 뒤집어 말하면 오바마 역시 워싱턴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성공적인 국정운영은 물론 재선(再選)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오바마의 워싱턴, 워싱턴의 오바마
분명한 것은 오바마의 리더십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리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강렬한 경험에 따라 세상을 본다. 매케인이 베트남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며 ‘국가는 절대 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에서 자라는 동안 미국을 주시하는 세계의 눈은 ‘힘의 미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미국 내에서 그가 소수인종으로서 살아온 다문화, 다인종의 삶은, 최소한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간 백악관의 주인이었던 주류 정치인들이 경험한 바 없는 소수의 시각에서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바마 리더십이 항상 자상하거나 진보적이기만 할 것이라고 보면 큰 오산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조건이 자칫하면 대중에게 약자의 모습으로 비치거나 자신이 소속된 집단만을 대표하는 것처럼 규정될 위험이 있음을 그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터득하고 있다. 오바마는 분명 이전의 미국이 갖고 있던 리더십과는 다른 관점으로 미국과 세계를 바라보며 협력에 나서겠지만, 필요할 경우 더 강경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역시 오바마 대통령이 이끌어갈 한반도 관련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그가 대선과정에서 한 언급이나 민주당 주변 동아시아 전문가들의 면면에만 주목해서는 곤란하다. 그가 새롭게 시작할 워싱턴 정치, 백악관 정치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8년 독립을 선언한 이스라엘을 정식국가로 승인해준 미국의 중대한 결정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조지 마셜 국무장관 등 당시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클라크 클리퍼드 같은 정치분야 참모들의 자문을 토대로 내린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입장에서 오바마의 워싱턴, 워싱턴의 오바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살펴봐야 하는가.
1. 백악관 비서실장의 정치방정식
조지아 주 출신으로 사실상 무명인사나 다름없었던 지미 카터는 1976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주지사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왔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백악관과 내각을 채웠다. 이른바 ‘조지아 마피아’다. 특히 카터 대통령은 연방의회와 워싱턴 언론을 다뤄야 할 비서실장과 대변인에 핵심참모인 해밀턴 조던과 조디 파월을 임명하는 등 전통적인 워싱턴 정치와 거리를 유지했다.
더욱이 민주당은 1976년 경선 당시 ‘진정한 민의를 반영한다’는 취지로 연방의원들이 주로 맡던 당연직 대의원을 거의 두지 않았기 때문에, 카터 후보는 선거기간에도 의원들을 접촉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의회 역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긴 했지만 카터의 공약이나 정치노선을 낯설어했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워싱턴에 편입되기 위해 필수관문 격이었던 워싱턴의 사교문화가 막 조지아에서 날아온 이들에게 익숙할 리 없었다. 결국 카터 대통령은 고립됐고, 그의 초당파적인 국정운영 시도는 번번이 민주당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쓴맛을 봐야 했다. 그렇다고 공화당이 도와줄 일도 없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은 이러한 교훈을 무시하지 않았다. 1980년 대선에서 승리한 레이건 역시 캘리포니아 인맥으로 참모 진용을 꾸렸지만 비서실장만큼은 대표적인 워싱턴 인사이더였던 제임스 베이커를 임명했다. 기실 베이커는 공화당 내에서 레이건의 최대 정적(政敵)이던 조지 부시의 가장 절친한 참모였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과거의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대로 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초반 아칸소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토머스 맥라티를 비서실장에 임명하는 등 워싱턴을 등한시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준비 부족의 결과였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위기에 이은 1994년 중간선거 패배 이후 빠르게 워싱턴 문화에 적응해 나갔고, 결국 빼놓을 수 없는 인사이더가 됐다.
이렇게 볼 때 오바마 당선자가 램 이매뉴얼 하원의원을 비서실장으로 내정한 것은 그가 냉철한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준다. 그가 상원의원으로 워싱턴에 들어온 것이 불과 4년 전이다. 누군가는 의회와 워싱턴을 꿰뚫고 있어야 하고, 또 대통령이 ‘초당파적 국정운영’을 말할 때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 혹은 협박(?)하는 악역을 맡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램 이매뉴얼은 누구보다도 적격이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백악관뿐 아니라 의회에서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 대통령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카리스마형 지도자였고, 워싱턴에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존슨 대통령의 경우,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주의적인 남부 출신 다선 의원들이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원의 상황을 무릅쓰고 ‘위대한 사회’를 기치로 하는 각종 민권정책과 빈곤층 지원정책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는 아직 보수화하지 않았던 북동부 공화당의 도움과 함께 민주당 의원들을 각개격파한 존슨 대통령의 탁월한 의회장악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바마에게는 본인 대신 존슨 같은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서실장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려면 세 가지 덕목이 필요하다. 우선 대통령의 신뢰가 있어야 하고, 대중적인 무게가 있어야 하며, 워싱턴 정치에 능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매뉴얼을 능가하는 적임자는 없다.
악역을 맡을 사람
이매뉴얼은 1992년 대선 당시 클린턴 캠프에서 일했던 베테랑이다.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한 그는, 맥라티 비서실장이 젊은 직원들을 정리한다며 사직을 권고하자 “대통령 본인이 내 눈을 쳐다보고 직접 말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버텨 끝내 생존했을 만큼 만만찮은 공력의 소유자다. 이후 그는 2000년 퇴임까지 승진을 거듭해 클린턴의 핵심참모로 거듭났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념적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사고로 가운뎃손가락이 절단됐지만 화가 나면 욕설을 내뱉으며 그 짧은 손가락을 치켜올리는 독한 캐릭터는 정평이 나 있다. 백악관을 다룬 정치드라마 ‘웨스트윙’의 주인공 조시 라이먼이 바로 그를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훨씬 순화된 성격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당초 비서실장으로 함께 거론됐던 톰 대슐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매뉴얼에 비해 지나치게 ‘나이스’하다는 점이 한계였을 것이다.
데니스 맥도너
톰 대슐 상원 원내대표 외교정책보좌관을 역임했고, 에너지 문제와 환경정책에 특별한 관심과 전문성을 보였다. 오바마 캠프 외교안보정책팀 간사를 맡아 후보에 대한 현안보고를 담당했고, 미국진보센터(CAP)에도 소속돼 있다. 과감한 환경정책 제안으로 친(親)기업 세력과 충돌할 우려도 있다.
리처드 덴지그
클린턴 행정부에서 해군장관을 역임했고, 국방부 생물테러 관련 컨설턴트로 일했다. 변호사 출신으로 스탠퍼드대와 하버드대에서 법률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해박한 법률 지식으로 민감한 군 정책을 사려 깊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된다. 국제적 군비감축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그레고리 크레그
클린턴 행정부 백악관 참모를 지냈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장관 재임 시절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을 지냈다. 워싱턴 로펌인 윌리엄스&코널리의 파트너 변호사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예일대 로스쿨 동기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외교안보분야 보좌관을 지냈고 남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다.
앤서니 레이크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 교수다. 케네디 시절 외교관 생활을 시작해 헨리 키신저가 이끌던 NSC에서 근무하다 닉슨 대통령의 베트남전 확전 결정에 반대해 사임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을 역임했다.
수전 라이스
클린턴 행정부 국무부에서 아프리카담당 차관을 지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이다. 수단 내전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유명하며, 국제적 빈곤문제를 미국의 안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2004년 존 케리 민주당 대선캠프에서도 수석외교안보보좌관을 역임했다.
마크 리퍼트
오바마 상원의원실의 외교분야 보좌관 출신으로, 그전에는 패트릭 리히 버몬트주 상원의원(법사위원장) 외교안보 보좌관을 지냈다. 해군 정보장교로 이라크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다. 안보정보와 예산문제를 전담하고 있다.
물론 이매뉴얼에게도 오바마 백악관의 비서실장 자리는 정치적 도박에 가깝다. 현재 민주당 하원 서열 4위, 이대로 가면 하원의장도 가능하다는 평이 지배적인 그가 이 자리를 선택한 것은 분명 결단이다. 바로 그 때문에 대통령과 동향인 그는 특별한 실수가 없는 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을 훨씬 능가하는 강한 권위와 권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매뉴얼이 이스라엘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올 정도로 철저한 친(親)이스라엘주의자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부통령직의 역할과 한계
미국에는 부통령에 관한 오래된 농담이 있다. 어느 할머니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다른 한 아들은 부통령이 됐고, 이후 할머니는 두 아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통령이라는 자리는 대선이 끝나고 나면 관심의 초점에서 사라지는 자리임을 풍자한 유머다.
그만큼 부통령은 형식적인 직책으로 평가받았다. 사실 건국 당시부터 부통령직은 정치적 타협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 필요성에 대해 꾸준히 의문이 제기돼왔다. 헌법에 따라 상원의장을 겸임하도록 돼 있지만, 이는 상원표결이 가부 동수일 때만 유용하다. 2000년 대선 당시 예비경선에서 조지 W 부시와 격돌했던 존 매케인은 “부통령 제의가 오면 수락할 것이냐”는 질문에 “부통령이 하는 일이라곤 독재자들의 취임식이나 장례식에 가거나 아침마다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것 뿐”이라며 일축한 바 있다.
부통령이 일정부분 정치적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카터 행정부 시절 월터 먼데일 부통령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직전인 닉슨 행정부의 넬슨 록펠러 부통령은 부통령실에 대한 예산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비로 보좌진을 채용하고 출장비를 쓸 정도였다.
먼데일 부통령이 비교적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카터 대통령이 워낙 워싱턴 경험이 없는 중도성향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상원의원으로서 노조 등 진보진영의 지지를 받았던 먼데일이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먼데일 부통령이 당선 후 정기적으로 대통령과 단독 오찬회동을 갖고 인사 및 정책에 대한 자문에 답하거나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기밀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는 바로 이 먼데일 부통령을 자신의 역할모델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부통령으로 평가받는 체니 부통령은 권력을 남용하고 월권을 자행했다는 비판에 시달려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로 꼽혔다.
오바마 당선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국을 비롯한 나라들이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를 통해 새 정부와의 관계를 증진하려고 도모하고 있다. 바이든의 오랜 동아시아담당 참모인 프랭크 자누지 전 상원 외교위원회 전문위원이 오바마 캠프의 한반도정책 팀장이란 사실 역시 ‘바이든-자누지 라인’이 한반도정책을 주도할 것이라는 지나친 기대를 심어준 측면이 있다.
선을 넘는다면
물론 이들의 지식과 경험, 인맥이 오바마 행정부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워싱턴의 권력 역학구조상 실질적인 역할은 공식직책이 아니라 권력과의 접근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론(論)’이다. 자누지 전 전문위원의 역할은 바이든 부통령의 영향력에 정비례할 수밖에 없고, 바이든의 역할은 오바마의 결정에 따라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조지프 바이든이 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대선기간에 매케인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몇 안 되는 시점 중 하나가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무렵이었다. 이 시기 오바마는 경합 예상지역 출신인 팀 케인 버지니아 주지사나 에반 바이 인디애나 주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해 유리한 선거구도를 만드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터진 그루지야 사태로 오바마의 외교안보분야 경험부족이 도마에 올랐고, 결국 오바마는 이러한 의구심을 상쇄해줄 바이든 상원외교위원장을 부통령후보로 택했다. 펜실베이니아 주 서민 출신으로 백인 노동자계층에 지지자가 많다는 장점도 고려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미 65세라는 적잖은 나이로 부통령을 발판 삼아 대권을 꿈꾸기에는 늦은 바이든으로서도 굳이 부통령 제안을 수락할 이유는 없었다. 이러한 그를 설득하는 데는 먼데일과 고어가 누렸던 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보장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이 주효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외교안보정책에서는 일정부분 역할을 부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이든 지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변화’라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인물이냐는 비판과 함께 말실수를 할 위험이 높다는 지적도 흘러나왔다. 29세에 상원에 당선되어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당의 기대주로 주목받아온 바이든은 스스로에 대한 과신과 지나친 자유분방함 때문에 빚어진 말실수 등으로 구설에 올라 어려움을 겪은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대선 막바지에 바이든 후보는 “오바마가 당선되면 6개월 안에 그를 시험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발언으로 이 같은 우려를 입증한 바 있다. 선거과정에서 오바마와 바이든 사이에 이뤄진 약속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바이든 부통령이 대통령의 의중을 주의 깊게 살피고 무리를 범하지 않는 부통령 고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가 실수로라도 선을 넘을 경우,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3. 외교안보라인의 내부정치
오바마 당선자 외교안보라인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수전 라이스 전 국무부 차관보와 앤서니 레이크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대선 직후인 11월7일 외교안보자문단에 메모를 보내 “당선자의 외교안보정책에 관해 언론 접촉이나 외국 정부와의 접촉을 피해달라”고 당부했다. 관련 접촉창구는 당선자의 보좌관인 데니스 맥도너와 마크 리퍼트로 단일화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외교안보분야에 경험이 많지 않은 오바마 당선자는 선거기간 외교안보분야 정책자문단을 꾸리는 데 많은 신경을 썼다. 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뒤 발표된 300명의 자문단은 민주당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총망라한 것이었고, 이들은 단순히 이름만 빌려준 게 아니라 20개 분야로 나뉘어 매일 아침 현안 정리와 예상문답을 만들어 후보에게 팩스로 보냈다. 이제껏 어느 대선캠프에서도 보지 못한 체계적이고 밀도 높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대선에서 승리한 지금, 이들 자문단 가운데 상당수는 백악관이나 안보부처에 입성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안보라인은 일단 이들 300인을 중심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오바마 후보를 초기부터 자문하고 보좌했던 인물들이 인선과 정책을 주도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에서는 제프 베이더나 웬디 셔먼, 프랭크 자누지 등 동아시아정책에 직접적인 경력을 가진 이들을 주로 주목하지만, 실제로 외교안보정책과 인선의 핵심은 이들에게서 나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가까운 사례로 부시 행정부 초기에 대북정책 담당자로 행정부에 자리를 잡았던 제임스 켈리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나 마이클 그린 전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담당 보좌관의 경우 내부 역학관계 속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오히려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어떤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한반도 정세에 훨씬 의미 깊게 작용한 바 있다. 한편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 특사나 크리스토퍼 힐 현 국무부 차관보 등 이전 행정부에서 대북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했던 인물들은 공교롭게도 그전까지 한반도나 동아시아에 대해 전문성이나 경력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볼 때 데니스 맥도너와 마크 리퍼트는 한국에서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두 사람은 수백명의 외교안보팀 가운데 거의 유일한 유급참모다. 오바마 상원의원실의 외교보좌관을 지낸 리퍼트는 일찍부터 오바마 당선자와 손발을 맞춰왔고, 맥도너는 선거기간 관련정책을 총괄하는 캠프 외교보좌관을 수행했다. 특히 맥도너 보좌관의 경우 매일 아침 들어오는 안보관련 자료를 후보에게 최종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권력과의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자문그룹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메모를 보낸 수전 라이스와 앤서니 레이크는 클린턴 행정부 NSC에서 일했다. 두 사람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브랜트 스코크래프트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처럼 사제지간 같은 사이다. 콘돌리자 라이스와 스코크래프트가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를 거치는 동안 다른 길을 걸었다면, 레이크와 수전 라이스는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다.
이들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 리처드 댄지그 전 해군장관과 그레고리 크레그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이다. 특히 크레그는 클린턴 부부와 예일대 로스쿨 동창으로 ‘지퍼 게이트’ 탄핵 당시 클린턴 대통령을 변호한 적이 있는 대표적인 워싱턴 인사이더다. 클린턴 부부와의 인연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오바마를 도와 워싱턴 인사이더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현재는 300인 명단에 없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인물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인 사만다 파워다.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괴물에 비유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돼 끝내 사퇴한 파워는, 이전부터 유대계 단체나 보수성향 지지그룹으로부터 인권문제와 중동문제에서 지나치게 진보적이라는 공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오바마와 오랜 동지적 신뢰관계를 맺어온 그는 상원인준이 필요하지 않은 직책에 기용되거나 오바마 대통령 안보정책 자문의 ‘왼편’을 담당하는 목소리가 될 것이다.
11월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앞쪽 가운데)가 시카고에서 가진 당선 후 첫 기자회견.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 당선인은 팔짱을 낀 채로, 램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당선인 양옆에서 기자회견을 듣고 있다. 뒷줄은 왼쪽부터 로라 타이슨 전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의장, 데이비드 보니어 전 민주당 하원의원,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제니퍼 그랜홀름 미시간 주지사,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리처드 파슨스 타임워너 이사회 의장, 앤 멀케이 제록스 회장,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오바마 안보 자문단의 핵심 가운데 상당수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점. 그럼에도 클린턴 이너서클에 들지 못했거나 최고위직이 아닌 그 다음 직급에서 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힐러리 캠프 자문단에는 클린턴 행정부의 안보정책 핵심을 맡았던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결국 오바마의 안보라인은 자신들의 전직 상사들과 맞대결을 벌여 승리했고, 이제는 전세가 역전되어 그들을 상대로 인사 논의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리처드 홀부룩 전 유엔대사다. 민주당이 낳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외교관으로 손꼽히는 홀부룩은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경우 국무장관 1순위였지만, 오바마 자문단 300인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는 한때 친구였고 카터 행정부 시절 함께 일하기도 했던 앤서니 레이크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한동안 경쟁관계를 형성했던 두 사람 사이의 골이 깊어져 대화도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됐고, 민주당 경선 초기 홀부룩의 ‘스타 파워’에 밀린 레이크는 당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오바마 캠프로 밀려났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러나 결국 대권을 거머쥔 것은 오바마고, 두 사람의 처지도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홀부룩은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를 통해 국무장관 입각을 노리고 있지만, 레이크와의 악연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
4. 싱크탱크 담론 정치의 세대교체
1973년 보수주의의 장기적 미래 전망과 이를 통한 선거 승리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워싱턴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다. 헤리티지재단은 종전의 싱크탱크들이 보여준 정책생산방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책의 메시지화와 함께 커뮤니케이션 라인 강화에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들이 펴낸 ‘리더십을 위한 위임(Mandate for the Leadership)’ 보고서는 레이건 행정부의 국정운영 지침서로 활용됐다. 이후 헤리티지재단이 보수진영의 인재 충원통로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당 진영은 1988년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헤리티지 설립’을 위해 줄기차게 노력해왔다. 문제는 돈이었다. 민주당 내부는 물론 리버럴 그룹 전체의 담론을 주도하려면 기존 싱크탱크와는 차별화된 우수한 인력을 확보해야 했고, 여기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민주당 진영의 새로운 싱크탱크를 가장 절실히 원한 정치인은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빌 클린턴이 대권을 거머쥐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뱅크 구실을 했던 민주당리더십회의(DLC)와 산하의 진보정책연구소(PPI)만으로는 개혁세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어렵다는 것이 고민의 요체였다. 이 때문에 힐러리는 조지 소로스 등 반(反)부시 성향의 재계 거물들로부터 수백만달러를 기부받았고, 새로운 싱크탱크의 전체적인 틀을 만드는 작업을 클린턴 백악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에게 맡겼다.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2003년 모습을 드러낸 미국진보센터(CAP·Center for American Progress)다.
5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 단체가 오바마 인수팀의 인재·정책 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포데스타는 예비경선까지만 해도 힐러리 지지자였지만, 오바마는 민주당 후보지명을 받자마자 선거 캠페인과는 별도의 정권인수 준비팀 준비를 포데스타에게 맡겼다.
선거 중에 정권 인수 준비팀을 꾸리는 것은 미국 정치의 전통 중 하나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된 존 F 케네디는 당선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실제로 1952년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 사이의 권력이양은 사실상 아무것도 이관된 것이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이렇게 해서 케네디 후보가 처음 시작한 인수팀 준비는, 이후 대통령선거 때마다 각 당 후보가 결정된 직후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후보별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정착됐다.
이렇게 해서 CAP는 대선 전까지 오바마의 인수팀 사무실 역할을 해왔다. 포데스타 본인은 행정부 직책을 맡을 의사가 없음을 이미 밝힌 바 있기 때문에 대신 CAP 인사들을 대거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 인수팀장을 맡은 포데스타는 이미 주요인사 수백명의 파일을 검증하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내각이 구성될 수 있도록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임 대통령 6명의 당선자 시절 행보를 세밀히 분석해 당선 다음날부터 취임식까지 76일 동안 오바마 당선자가 해야 할 일과 대(對)국민 메시지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는 역대 당선자의 시간별 동선까지 분석했다는 후문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CAP는 명실상부한 오바마 행정부의 싱크탱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2006년 중간선거와 이번 대선에서 CAP는 민주당 진영의 메시지 홍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대선 당시 1년밖에 안 된 신생 연구소로 메시지 홍보를 담당했던 인원이 단 두 사람뿐이었다는 CAP가 이제는 30명 가까운 메시지 홍보전문 인력을 두고 있으니, 그 위상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5. 민주당 의회 장악이 주는 기회와 위기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대선 승리와 함께 의회 장악이라는 큰 성공을 거뒀다. 한 석만 앞서도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하원에서 의석 격차를 더욱 벌렸다. 민주당 출신 하원의장과 원내지도부는 모든 법안의 상정 일정을 정하고 위원회의 법안심사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상원의 경우에는 다수당의 이러한 독주를 막는다는 취지에서 소수당에 의사진행발언권(필리버스터)을 부여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필리버스터조차 무력화할 수 있는 ‘꿈의 60석’을 노렸지만, 끝내 이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렇대도 49대49, 사회당 출신인 버니 샌더스 의원과 민주당 탈당 후 동반자 관계에 머무른 조 리버먼 의원까지 합쳐야 겨우 51대49의 아슬아슬한 우위를 점했던 지난 회기와는 천양지차다. 모든 상임위별로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위는 일견 오바마 행정부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큰 힘이 되리라는 예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거꾸로 이러한 민주당의 융성이 행정부에 독(毒)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민주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다. 지난 8년간 자신들의 모든 어젠다가 사장되고 무시됐던 설움을 단번에 보상받을 수 있다는 기대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이 되고도 백악관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고 변명해왔던 민주당으로서는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그간의 한계를 씻어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욕과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예비경선부터 승리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진보진영 또한 새 행정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사만다 파워
인권전문가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다. 이스라엘과 이란 문제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외교가의 의심을 받았다.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오프더레코드 발언이 불거져 오바마 캠프와의 공식관계는 단절된 상태.
척 헤이글
1996년과 2002년 네브래스카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로 각종 무공훈장을 받았고, 1980년 대선부터 선거에 참여했다. 독립적인 정치노선으로 초당파적인 입장에 자주 서왔지만, 2008년에 3선 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공화당 경선 당시 유력한 부통령후보로 꼽혔다.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오래 일했다.
존 포데스타
클린턴 백악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CAP 대표. 현재는 오바마-바이든 정권 인수팀의 책임자다. 송무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다 톰 대슐 상원의원의 법률보좌관으로 의회에 입문했으며, 동생과 함께 공공컨설팅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톰 대슐
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1978년 하원, 1986년 상원에 당선된 사우스다코다 출신 유력 정치인. 1994년 공화당의 의회 장악 후 소수 민주당에서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2004년 4선에 실패한 후에는 워싱턴의 로비전문 로펌에서 고위정책자문역을 맡았다. 보건복지장관 입각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찰스 오글트리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로 오바마 당선자 부부의 은사다. 사회정의와 인종문제에 천착한 연구활동뿐 아니라 칼럼니스트로도 명성이 높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법률가 100인,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100인 등에 선정된 바 있다.
데이비드 액설로드
현 AKP & D메시지& 미디어 대표. ‘시카고트리뷴’ 시청담당 기자로 출발해 1984년 폴 사이먼 상원의원 선거의 공보담당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시카고 지역의 민주당 개혁 정치인들을 자문해오다가 흑인 정치인의 중앙무대 활동으로 초점을 옮겼다. 오바마 당선자와는 2004년 상원의원 선거부터 인연을 맺었다.
이렇듯 의욕 넘치는 의회와의 관계정립이야말로 오바마 대통령의 성공을 좌우할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이매뉴얼 비서실장 내정자와 피트 루즈 부실장 내정자는 하원과 상원에서 민주당을 관리하는 한편 복잡한 법안 처리 전략에 관해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 이들이 의회에서 터져나오는 갖가지 목소리를 어떻게 조율하고 통제해 백악관의 전략에 일치시키느냐에 따라 오바마 행정부는 승승장구할 수도, 좌충우돌할 수도 있다.
경기부양책과 인준청문회
한반도정책을 다루는 상원의 주요 상임위로는 주한미군 재배치에 관여할 국방위원회와 한미 FTA를 다루는 재경위원회가 있다. 이들 상임위의 위원장은 칼 레빈 의원과 맥스 버커스 의원이 유임될 가능성이 높다.
외교위원회의 경우 부통령에 당선된 바이든 의원 다음 선수(選手)인 크리스 도드 의원이 위원장을 맡을 차례지만, 본인이 금융위기에 전념할 뜻을 밝힌 바 있기 때문에 2004년 대통령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에게 순서가 돌아갔다. 케리 의원 본인은 국무장관에 욕심내고 있다는 후문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외교위원회를 약화시키면서까지 헤비급 멤버인 케리를 외교안보팀에 불러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의회에서 지원 사격해줄 선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젊은 오바마 리더십의 등장은 의회에도 젊은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러 위원회에서 연로한 다선 의원들에게 위원장 자리를 후배들에게 양보하라는 종용이 직간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러한 그림이 성사되면 젊은 의원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민주당 지도부는 현안 대응과 법안 처리과정에서 활력을 띨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 당선자가 제시한 경제정책 통과 여부와 내각인사 인준청문회는 새 행정부와 새 의회지도부 사이의 궁합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가 취임 직후 내놓을 새 경기부양책을 의회가 얼마나 신속하게 처리해주는지에 따라 새 대통령의 정책운용은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인사청문회의 경우, 사전준비가 부족했던 클린턴 행정부는 많은 인사가 검증과정에서 탈락하고 양당 간의 정치싸움으로 번지는 바람에 임기 초반 상당기간 인사공백이 지속된 바 있다. 박빙 승부로 12월 중순 대법원 판결까지 기다려야 했던 2000년 부시 행정부도 짧은 준비기간 탓에 취임식 후에야 인선을 마치는 소동을 빚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성패는 상당부분 이러한 전례를 어떻게 피해가느냐에 달려 있다.
6. 초당파 내각 구성과 중도정치의 가능성
오바마 당선자의 대중과의 소통능력, 혹은 공감대 형성능력은 의회 법안투표에서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그가 중도우파 성향이 강한 미국 유권자들의 호감을 얻는 원동력이었다. 그 요체는 절대로 상대를 논리로써 제압하거나 도덕적 우위를 과시하지 않는 그의 설득방식에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아도 메신저를 신뢰하게 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와 함께 일리노이 주 상원의회에서 활약한 공화당 의원은 “다른 흑인 정치인들과 얘기하다 보면 백인의 ‘원죄’에 분노하는 그들의 태도 때문에 반감이 일어 자신이 더 ‘하얗게’ 되는 것을 느끼지만, 오바마와 이야기하면 스스로 무장해제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역전의 리더 검은 오바마’의 저자인 박성래씨 역시 오바마의 힘은 공감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유로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오바마가 지난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달리 분열적이고 소모적인 워싱턴 정치의 작동방식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오바마는 대선 초반, 정적을 기용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링컨 대통령의 사례를 언급하며 초당파 내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하버드 로스쿨 시절부터 오바마 당선자의 멘터 역할을 해온 찰스 오글트리 교수도 “오바마 내각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다양한 인종, 성향, 성별을 반영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척 헤이글을 주목하라
공화당 또한 당선자와 비서실장 내정자가 민주당 의회의 기대치를 일정 부분 조절하면서 초당파적인 행보를 보인다면 초반 경제정책 통과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상당부분 협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바마가 갖는 상징성과 경제위기가 갖는 위기감이 자칫 공화당에 ‘방해꾼’ 이미지를 씌울지 모른다는 정치적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놓고 보자면 오바마 행정부의 첫 내각에는 공화당 출신 인사가 등용될 가능성이 높다. 로버트 게이츠 현 국방장관의 유임 등 안보라인에서 공화당 인사가 발탁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 경우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 척 헤이글 네브래스카 주 상원의원이다.
국방위원회와 외교위원회 등에서 전문성을 보여준 바 있는 그는 2004년 이후에는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매케인 의원처럼 베트남전 참전용사지만 2006년부터는 매케인 의원의 이라크전 지지에 반대해 대선에서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로 결정된 후 이라크 순방에 나섰을 때 공화당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동행했다. 리처드 루거 전 외교위원장이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등이 상징성이나 비중으로 보아 입각하기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면 헤이글은 더욱 매력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오바마의 초당파적 인재 등용은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한 포석이기도 하지만 다가올 선거를 대비하는 측면도 크다. 이번 대선 결과는 오바마를 선택하는 것 못지않게 부시 행정부의 실정(失政)책임을 묻는 측면이 강했다. 이러한 판세를 잘못 읽고 독주할 경우 민심이 순식간에 돌아설 가능성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오바마 대통령이 논쟁적인 정책보다는 합의가 가능한 정책을 중심으로 경제 회복에 집중하며 중도층을 굳건히 다지는 행보를 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7. ‘상시 선거’를 위한 필승 전략
워싱턴에서는 매일매일 선거기간이 아닌 날이 없다. 오늘 선거 결과가 발표되면 내일부터는 다음 선거를 치를 자금 준비에 나선다. 스캔들로 퇴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정치인이 선거자금 모으기가 지겨워 정계를 떠난다고 할 정도다. 국정을 책임지려면 선거 승리는 기본이다. 오바마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바로 2년 뒤 중간선거에서 첫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미국 국민들이 한 당에 연속으로 표를 몰아준 경우는 많지 않다. 민주당은 이미 2006년과 2008년 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 더 올라가기란 쉽지 않다. 이들 선거에서 추가로 승리한 지역은 대부분 중도 혹은 중도보수 성향이다. 이들 지역 유권자들의 이해관계에 얽힌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부각되면 대통령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간선거에서 패하는 경우 재선 가도가 불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곧바로 레임덕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클린턴 대통령이 1년 이상 이런 상황을 경험했고, 2006년 선거에서 진 부시 대통령은 이후 2년간 워싱턴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대통령이 됐다.
9월 금융위기 이후 워싱턴 인사이더들은 공공연히 리더십 공백을 떠들었다. 이는 선거에서 국제문제가 절대로 국내문제를 압도할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대(對)러시아 혹은 대(對)중국 정책, 이란이나 북한의 핵 문제 같은 외교안보정책 역시 국민 여론과 국내 정치의 복잡 미묘한 이해관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02년 북한인권법안 통과과정에서 기독보수주의자들이 법안 내용과 의도에 동의하지 않던 상원의원들을 압박해 끝내 성공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피트 루즈
오바마 상원의원실 비서실장. 현재 오바마-바이든 정권인수팀의 공동대표로 백악관 비서실 부실장에 내정돼 있다. 톰 대슐 전 원내대표의 복심으로 그의 선거패배와 함께 워싱턴을 떠나려 했지만,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이 파트너십을 제의함에 따라 그의 비서실장이 됐다. ‘101번째 상원의원’이라는 별명은 의회 내에서 그가 갖고 있는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밸러리 재럿
정권인수팀 공동대표로 리처드 데일리 시장 시절 시카고 부시장을 지냈다. 미셸 오바마 당선자 부인과는 상사로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변호사 출신으로 2004년 오바마 당선자의 상원의원 선거 당시 재정책임을 담당했고 현재는 시카고 헤비타트의 대표도 맡고 있다. 오바마 당선자의 장단점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인물로, 당선자가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워싱턴 정치의 논리로 볼 때, 백악관이나 의회는 한국 정부보다는 오히려 미국 내 한인유권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가능성도 있다. 정치인에게 합법적인 선거자금과 표를 모아주는 세력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이뤄져야 하고, 한국 정부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움직임이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한미FTA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의 요청 때문에 의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쏟게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2010년 중간선거와 2012년 재선 도전을 준비해야 하는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일단 대통령령을 통해 지지자들을 안심시키는 제스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부시 행정부 8년간 시행된 대통령령의 각종 결정사항들을 되돌리는 일이 그 핵심이지만 동시에 격렬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을 자극하지 않는 정교한 전략을 준비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민감한 작업은 오바마 대선 캠프의 수석전략가를 맡았던 데이비드 액설로드가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 기간 그가 주도한 정밀한 이미지 메이킹 작업, 즉 ‘훌륭한 대통령감의 피부색이 검은 것일 뿐 흑인이 대통령후보가 된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중도 부동층 유권자에게 유효하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액설로드가 정권인수팀 공동대표로 선임된 밸러리 재럿과 함께 이른바 ‘시카고 마피아’의 이너서클 역할을 하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 결론은 현실주의다
지난 21개월의 선거 기간 오바마 후보가 보여준 침착함은 실로 경이로웠다. 언론에서 “그는 과연 언제 화를 내는가” 궁금해할 정도였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는 수많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각 후보 캠프에서의 내부 권력다툼은 물론 후보의 말실수나 고비마다 이뤄지는 선거캠프 주요 포스트의 변화는 대선 캠페인의 당연한 모습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오바마 캠프는 이러한 상식을 깼다. 힐러리나 매케인 캠프가 일반적인 대선 캠페인의 특성을 부정적인 측면까지 모두 보여줬다면, 오바마 선거본부는 그 내부에 아무런 드라마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안정되고 냉정한 모습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후보는 물론 핵심참모들조차 대선승리 경험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 특히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된 이후 오바마 후보가 보여준 냉정한 대응은 워싱턴 인사이더들에게 ‘오바마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은 단순한 정책결정의 장이 아니라, 신임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웬만한 기업의 1년 예산을 넘는 선거자금을 운용하는 후보의 태도는 그의 리더십을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상당히 안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향을 택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해진다.
대선 초반 정부의 선거지원금을 받을 것인지 여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되자 오바마 후보는 “상대후보가 받는다면 우리도 받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모금에 자신감이 붙자 약속을 지키라는 매케인 진영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모금에 나서 성공함으로써 막판까지 상대를 압박하는 전략을 택했다. 제러마이어 라이트 목사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애초에는 “수십년간 나의 목사였던 사람과 인연을 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지만, 이후에도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자 일주일 만에 관계 단절을 선언하며 조기 진화에 나섰다.
가장 원만한 정권교체기
선거 기간에 보여준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필요에 따라 입장을 바꾸거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무서운 현실주의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선 직후 그가 한 연설이나 11월7일 첫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국민의 기대치를 낮추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동시에 부시 현 대통령을 넘어서는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의도다.
이는 선거 캠페인 기간에 후보 본인 혹은 그의 참모들이 언급했던 대담하고 새로운 접근에도 연결해 생각할 수 있다. 예전에 했던 말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신중한 접근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오바마 당선자의 안보분야 참모그룹 핵심은 전반적으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보다도 진보적이므로, 클린턴 시절의 중량급 인사들을 정책적 균형추로 활용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워싱턴 정치와 관련해서도 인사이더들에게 위협을 느끼게 하는 방식의 개혁보다는 변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면서 동참을 이끌어내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미 그는 정권 인수작업 진행과정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협조를 받으며 가장 원만한 정권교체기를 보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는 업무이양 역시 업적으로 생각하는 부시 행정부 구성원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오바마 인수팀이 오만한 점령군의 위세를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일반적으로 권력 인수인계 과정에서의 잡음은 주로 신임 정권의 태도나 자세가 도화선이 돼 불거졌다. 존 포데스타, 톰 대슐, 조지프 바이든, 램 이매뉴얼 등 당선자 주변의 중량급 인사 면면은 그가 불필요한 일로 잡음을 만들지 않고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워싱턴의 협조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제임스 베이컨 전 국무장관은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국가 국민이 그 입장을 수용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정권이 바뀌든지 약속이 실행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역시 집권 후 참모들에게 “나보고 외교안보를 모른다고 했지만 결국 외교란 친구를 만들고 우리 이익을 그들에게 설명, 설득하는 것이더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설득의 고리를 찾아서
오바마 리더십의 등장은 전세계에 새로운 기대와 흥분을 안겨주었지만, 이와는 별도로 한국 정부에는 혼란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기실 중요한 것은 어떤 인맥이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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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로 가느냐가 아니다. 한국의 이익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얻을 것인지가 명확하다면, 왜 그러한 정책방향이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해내는 작업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워싱턴 내부의 메커니즘과 인사이더들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설득의 고리를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입장과 현실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의 논리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한국이 상대해야 할 상대는 오바마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다. 새 리더십을 맞이하는 ‘워싱턴이라는 생물체’ 전체다.